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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Mar 30. 2024

야나할머니와 멸치

할머니 방엔 미르치

"야나 막걸리 한 빙 받아 온네이"


할머니가 주섬주섬 허리춤에 차고 계시던 전대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시며 말씀하셨다.


"할머이 막걸리가 그래 맛있어?"


"맛있다말고"


국민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나는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받아 올 밥이 안되어 언니 뒤만 졸졸 따라만 다녔는데 어엿하게 밥이 찼을 무렵 막걸리는 병모양을 한 튼튼한 비닐 주머니에 담겨 판매되었고, 막걸리 심부름이 싫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막걸리병을 이용해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항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머이 막걸리 어다 둘까?"


"거 샘에 담궈 논나"


나는 막걸리병이 넘어지지 않게 다라 위에 빨랫방망이를 눕히고 그 옆에 살포시 세워 두었다.




"할머이 저녁 드시래요"


안방 마루에서 할머니 방까지 들리게 힘껏 부르자


"니들끼리 묵으래이. 내는 지녁 안 묵는다."


종종 그날그날의 사연에 따라 저녁 식사를 거르시는 날이 있었기에 나는 밥을 먹고 쪼르르 할머니 방으로 갔다.


"할머이 왜 저녁을 안 먹어? 어디 아퍼?"


"아프긴. 낮에 전노리(새참) 묵은  배가 안즉 안 꺼져 그라지"


"이따 배고프믄 우뜨케?"


"우뜨 커긴. 낮에 네가 받아논 막걸리 무믄되지"


"그건 그냥 물인데 배가 부르겠어?"


"이거 무믄 되지"


할머니가 앉은뱅이책상 밑에서 효자손을 이용해 끄집어 내신 것은 사탕통이었다.


"거 뭐 들었는데?"


"뭐 들긴 맛난기 들었지"


할머니가 뚜껑을 열자 생선 비린내가 확 뿜어져 나왔고 그 안에는 은빛 비늘이 꽤 많이 벗겨진 시커먼 멸치가 들어 있었다.


"니 미르치 무 볼래?"


"아니. 안 물래. 멸치가 맛이 없게 생겼어"


할머니가 꺼낸 멸치는 엄청 큰 리에 엄청 큰 눈도 달고 있고 몸을 베베 뒤틀고 있는 데다 튀어나온 뼈도 보여 더 맛이 없어 보였는데 할머니는 에 있던 고추장 통도 내려 멸치 머리에 푹 묻히더니 입에 넣고 우물거리셨다.


"무 보래니. 이게 을매나 맛있다고"




은빛 멸치 너무 좋아~

설날에 들어온 멸치를 냉동실에 넣어 두고 삼 년 근을 만들 것 같아 부스럭 거리며 손질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냄새를 맡은 앙꼬가 주변에서 킁킁거리며 탐색을 시작했고, 나는 식탁 위로 뛰어 오른 녀석에게 식탁 위는 안된다고 속사포 잔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식탁 구석에서 왔다 갔다 하며 나의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근데 너는 못 먹어"


멸치를 한 마리 집어 우적우적 씹어 먹으니 앙꼬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못줘. 언니한테 혼나"


나는 가끔 앙꼬에게 상엔 이런 것도 있다 하고 냄새를 맡게 해 주는데 작은 아이는 질색을 한다. 고양이한테 뭐가 안 좋고 뭐가 위험하고 뭐가 치명적이고. 하지만 이 집이 세상의 전부인 앙꼬에게 나는 냄새로라도 뭔가 알려 주고 싶기도 하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기분이 허전한 것도 아니었는데 한 마리 한 마리 집어 먹기 시작한 것이 다듬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눈치챈 건 채워지지 않는 멸치통을 보고서였다.

멸치를 손질할 때마다 떠오르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막걸리 딱 한 잔에 고추장을 찍은 멸치를 드시던 할머니 모습. 그리고 이제야 그 맛을 알아버린 손녀딸.

막걸리 한 잔, 멸치 몇 마리로 들에서의 고단함과 허기를 위로하셨던 할머니의 삶을 회상하며 타임머신이 있다면  지금 이 멸치를 할머니방 사탕통에 담아놓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에 멸치는 어찌나 짜고 비린내가 그리도 심했었는지...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막걸리를 주문했는데 대문 사진이 그날의 증표이다. 식당 냉장고 안에 막걸리 종류는 어찌 그리 많은 것인지, 세상은 넓고 마실 막걸리도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할머니처럼 막걸리가 먹고 싶었던 것인지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노란 그릇에 환상이 있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주당하곤 거리가 먼 나에게는 막걸리도 쓰다. 이것이 24년의 3월을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의 맛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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