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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Jan 20. 2024

야나할머니와 감 이야기

너의 이름은? 짠감?

남쪽에서 온 감

가을 무렵 친구를 만나러 나간 둘째 아이의 손에 여태껏 내가 태어나서 본 감 중에 최고로 이쁘고 탐스런 감이 들려 있었다.


"아따매 무슨 감이 이케나 커?"


"엄마 이거 수인이네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감 이래"


"수인이 외가가 남쪽이라 하지 않았나? 김치도 맛있더니 감도 크고. 이렇게 큰 감이 달리려면 나무는 얼마나 클까? 그나저나 이거 어디 아까워서 먹겠나?"


"진짜 내 주먹보다 크네. 들고 오는데 집에 가까이 올수록 점점 무거워지더라고"




아까워서 먹을 수가 있으려나


"엄마 수인이가 준 감 언제 먹을 수 있어?"


"아! 맞다 감"


나는 말랑말랑 잘 익기를 바라는 맘을 너무 깊숙이 두어 감의 존재를 홀딱 잊어버렸고 한날 아이의 말에 베란다에 나가보니 이쁘게 익어 있었다.


"예쁘게 익었네. 진짜 아까워서 못 먹겠는데"


"엄마가 맨날 하는 말 있잖아. 아끼다 뭐 된다고. 그러니 오늘 저녁에 먹자"


그날 우리 가족은 빨갛게 익은 감을 나눠 먹으며 나중에 혹시나, 아주 혹시나 땅이 생긴다면 무조건! 꼭! 감나무를 심어야겠다는 큰(?) 계획을 세웠다.




"야나 내가 뭐 따왔는지 볼래?"


"할머이 산에서 또 뭐 땄는데?"


"여봐라. 내 감 따왔지"


"우와 할머이, 감을 어데서 이래 마이 땄대? 쪼맨한기 엄청 딴딴하네"


나는 할머니가 따오신 포대를 뒤적거리며 혹시나 말랑한 감이 없을까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보고 있었다.


"할머이 이거 지금 먹어도 돼?"


"아서, 안즉은 뜰버서 못 무. 침놔서 무야지"


"감한테 침을 논다고?"


"지달리고 있어보래이. 감이 을매나 맛있어지는지"


진짜 할머니 말대로 기다리고 있다 보니 색은 썩 이쁘진 않았지만 감의 식감은 괜찮았다. 문제는 감 특유의  단맛보다는 숙성된 짠맛이 입안에 너무 오래 여운을 남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맛을 내는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그 시절엔 그 작은 감도 악착같이 먹었다.

그리고 자라면서 알았다. 할머니가 침을 논다고 하신 것은 소금물에 염장을 해서 감의 떫은맛을 우려내는 작업이었다는 것을.




또 남쪽에서 올라온 감말랭이


전에도 이미 언급했던 적이 있었지만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과실수가 흥한 동네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희망고문같이 봄에 환하게 피는 꽃 대비 가을의 주렁주렁 열매는 초라했지만 그래도 그 몇 그루밖에 없는, 비록 벌레가 반 이상 더 먹고 난 열매였어도 친구들과 동생들과 나눠 먹는 재미와 인정이 묻어 있는 맛을 내주는 고마운 나무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실수들은 태풍에 쓰러지기도 하고 썩기도 하고 벌이 집을 짓기도 해서 우리들의 애간장을 애타게 했고, 해마다 붉은 꽃으로 가장 먼저 봄이 옴을 알려주던 우리 집 복숭아나무는 나무 옆에 묶어 놓은 독구와 누렁이가 발톱으로 긁고 물어뜯어 쓰러졌고 아빠 전용 연장 큰 톱 영감님을 만나고서 할머니 방 구들장을 데우곤 연기로 훨훨 사라졌다. 나는 사고의 범인인 독구와 누렁이에게 눈을 흘기고 쓸쓸히 남은 그루터기를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감사하게도 지금은 친정 동네에 당도를 자랑하는 복숭아 과수원도 생겼고 친정집에도 갖가지 종류의 과실수들이 철철마다 과실들을 내주고 있어서 참 좋긴 한데 희한 케도 동네엔 여전히 감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나의 그 헛헛한 마음 때문인지 나는 감 꽃이 떨어지고 손톱만 하지만 올록볼록한 곡선을 가지고 있는 파란 감이 달려 하루하루 커져서 주황색으로 변해 가는 과정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일 년 내내 가슴이 설레고 떨린다. 그러니 그 감을 먹는 일은 손에 꼽는 행복한 일 중의 하나이고 감나무 예찬론자로서 또 하나를 더 말한다면 감나무는 잎이 떨어지고 나서도 그 추운 겨울에도 자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여전히 꼭! 감나무를 심어 보고 싶다는 꿈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정시준비를 했던 작은 아이는 아직까지 끝나지도, 열리지도 않을 것 같은 대입의 문을 두드리고 있고 수능 이후 긴긴 시간을 준비하며 측은함과 짠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피로 때문인지 심리적인 이유인지 먹는 일에 먹는 둥 마는 둥 성의가 일도 없다.


"엄마 집에 과일 뭐 있어?"


"귤 다 먹고 사과 있는데 사과 줄까?"


"아니. 사과는 그다지 안 당겨. 엄마 우리 감 사다 먹을까? 지난번에 오빠가 사 왔던 감 맛있던데"


"그건 네가 얻어먹어서 맛있었던 거야"


다음날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에 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비싸다니. 나는 주저주저하다 큰맘 먹고 단감을 한 줄 사 왔고 아삭한 꿀맛에 감탄하는 가족들의 웃음을 보며 맛있으면 비싼 것도 용서가 된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 나는 곱디고운 주황색에 아삭거리는 식감에 단맛까지 가진 맛있는 감을 먹고 있는데 머릿속에선 어린 시절 소금물이 차 있던 차가운 항아리서 건져 올려, 짠 감인지 단 감인지 이름 붙일 수 없었던 그 맛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 있다. 그 이름도 애매한 할머니표 감 맛. 그 이름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짠감으로 정했다.


요즘 아주 가끔씩 그 시절 먹던 음식들을 먹을 때 나던 솔가지 향기, 왕겨 냄새, 화롯불 냄새, 가마솥 냄새가 유독 그리운 날이 있다. 할머니의 향수 같았던 파스냄새, 맨소래담 냄새도 그립다.

꼭 심어보고 싶은 감나무(시댁 동네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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