양자역학과 해체주의 건축
양자역학은,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어렵게 말하자면 세상은 '비선형'적으로 전개되고 '확률적'으로 존재하며 '다층적이고 다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관찰자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 전자는 입자이기도 했다가 파동이기도 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동양인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얘기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또 사물은 비선형적으로 모호하게 생겨먹은 것이니 이를 제대로 알고 싶으면 비선형 궤적의 어느 단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을 포착해서 '개략적 또는 확률적'으로 실체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서양에서 이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20세기 초의 과학자들과 정신의학자들이었다.
양자역학 이전에도 삼라만상이 비선형 형태로 전개된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들은 많았다.
석가모니, 노자, 버지니아 울프, 끌로드 모네, 칼 융 같은 사람들이다. 대체로 통찰력이 뛰어난 예술가들과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이 이에 속한다. 나는 예수도 그런 사람들의 범주에 속했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사물과 사회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그 대상을 상세하게 기술하면 할수록 그 실체의 파악과는 점점 멀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몇 개의 상징만을 나열하는 것이 사물과 세상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왜냐면 달을 가르쳐주고 싶어도 손가락의 길이나 손톱의 때를 가지고 시비 거는 바보들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상징의 나열은 양자역학의 확률이론과 같은 것이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학생의 특징을 몇 마디의 문장으로 생활기록부에 기술하지만, 타인이 그것을 읽는다고 그 학생을 다시 구성해서 떠올릴 수는 없다. 생활기록부를 수십 장으로 써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자기소개서를 쓸 때조차, 쓰면 쓸수록 자기의 실체와는 상관없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사물의 비선형적 현상을 눈치챈 사람들은 선문답과 우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인상파 그림, 상징(symbol 또는 icon)으로 세상의 본질을 묘사했다.
석가모니의 일부 제자들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전통으로 비선형적 지혜를 계승해오고 있지만, 예수의 제자들 대부분은 예수의 깨달음을 계승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들은 예수가 말한 상징을 상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실체로 인식하고 매달리는(주술화하는) 바보짓을 했다. 예수가 상징을 상징으로만 봐야지 실체로 보고 따르면 안 된다고 귀가 따갑게 말했었는데도.
결국 그들은 서양문명을 천년 동안이나 어두운 몽매의 세상에 가둬놓고 인간의 의식과 생명까지 지배한다.
결국에는 막스 베버 같은 사람이 '근대는 탈주술화에서 시작한다'라고 소리쳤지만, 예수의 제자들이 만든 주술의 전통은 아직까지도 미국과 한국처럼 문명화된 사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고 성행하고 있다.
건축 얘기로 들어가 보자.
강의실 건물로 둘러싸인 네모란 마당에 잔디를 심고 강의실과 강의실을 연결하는 보행로를 만들라고 하면, 사람들은 각 강의실의 입구를 최단거리로 잇는 직선의 보행로를 만든다. 건물을 이런 식으로 만드는 것을 모더니즘 건축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잔디마당에 보행로를 만들지 않고 두면, 자연스럽게 이런 식의 직선의 길이 잔디밭 위에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학생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선형으로 잔디밭을 밟고 다녀 직선이 아닌 보행로가 생긴다. 그 형상은 담배연기 입자의 불규칙적인 운동 궤적(이를 브라운 운동이라고 한다)과 흡사하다.
예일대학교의 건축대학 학장이면서 뛰어난 건축가였던 폴 루돌프가 자기 학교의 건축대학 건물을 새로 설계했다. 그는 자기 학생들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창의력을 동원해서 건물을 완성시켰으며 이 작품은 지금도 건축교과서에 실리는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건물이 완공되고 1년이 지나자 학생들은 어디선가 합판을 구해와서 자기들의 욕구에 맞게 건물을 개조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 또한 비선형적이고 불규칙적이었다.
피터 블레이크는 이를 사례로 들어 '모더니즘은 왜 실패했나?'라는 책을 썼다.
그렇다면 애초에 잔디밭의 보행로와 건물은 어떻게 설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 자리에서 매우 긴 고찰을 다 서술할 수는 없지만, 결론적으로는 '모호'하고 '불규칙적'이며 '비선형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물론 공장, 종합병원 같은 예외가 있다. 무엇을 담는 그릇인가를 주시해야 한다. 모든 것은 다원적이고 다층적이다. 이 또한 양자역학의 핵심적 사상이다.)
진리는 하나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를 따를 때 가장 완성에 가까워진다.
기술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이런 '모호'하고 '불확실'한 인간의 행태를 가장 잘 반영한 전통건축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건축이다.
선형적 사고와 비선형적 사고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는 가방과 보자기를 들 수도 있다.
비로소 나는 무척 좋아했으면서도 '그게 왜 좋은 디자인인데?'라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어서 답답했던 톰 메인(Thom Mayne)과 쿱 힘멜브라우( Coop Himmelbrau)의 건축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시대를 풍미하던 해체주의 건축, 즉 다니엘 리베스킨트와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등의 건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부터 그들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뿐만 아니라 온갖 해체주의 이론서들을 읽었었지만,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정도로 문해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책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번역만 했었다고 확신한다)
해체주의 건축을 양자역학과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인문이론으로 해석한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1993년까지는.
한편 '설마 이런 것을 겨우 변방의 대학원생인 내가 처음으로 생각해 냈겠어?'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