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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Jan 13. 2024

야나할머니와 껌

껌에 웃고 우는 이야기들

"엄마 나 무마켓 왔는데 뭐 사다 줄까?"


"아이스크림 사러 갔어?"


"아니 젤리 먹고 싶어서"


"우리 언니 스트레스 왕빵이구만 또 젤리를 찾으시는 걸 보니. 그럼 나는 껌 하나만 사다 줘"


"껌? 아빠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아빠 모르게 다 먹어버리지"


"무슨 껌으로 사다 줄까? 그냥 껌? 풍선껌?"


"풍선껌"


"히히 엄마 그럴 줄 알았어. 근데 무슨 맛? 복숭아, 딸기, 사과, 샤인머스캣 맛 종류도 많네"


"샤인머스킷 맛도 있어? 그거 좋아"


"오케이"


집에 온 작은 아이는 먹고 싶은 젤리 몇 봉다리와 껌 한 통을 식탁 위에 우르르 쏟아 놓았다.




"야나 끔 사무라"


할머니는 우리에게 동전을 쥐어 주시며 꼭 껌을 사 먹으라 말씀하셨다.

그때는 할머니가 진짜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껌이라는 것을 아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오래 먹을 수 있는 간식이기도 했고 할머니 당신은 틀니 때문에 드실 수 없으셔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짐작만 해 본다. 진짜로 그때 아카시아 껌이 나오면서 딱지 대신 향긋한 향과 이쁜 껌종이를 모으려고 얼마나 껌을 사다 날랐었는지 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껌종이는 아직도 앨범에 모셔져 있다.


"할머이 클났어 나 좀 봐봐"


"식전부터 또 뭐시가 클났나?"


"할머이 나 머리에 껌 붙었어"


"이런 마한. 우째다 이랬나?"


"어제 껌 물고 자가꼬"


"이런 잔뜩 들러붙어 띠지지도 않고 클났네"


할머니는 내게 묻지도 않으시고 손잡이에 꼬질꼬질한 천이 감긴 시커먼 가위로 내 머리카락을 쑹떵 자르셨다.


"아이 할머이 머리를 이케나 많이 짤르믄 우뜨케"


"뭘 우뜨케. 니 애미한테 들키서 매타작 하는 거 보단 낫지. 닌 머리가 꿉실거리 별로 티도 안나 괜자네"


엄마가 절대로 자기 전엔 껌은 씹지도 말고 벽에다가도 씹던 껌 붙여 놓지 말라 신신당부하셨던 것을 지키지 않았던 나는 결국 사고를 쳐 머리카락 한 구석이 쑹떵 잘려나갔고 다음날 훤해진 머리카락을 엄마한테 들켜 등짝을 한 대 맞은 뒤에야 보자기를 뒤집어쓰게 됐다. 엄마는 남겨진 머리카락 길이에 맞춰 가지런히 다듬어 주셨는데 나의 정체를 모르는 누군가 내 뒷모습만 본다면 성별을 헷갈릴 수 있을 정도의 머리스타일로 바뀌었다.




두 아이를 출산하고 나에게 남은 흔적은 충치였다.

이가 시큰거려 찾아간 치과에서는 위, 아래 전체 어금니 치료를 권했고 비용 발생에 부담을 느꼈던 나는 면적이 큰 이에는 금으로 그리고 약간의 보수가 필요한 치아엔 아말감으로 때워 넣었다.


또 시간이 지나 나이가 되니 주어지는 격년으로 하게 되는 건강검진과 일터의 건강검진이 꼬박꼬박 돌아왔고 그때마다 치과검진이 내 발목을 잡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아말감 치료는 건강하지 않고 금의 성분과 충돌해 오히려 치아에 무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산부인과 진료 다음으로 성가신 치과 치료는 썩 내키지 않아 미루고 있던 어느 날 구내식당에서 신나게 점심을 먹던 나는 지구개지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돌을 씹었고 어금니 한 구석이 떨어져 나가 결국 치과에 갔다.


"선생님 아말감 치료도 문제지만 그보다도 모든 치아에 크렉이 있는 건 아시죠?"


"네에..."


해마다 검진이 반복될수록 치과에서는 내 모든 치아에 미세하게 금이 가 있어서 언제 와르르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통보를 했었고 잔멸치 볶음에 어쩌다 들어간 작은 자갈은 나의 이가 깨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병원에 동행했던 남편은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이 나를 한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금으로 때운 개수보다 아말감으로 때운 어금니 개수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어마무시 발생한 비용도 비용이었지만 그간 남편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 깨갱하고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봐이봐 똥색시 또 오징어 씹고 있구먼. 그러다 진짜 이 다 망가진다."


"괜찮아 이 없음 잇몸으로 산댔어"


"또 껌 씹고 있네. 단물만 빠지면 뱉으라 그리 말해도 참 말 안 들어"


"이번 껌은 멀미 예방약이야"


나는 걱정하는 남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보조석에 앉아 껌풍선을 크게 불었다.  


"나중에 이 아프다고만 하지 마. 분명히 나는 말렸다."


"걱정을 하덜 마셔. 내 절대 안 그럴 테니"


하지만 호언장담하면 안 된다고, 나의 이 모든 치아가 이렇게 깨져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귀여운 껌종이

결국 나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아말감 조각들과 부식된 금붙이들을 떼어 내는 치아 치료를 했는데 임플란트 작업이 아니라는 것에 격하게 다행이라 느끼며 최대한 아끼고 써서 건강검진 말고 스케일링 말곤 되도록이면 치과엔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진심이다. 그래도 작년 치과 검진에서는 관리를 잘하고 계신다는 의사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는데 사실 의심스러운 것은 병원에 가는 환자는 동일한데 치과마다 내려지는 진단이 계속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 치과가 과잉진료인 것인가?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들여, 진짜 입이 찢어지는 경험까지 한 나는 입 안으로 거금을 투자한 덕분에 가끔 딸네미 찬스로 껌 좀 씹고 있다. 


요즘 껌은 디자인도 맛도 좋지만 껌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전달력도 좋아서 참 유용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샤인머스킷 맛 껌종이 눈동자들은 너무 귀여운데 풍선도 기가 막히게 크게 불린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흥얼거리고 있는 이노래. 몇십 년이 지나도 전달되고 있는 이 놀라운 홍보 효과에 놀라운 것인지 나의 기억력이 놀라운 것인지 나는 지금 왓따의 단물을 씹다가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이쁜가요 아가씨 그윽한 그 향기는 무언가요 아~아아아아아아~ 아카시아 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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