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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Nov 25. 2023

야나할머니와 찰밥

우리 헐랭방구 고생 많았어

"할머이 나 내일 시험 보러 가. 모레 집에 올기여"


"고등핵교 시험 치러 간다고?"


"시험이 모레라 친구들이랑  여관서 자고 저녁 때나 "


"그라믄 느 성처럼 기차 타고 가나?"


"아뉘 나는 스 타고 택시 타고 가"




다음날 아침.

나는 연탄보일러에 붙어 있는 하늘색 온수통에서 뜨거운 물을 퍼다 머리도 감고 다른 날보다 꼼꼼히 정성 들여 씻었다. 오늘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같은 고등학교에 고입원서를 접수한 네 명의 친구들과 부담임선생님의 인솔하에 시외버스를 타고 나가 시내에 있는 여관방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문을 연 콩나물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은 뒤 택시를 타고 시험장으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엄마 왜?"


"이거 입고 시험 보러 가"


"오우  옷이네. 엄마 이걸 언제 샀대?"


"어제 영신상회서 사 왔지"


"누가 보면 사법고시 보러 가는 줄 알겠네"


엄마는 나의 농담에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흘기셨고 옷을 후딱 갈아입은 나의 옷매무새를 이리저리 만져 주시고 살펴보시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가셨다.




"언니야 아침"


동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부엌으로 나갔다.


"히야 이몽룡 과거시험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고봉밥을 줘?"


"이잉. 그냥 밥 아니고 찰밥이여. 찰밥 마이 묵고 철썩 붙고 온네이"


"찰밥 맛없는데. 찰밥 해줄 거면 차라리 약밥을 해주지"


나는 단맛이 나는 쌀밥과는 달리 특유한 쓴맛을 내는 찰밥을 한 숟가락 뜨며 꿍얼거렸지만 금세 고봉밥을 뚝딱 비웠다.




등굣길에 외박할 짐까지 챙겨야 했기에 빵빵하게 배부른 가방을 메고 할머니 방으로 갔다


"할머이 내 갔다 올게"


"야나. 시험 잘 치고 온나"


할머니가 내 손에 꼬깃꼬깃 접힌 오천 원을 쥐어 주셨다.




찹쌀~떡 아니고 합격~떡


둘째 아이의 수능날 아침.

혹시나 못 일어날까 싶어 알람을 세 개나 맞추고 잤는데 밤 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알람의 도움 없이 네시에 일어났다.

주방 유리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앞동에 불 켜진 가구가 보였고 '저 집도 수험생이 있나?'

생각하며 습관처럼 쌀통 쌀을 퍼서 씻다가 문득 나의 어린 시절 언니와 동생들도 시험 보러 가던 날 밥을 지어 수북히 퍼 주셨던 이 생각나 얼른 찹쌀을 보태 쌀을 안쳤고 가스불 위에서 뜸 들여지는 밥 냄새가 더 구수하게 느껴졌다.




수능 삼일 전 고열과 복통, 폭포수 같은 토로 응급실에 간 작은 아이는 다행히 독감도 코로나도 아니었지만 신생아 때부터 여태껏 키우던 중에 가장 좋지 않은 컨디션을 보여주었고 나는 별 득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이런저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며 근심 거미줄에 묶여 있었다.


아이는 시험 중간중간 몇 번 복통의 고비가 있었지만 다행히 중도포기 없이 시험을 치르고 왔고 아빠가 데리러 갔을 땐 무덤덤하게 있었다 두만 헐레벌떡 퇴근한 를 보자마자 대성통곡 기 시작했다. 아이가 우니 어느새 나도 따라 울고 있었고 수능날 시험장 교문 앞으로 마중을 갔던 나를 보고선 눈물을 흘리던 막냇동생 모습이 떠올라 '이것 또한 집안 내력인가?' 생각하며 아이의 진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 그치지 않는 아이의 울음을 기다리며 그 간 엄마의 밤샘 간호 수고도 모르게 건강하게 잘 자라준 것에 대한 고마움, 수능 직전 일터의 비상으로 아이 혼자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고 이런저런 검사를 하게 했던 일들이 떠올라 나는 또다시 눈물이 터졌다.




그렇게 노심초사했던 수능은 눈물 자국과 함께 지나갔다.

이른 새벽 곤히 잠든 부엌을 깨우고 찬물에 손을 넣어 우리 사 남매의 무사 시험 응시와 합격을 기도하며 밥을 지어 수북하게 퍼 주셨던 어른들의 정성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던 나의 뻔뻔함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는 경험을 하고서야 당연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아이를 향한 기도와 응원을 보내주신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 이웃들 지인들의 관심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동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 고마운 날이었다.

받은 사랑만큼 빚이 생긴 감사한 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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