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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Jan 06. 2024

야나할머니와 메주

메주는 이름이 억울해

부모님의 콩은 메주로 변신한다

논보다는 밭이 많고 들보다는 산이 많은 나의 고향에서 부모님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셨다. 하지만 작년 도로 확장을 이유로 논은 길에 묻혀 논농사도 멈춰 모자리도 모내기도 벼베기의 풍경도 이젠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평생을 새 둥지 같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곳에서 살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결혼해서 50년이 넘도록 새 둥지 같은 집에서 살고 계신 부모님. 사 남매의 이가 빠질 때마다 헌 이를 던지던 그렇게도 높아 보이던 지붕은 어느새 너무도 낮아져 있고 그렇게 넓어 보이던 집이 좁게만 느껴지는 것은 내가 큰 것인지 부모님이 작아지고 계신 것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작년엔 뭐 때문이었는지 암만 기억을 떠올려도 도통 생각이 안 나고(주로 친정엄마가 시어머니의 김장날이 겹쳐 시댁으로 갔던 기억) 올해는 둘째의 수능과 수시 응시로 연 이은 김장 전투 패스권을 쓰게 된 나는 여유가 생겼을 즈음 김장김치 공수를 위해 친정행에 나섰다.


맛있게 변신할 메주

"엄마 벌써 메주를 띄운 거여?"


"벌써는. 진즉에 했어야 했는데 바빠서 늦었는걸"


"맨날 장은 퍼다 먹음서 한 번도 돕질 못하네"


"그딴 걱정하지 말고 아프지나 말어. 근데 니는 맨날 뭘 그래 사진을 찍나?"


"나? 사진으로 남겨 놓고 나중에 나도 해볼라고"


"똥을 쌉소사. 퍽도"


어릴 적 엄마는 내게 재주가 메주라고, 누굴 닮아(?) 저래 지랄 맞게 성질만 급하고 엉뚱맞기까지해 사흘이 멀다 하고 사고를 치던 내게 하시던 고정 멘트가 있었는데 "똥을 쌉소사" 였다. 오랜만에 엄마한테 그 멘트를 들으니 웃음이 났는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웃픈 또 하나는 남편에게 얻은 별명 그것은 "마이너스의 손"이었다.




어제부터 수돗가엔 우리집에서 젤로 큰 고무 다라서 노란 콩이 퉁퉁 불고 있다.


"할머이 모 할라고? 또 두부 해?"


 "뭔 두부는 미주 쑬라 그라지"


할머니는 퉁퉁 불은 콩을 조리로 살살 일어 소쿠리에 담는 작업이 끝나자 내게 가마솥에 붓는 작업을 부탁하셨무겁고 둔탁한 '크윽'소리를 내는 가마솥뚜껑을 닫고 솔가지에 불을 붙이셨다.


장작에 불이 붙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나는 버강지(아궁이) 안으로 솔방울을 던지며 폭탄 놀이도 하고 떨어진 콩을 장작 위에 올려놓고 나뭇가지로 돌돌 굴려 구워 먹었는데 퉁퉁 불은 콩은 암만 바싹 구워도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잘 끓고 있나? 인자 익은내가 나는데"


할머니는 가마솥뚜껑을 살짝 열고 알라딘의 요술 램프서 펑하고 튀어나오는 지니 같은 커다랗고 하얀 김이 빠져나가는 것은 피한 뒤 스댕 국자로 맨 위에 있는 콩을 한 줌 떠서 손가락으로 눌러보시고 씹어도 보셨다.


 "마치맞게 잘 익었네. 콩도 빨개진기 그만 끓이도 되겠다. 야야 거짝에 냅둔 방티 들고 온네이"


나는 자루가 담긴 다라를 할머니 앞으로 들고가 자루  입구를 최대한 벌려 붙들고 있었고 할머니는 나물을 데칠 때 쓰는 구멍 작은 손잡이 바가지로 콩을 북북 퍼서 자루에 담으셨다.


"마루에 장판이랑 틀 깔아놨나?"


할머니는 메주콩 밟을 때 쓰는 장판 위로 뜨거운 메주콩이 담긴 자루를 툭하고 던지시곤 그 위에 비닐을 깔아 주시고 구석구석 콩이 잘 깨지게 밟으라 하셨는데 뜨겁고 불룩한 자루 위에서 스르르 자꾸만 미끄러져 나는 연신 발바닥 미끄럼을 탔다.


"할머이 나도 언니처럼 이거 해보고 싶어"


"도 해보고 숩나?그라믄 해야지"


동생이  자루 위로 올라갔는데 발바닥이 뜨겁다며 폴짝거렸고 앙증맞은 작은 발은 자루에 작은 발바닥 모양을 남겼는데 나는 그 모양이 너무 귀여웠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서로 자루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지켜주자는 긴급 동맹을 지키느라 발은 멈춘 채 웃기만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늬들이 콩을 밟아 내년엔 장맛이 더 좋겄다."


할머니가 들락거리는 틀니를 혀로 맞추며 웃으셨다.




할머니는 우리가 밟은 반쯤 뽀사진 콩을 네모난 메주틀에 넣고 벽돌 같이 찍어 내셨는데 우리는 또 서로 하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고 겉은 따뜻하고 속은 놀랄 만큼 뜨거웠던 메주 벽돌들이 한 개 한 개 늘어나 식어가고 있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메주의 존재를 다시 보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할머이 진짜 클났어. 메주가 다 썩었어"


"미주가 다 썩었다고?"


"어 할머이 곰팡이가 머리카락처럼 났어"


"곰바우가 났다고? 어디 보재이"


병균이라도 옮을까 멀찌감치 떨어져 걱정의 눈빛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나를 보며


"곰바우가 이삐게 피 장맛이 좋겄."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말씀만 하셨다.




"엄마 내년에 장 담글 때 나한테 미리 알려주면  와서 거들을게"


"이제 장 담그는 것도 배워볼라고?"


"아뉘 또 사진 찍을라고"


나의 농에 엄마가 눈을 흘기셨다.




나는 메주가 가끔 억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란 말은 나의 여고시절 친구들이 서로 놀리던 최고의 단어였는데 옥상이 없는 동네에 살았던 나는 역시 도시 애들은 욕도 남다르다 생각했었다.


나는 나의 재주가 메주인 것도 안다.

이것은 자기 비하성 멘트가 아니라 지나치게 손이 빠르고 손재주가 좋은 언니와 동생과 비교가 되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살면서 납득이 됐던 이유도 나는 호기심 대비 겁이 많고 포기가 쉬웠다. 그러니 항상 의욕은 넘치나 끈질기게 덤벼 본 기회가 적었고 어린 동생도 뜨게 바늘을 들고 한 코 한 코 늘려가며 목도리를 뜨던 겨울날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규칙들에 몸서리를 치다 때려치우고 즉시 결과가 보이는 눈집을 짓거나 도랑에 가서 물고기를 잡거나 처마밑 고드름 해체 전투로 시간을 보냈으니 솜씨는 늘리가 없었다. 남편이 마이너스의 손이라 칭한 것도 굳이 공대 오빠 출근한 사이 기다리지 못하고 의욕만 앞서 작동이 안 되는 아이의 장난감을 이해도 않고 사진도 찍지 않고 나사와 조립을 죄다 풀어버렸고 다시 조립을 했을  나사가 남는 사태가 발생, 결국 그 장난감은 요단강을 건넜고 아이는 원망의 눈빛으로 나를 보며 울던 사건들은 아직도 어제일처럼 생생하기만하다.




재주가 메주라는 말을 들으며 컸고 또 살고 있지만 맛 좋은 간장과 된장으로 짜잔 하고 변신하는 메주처럼 나는 내 모습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여기며 앞으로도 살아가고 싶다. 때론 나와 비교를 굳이 원하는 누군가가 뽐내는 솜씨에 시기와 질투로 눈이, 속이 헤까닥 뒤집힐 때도 있었지만  모습조차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애쓰지 말고 그저 나의 깜냥만큼만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여전히 내 삶 구석구석에 참 많은 추억들을 남겨 놓으신 할머니. 그리고 나이가 드는 손녀는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메모리의 한계로 추억들과 나의 일상들을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작년 치매 판정을 받으신 작은아빠는 이젠 가족들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또 다시 충격에 빠졌다.


이런저런 생각에 날이 밝는다...

한 알의 노란 콩알에서 깊은 장 맛을 내기까지 긴 시간을 보낸 메주처럼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속이 탄탄하게 살아가는 2024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담은 새해 소망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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