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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Dec 24. 2023

야나할머니와 곤로

곤로 냄새의 추억

메리크리스마스~

한동안 덜덜 떨게 했던 추위 덕분에 집과 일터만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던 나였는데 며칠 포근한 날씨 덕분에 용기를 내어 아주 오랜만에 퇴근하는 남편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서쪽 하늘에 양탄자처럼 펼쳐 있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무리 지어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 떼들과 오늘도 똑같은 길로 비행기 똥을 누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며 열심히 걷고 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렀다.


"어디까지 왔나?"


"요기? 미현씨넨가? 그 아파트 앞"


"마이 왔네. 나도 OO역 앞에 얼추 왔어"


"응 그럼 매번 만나던 거기서 만나"




우왕 이쁘다

남편과 만나 차가 없는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니 추워서 걷지 못했던 그 사이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와 새해맞이로 아파트 단지마다 예쁘게 치장을 해 놓은 변화가 보였고 나는 "여기가 곧 명동이요 잠실이다."라고 외치며 그렇게 남의 아파트에서 사진도 찍고 기분을 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김치찌개 냄새가 흘러와 극한 허기가 쳐들어왔다. 나는 본디 아는 냄새가 더 무서운 법이라며 침을 흘렸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은 맛있게 끓던 냄새를 넘어서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새까만 숯덩이가 그려지는 그런 역한 냄새로 바뀌고 있음이었다.


"이 정도면 불나는 거 아닌가?"


"그르게 냄비는 무조건 사망각이네. 아 안타깝다. 뉘 집인진 몰라도 남의  일 같지 않네"


나는 어디선가 냄비 심폐소생술을 시도할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 입구 횡단보도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119 응급차가 우리 동네서 젤 큰 아파트 단지로 진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 뒤로 주황색 큰 트럭과 빨간 트럭까지 출동하고 있는 것이 보여 나는 눈이 커졌다.


"이 정도 출동이면 큰 사고 아니야?"


"나는 아까부터 계속 곤로 냄새가 는데 당신도 나?"


"곤로 냄새면 불난 거 아니야?"


"진짜 불이 났다면 119가 저리 조용히 가진 않겠지"


119 차량 부대를 보느라 발걸음을 멈춘 나의 손을 잡아끌며 남편이 말을 이었다.


"이봐이봐 또 또 눈 돌아가네. 그러는 거 아니야 얼른 걸어"


"내가 소방차 3종세트가 느~므 신기해서 그래. 근데 곤로 냄새는 계속 난다. 나 이 냄새랑 경운기 시동 거는 냄새 진짜 좋아하는데. 여보 근데 나 곤로 냄새 맡으니깐 생각난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인터넷에서 팔고 있는 중고 석유곤로


할머니는 부엌 구석에 올려져 있는 곤로 손잡이를 양쪽으로 왔다 갔다 움직여 심지가 올라오자 동그란 성냥갑에서 성냥 한 개를 꺼내 언제 봐도 신기하게 성냥이 부러지지 않게 한 번에 불을  곤로 심지에 갖다 대시곤  손잡이를 좌우로 움직여 심지들불이 붙자 그제야 물을 담은 냄비를 올려놓으셨다.


"야야 끓나 들이 다 보고 있으래이. 곤로 손잡이 들었다 놨다 하지 말고"


"알았어 할머이"


할머니가 부엌에서 문을 열고 나가시며 들여보낸 찬공기에 곤로 불이 휘리릭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고 그 때문인지 곤로가 뿜는 냄새가 코에 강렬하게 들어왔다. 

부엌으로 쳐들어온 윙윙 바람에 불춤을 추던 곤로는 금세 춤을 멈췄고 윙윙 바람은 버강지(아궁이) 안으로 숨어버렸고 나는 코를 벌렁거리며 곤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윙윙바람: 야나할머니 동네에 사는 바람 이름)


어른들은 항상 불조심을 강조하셨고 특히나 곤로가 넘어지면 클난다고, 기름을 넣을 땐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하셨는데 나는 곤로랑 일대일로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 가슴이 쿵쾅거렸다.

곤로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심지를 숨기고 있는 작은 구멍으로 주황색 불이 너풀거리다 파란색 불노란색도 내는 것이 신기해서 나는 더 자세히 보려고 손잡이를 올렸다 내렸는데 코로 들어오던 맘에 드는 냄새가 더 많이 나는 것을 알게 됐고 손대지 말라한 할머니의 당부를 잊고 계속해서 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것이 내가 잡이를 들 때마다 시커먼 연기 괴물들이 반짝이는 스댕 냄비 옆에 다닥다닥 찰싹찰싹 붙는 것이었고 나는 곁에 있던 젓가락을 하나 집어 냄비에다 삐쭉빼쭉 그림을 그렸더니 연기 괴물들이 달아나느라 부엌에 붕붕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이고 냄시야. 골 아프게 마한 것 그새 또 뚜깽을 들어 올맀구먼"


"아니야 할머이 나 안 그랬어"


"거짓뿔은. 정지에 이래 냄새가 꽉 찼는데"


"히 할머이 곤로 냄새가 너무 좋아서  열어봤어"


"언나가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골 아프게 곤로 냄시가 좋다니. 이런이런  저지레 해 논 것좀 보래이. 껌데이 빠지고 솥을 이래 까실궈놨네"


할머니는 냄비를 보시곤 혀를 차셨고 부엌 뒷문을 여신 뒤 냄비에 빠져 있는 연기 괴물들을 국자로 건져 올리셨다.




그날 저녁 나를 마주친 모든 식구들이 나에게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그리고 밥상에서도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한 마디씩 하더니 결국 국수에서도 그 맛이 난다고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국수를 한 술 뜨지도 못하고 엄마손에 끌려나가 등짝을 맞고 덜덜 떨며 찬물에 머리를 감고 씻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날 등짝을 맞았음에도 그다지 억울하지 않았던 것은 집에 쌀이 부족해 김치를 넣어 빨갛게 끓여 먹는 국수는 내가 좋아하지 않았기에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될 구실을 찾아서였고 엄마가 오직 나만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씻겨 주셨던 감격의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를 핑계 삼아 엄마도 국수를 드시지 않으셨는데 대신 달달하고 아삭한 야콘을 깎아주셨고 식사가 끝난 밥상 위엔 그릇에 꽉 차게 퉁퉁 불은 국수와 먹다 남긴 국수가 여럿 그릇 있었고 그 국수는 다음날 엄마소가 춥춥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지금껏 후회가 되는 것은 그때 한 끼라도 더 먹었더라 혹시 키가 아주 쪼꼼 더 크지 않았을까?이고 지금껏 여전히 궁금한 것은 왜 그 수많은 날들을 잔치국수나 칼국수 대신 김치국수를 끓이셨을까?이다. 내가 보기엔 다들 칼국수파인데...


오랜만에 맡은 곤로 냄새를 따라온 기억들을 얘기하다 보니 집 앞에 다다랐고 출동했던 소방차들도 복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편과 큰 사고는 아니었음에 다행이라 얘기하며 오늘의 결론은 나는 아직도 곤로 냄새가 좋고 김치가 빠진 빨간 국수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편식대장으로 살고 있고 남편이 늘 하는 말처럼 살고 있다.


"것 참, 참 말 안 들어"


김치국수가 생각나는 빨강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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