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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Mar 23. 2024

야나할머니와 물동이

반갑다 고무다라야

나의 출퇴근길엔 지하철역이 하나 있는데 그 옆엔 포장마차 2칸이 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뜨끈한 어묵 국물이, 비가 좍좍 쏟아지는 날엔 뜨겁고 바삭한 튀김이, 배가 고픈 퇴근길엔 둘둘 말은 김밥에 우동 생각나고, 가끔 특별하진 않지만 넓적한 철판에 부친 계란 토스트가 간절한 날도 있었다.

우리 동네 포장마차

이 포장마차  앞으로 다닌 지 꽤나 긴 시간이 흘렀고 나의 기억 속 이미지는 늘 한결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포장마차 주변에 빨간 고무다라 통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리 시골 동네선 주로 물을 받아두는 물통이거나 땅에 묻어 동치미를 담아 두기도 했고 야채나 곡식을 보관하기도 했었는데 암만 궁금해도 남의 기물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고 더더군다나 저 것이 물통이라면 더 오해를 사기에도 충분한 상황이라 나는 호기심을 꾹 눌러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나는 보았다. 저 뚜껑 달린 빨간 고무다라통의 용도를.

역 앞에 물탱크를 실은 차가 와서 호수를 대고 물을 공급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 포장마차 사장님이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앗싸 물통 맞았어'


나는 퀴즈 맞힌 사람처럼 흐뭇해하며 트럭 사장님께 조심히 말을 건넸다.


"사장님 제가 이 광경이 너무 반가워서 그런데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사장님은


"네 그러세요"


시원하게 허락해 주셨고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함께 길을 걷던 직장 동료가 웃고 있었다.


반가운 물통 고무다라




"야야 물통에 물이 다. 니 내하고 물 길러 갈래?"


"할머이 또 물 뜨러 갈라고?"


"오이야 해 지믄 미끄러우니 해 떠 있을 때 후딱 길어다 놓재이"


시골마을의 최대 단점은 겨울이 되면 단수가 되어 생활에 제약이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식수원으로 쓰는 철철 바위의 물탱크에서 땅속의 수도관을 타고 집집마다 공급되는 관이 추위에 얼어 버리면 어떤 집에서도 시원한 수돗물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수도꼭지를 덥혀주는 전선을 감기도 하고 담요로 싸 놓기도 했지만 수도는 꽁꽁 얼어버렸고 아무리 뜨거운 물을 부어도 만성기관지염이셨던 할아버지의 가래 끓던 소리를 닮은 답답한 소리만 나고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집은 비상상황이 되었다.

대식구에 소와 동물들까지 물을 마셔야 했기에 틈나는 대로 옆집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왔지만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상당한 힘과 인내심이 있어야 했으며 어른들이 우물 안에 두레박 빠트리지 마라, 고개가 빠지도록 우물 안을 들여다보지 마라 하도 신신당부하셔서 물을 긷는 일은 늘 긴장되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눈이 와 마당도 미끄러운 데다 우리들의 발자국 때문에 양쪽집 마당이 진탕이 될 것을 걱정하셨는지  나와 둘이서만 물을 긷자 하셨는데 나는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일도 양동이를 들고 높은 대문간을 넘는 일도 너무 대근했다.




할머니가 옆집 할머니와 잠깐 얘기를 하시는 사이 나는 우물벽을 꼭 잡고 용기를 내어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보았다.

깊은 우물 벽을 채우고 있던 물이 한 칸 한 칸 줄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보았다.

어둡고 깊은 우물 바닥에 검은색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며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을.


"할머이 우리가 저 우물을 다 퍼서 쓰면 옆집이 화 안 낼까?"


"우물은 자꾸 퍼내야 더 좋은 물이 고이"


"근데 할머이 어떻게 우물 안에 물고기가 살어?"


"물속이니 물괴기가 살지"


"아니 가가 서 뭘 먹고 사냐고"


"우물 안에 이끼도 뜯어 묵고 몽개도 주서 묵고 그래 살지. 밍수물괴기를 잡아다 는나보다"


나는 물고기가 뻐끔뻐끔 먹었다 뱉었다 하고 똥도 쌌을 물을 여태껏 맛있게 먹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퇴근길 보게 된 깊은 빨간 다라에 물 채워지는 일.

어린 날 낑낑거리며 양동이를 수없이 들어 나르던 날들. 내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지고 팔에 기운이 빠져 물은 반도 넘게 쏟고 털신도 젖고, 마당 진탕됐다고 타박도 들었었지만 내가 물을 열심히 길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찰방찰방 물이 찬 다라를 뿌듯하게 들여다보면 내 웃는 얼굴이 비치고 발로 툭하고 걷어차면 가느다란 작은 파도 위로 쪼글쪼글 울렁울렁하게 보이는 내 얼굴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노을과 봄 햇살이 만난 기분 좋은 퇴근길에 만난 오래전 정겨운 모습.

긴장감을 품고 깊게 떨어지던 두레박 소리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 보이던 우물 안 바닥의 시커먼 물고기 모습도 떠올랐다. 그리고 바쁘고 배고픈 이들이 잠시 쉬어가는 포장마차가 반갑고 새롭게 보이는 날이기도 했다. 


새로움. 이것은 누가 주는 맘이 아닌 내가 발견하는 것이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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