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바라기 Mar 16. 2024

야나할머니의 쌈 꾼 손녀딸

부디 건강히, 행복하기를

"야 너네 그거 아나? 서울에 가면 망태할아버지라는 사람이 애들을 막 잡아간대. 접때 우리 고모가 와서 그랬는데  울고 말 안 듣는 애들만 망태기에 담아서 데리고 간대"


뜯지 않은 생라면 한봉다리를 들고 와 유난스런 소리를 내며 팔꿈치로 라면을 부수더니 수프를 탈탈 털어 넣고 혼자서 씹어 먹고 있던 경숙이가 우리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땅따먹기에만 집중하고 있자 망태할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돼지 같은 간나 오늘도 또 지 혼자만 먹는 거 봐'


나는 눈으로는 땅따먹기를 하는 목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귀로는 경숙이가 흔드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라면 봉다리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서울에 사는 고모가 사 왔다며 처음 보는 과자 한봉다리 들고 와 온 동네 아이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한입도 주지 않고 자랑질만 하던 경숙이 간나였는데 며칠 사이에 사람이 변할 리도 없겠다만 여전히 바작바작 생라면 씹는 소리를 들려주더니 라면 봉다리 바닥에 모여 있던 수프를 검지 손가락으로 쪽쪽 찍어 먹곤 매운지 슙슙 소리를 내며 결국 혼자서 알뜰하게 다 먹은 것을 보여주었고 나는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망태할아버진가 하는 그 사람이 애들을 왜 델꼬 가는데?"


"그야 내가 할아버지도 아닌데 모르지"


"니네 고모가 그딴 건 안 갈차 주드나? 그럼 모르면서 왜 떠드는데?"


"내가 내 입 갖고 떠드는데 네가 나한테 뭐 보태줬나?"


"보태준 건 없지만 뭘 말할 때는 이유를 꼭 알고 와서 떠들라고. 대나 가나 막 떠들지 말고"


"니는 매번 나를 못 잡아먹어 지랄이드라"


"인제 알았나? 내 지랄 맞은 거? 손에 때나 좀 씻고 쭉쭉 빨던가 드러워서 못 봐주겠네"


"남이사 손이 더럽든 말든. 그리고 너는 내가 언닌데 왜 계속 말을 싸가지 없게 하는데?"


"내한테 언니 대접받을 짓을 한기 있나? 아마도 없을걸. 없으믄 입 다물고"


나는 경숙이하고 말싸움을 하다 목지가 원 밖으로 굴러나가는 바람에 따 놓았던 땅 마저 도루묵이 되었고 가뜩이나 열받아 있다가 더 약이 올랐다.


"니 지금 내가 라면  줘서 삐진 거제?"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덜컥했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 이름도 못쓰는 바보가 주는 라면은 안 먹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숙이는 쪼그려 앉아 있던 나에게 득달같이 달려와 머리채를 잡았고 나도 경숙이의 풀어헤친 긴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악 너 이거 안 놔"


"니가 먼저 잡았잖아. 니가 먼저 놔"


"니가 먼저 나한테 바보라고 했잖아"


"그럼 바보한테 바보라고 한기 뭐 잘못됐나?"


경숙이가 내 머리를 더 세게 뒤로 젖히며 잡아당겼고 고개를 움직일 수 없게 된 나는 얼떨결에 왼손 주먹으로 경숙이의 가슴을 쳤는데 경숙이가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며 물러 나더니 또 달려들어 왼손으로 내 눈두덩이를 긁었고 순간 엄청난 뜨거움이 느껴졌다.


"너 두고 봐 우리 오빠한테 일러줄 거야"


경숙이가 엉엉 울면서 집으로 갔고 내 얼굴을 바라본 정아가 말했다.


"야 니 눈에 피나는데"


피가 나거나 울면 진 거라고 했는데 우이쒸 오늘은 둘다 진 것인가...




"할머이 나 밥 안 먹고 잘 거니깐 깨우지 마"


"이잉, 즈녁 묵고 자야지 와 벌써부터 잘라고? 니 애미한테 또 맞을 짓 했제?"


"맞을 짓은 무슨. 맞을 짓은 경숙이가 했지"


"그래도 가가 느보다 승인데 갱수기가 무나? 승이라 불르야지"


"승은 무슨. 봐봐 그 간나가 잡아 뜯어서 나 여기 피났자네. 을매나 쓰라룹다고"


"저런 저런. 눈 여피를 마이도 뜯깄네. 흉 지면 우쨀라고. 이리 와본나"


할머니는 상처 난 곳에 정체불명, 효능 검증 불명의 만능 연고를 발라 주셨다.




"야야 니 가겟빵에 가서 막걸리 한 빙 받아 온네이"


"아 경숙이네 안가"


"야나. 가서 막걸리 한 빙 사고 백원은 니 꽈자 사무래이"


나는 주저주저하다 할머니가 건넨 천 원을 받아 들었다.


"가서 승한테 호비킨 눈두대이 비키 주고 니도 미안타 하고"


천 원을 들은 나는 갈등하기 시작했고 혹시나 우리 동네서 젤 못생기고 뚱뚱한 경숙이네 두 오빠가 나를 윽박지를까 봐 겁도 났다.


"야요"


가겟방을 들어서며 손님이 왔음을 알리자 미닫이 안방문을 열고 경숙이 아줌마가 나오시길래 긴장되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주까?"


"할머이가 막걸리 한 병 받아 오래요"


아줌마는 부엌 다라에 담가논 막걸리 한 병을 꺼내 주셨고 안방 미닫이문 뒤에서 경숙이가 나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척 했다.


"OO이 우째다가 그 이쁜 얼굴에 상처가 났나?"


막걸리를 주시던 아줌마가 내 눈가 상처를 보고 물으셔서 나는 당황했다.


"아 이거요. 고녜이가 호비 써요"


"야 그 고녜이 갖다 비리라. 멀쩡한 아 얼굴을 비리 놨네"


나는 얼른 가겟방을 빠져나왔다.




봄에 가장 일찍 할머니를 만나던 돌나물

집으로 돌아오니 할머니는 돌나물을 다듬고 계시고 나는 막걸리를 수돗가 다라에 담가 놓았다.


"갱수기하고 풀고 왔나?"


"아니"


"니가 먼저 미안타 하고 오지"


"오늘은 아줌마가 가게를 보고 있어. 자 할머이 남은 돈. 나 꽈자 안 사무쓰"


나는 거스름돈 삼백 원을 할머니 조끼 주머니에 쨍그랑 넣어 드렸다.




며칠 뒤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겟방 앞 도랑에 빨래를 하러 갔고 다리 위에서 경숙이 언니가 혼자 왔다 갔다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 저래 알짱거리는기 니한테 할 말이 있나 보다. 얼른 가서 승한테 미안타 해"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리 위로 갔다.


"언니 뭐 해?"


언니라는 호칭에 경숙이 눈빛이 흔들렸다.


"나? 나 그냥"


"언니 접때는 내가 미안했어"


근데 갑자기 경숙이 언니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고 나는 급 당황했다. 진짜 도랑에서 할머니가 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누가 보면 내가 울린 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언니 왜 울어? 어디 아파?"


"아픈 건 접때 네가 때린 젖꼭지였고 지금은 네가 나한테 언니라고 해 줘서"


그리고는 후다닥 가겟방으로 뛰어가버렸다.


"왜 저래"




다음날 학교에 가는데 누가 뒤에서 헐떡대며 뛰어 오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경숙이 언니였다.


"야 같이 가자"


"오늘은 왜 버스 안 타고?"


"오늘은 걸어가 보려고. 너 이거 먹을래?"


언니가 준 것은 풍선껌 한 개였다.


"니 호비킨덴 괜찮나?"


"응 딱재이 앉았으니 금방 나을 거야"


나는 풍선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대답했고 경숙이 언니는 웃고 있었다.




"할머이 그거 알어? 오늘 아침에 경숙이, 아니 경숙이 언니가 나한테 껌을 주드라"


"가가 니한테 끔을 줬다고? 갱수기 사람 됐네"


할머니 얘기를 듣고 안 것은 경숙이 언니는 절대, 절대로 남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지 않으며 지금 뭔 병 같은 게 와서 노상 울기만 하고 학교에도 가지 않았는데 그날 나랑 걸어서 학교에 가서 가겟방 아줌마가 하루 종일 가게에 들른 사람들한테 경숙이가 학교 갔다고 자랑을 하셨다고 했다.




같은 국민학교에 다닐 땐 몰랐는데 중학생이 된 경숙이 언니는 그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고 진짜 벙어리처럼 지냈다. 가겟방에 가도 돈만 받고 눈도 마주치지 않아서 우리는 미쳤거나 귀신이 씌었거나 사춘기가 오래도 간다고 수군거렸는데 여전히 글씨를 읽고 쓰지 못한다 소문만 돌았고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언니네가 이사를 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고 긴가민가하게 여길 즈음 그 여섯 식구는 우리가 학교에 간 사이에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경숙이 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더위속에 장례를 치르느라 온 동네 사람들이 고생을 했었는데 발인식까지도 언니는 오지 않았고 언니네 고모가 경숙가 미쳐서 병원에 있다고 쉬쉬하며 동창에게 얘기한 것이 온 동네 소문이 돌았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시골마을에서 극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언니를 잡아 삼킨 건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 의욕도 없고 학습 능률도 있을 리 없고 언니는 그냥 긴 머리 휘날리며 우리 주변에서 맴도는 것이 유일한 바깥바람 쐬는 일이었나중에 만화를 통해 알게 상상 속 망태 할아버지는 엄아빠 말씀 듣고 착하게 크라는 교훈을 주긴 했지만 진짜로 아이들의 인신매매가 뉴스로 알려지면 아주 뻥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 언니네 할머니와 언니네 아빠까지 돌아가시자 언니네 가족들은 더 이상 동네에 오지 않았고 가끔씩 큰오빠가 벌초를 하고 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큰오빠도 그 누구와도 왕래를 하지 않고 산소만 정리하고 돌아갔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왼쪽 눈두덩이에 남아있는 흉터 자국을 본다.

이건 단순한 흉터 자국이 아니라 맘에 남아 있는 상처의 흉터, 부끄러움의 상처기도 하다.

굳이 먹는 것을 나눠 먹지 못하는 언니를 건드려 난 상처. 잘 안 씻고 학습 능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돈 계산은 기가 막히게 하고,  긴 머리 휘날리며 우리 주변을 맴돌던 볼 빨간 경숙이 언니였는데 그 외로운 언니를 더 외롭게 한 것이 골목대장인 나였구나 라는 생각을 크면서 내내 했다.


요즘 나는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마음 깊숙이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엄청나게 끄집어 올리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 내 속마음. 그 일이 상처였는지 아니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나의 희망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꽤나 많은 후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제 경숙이 언니 소식은 알 수 없지만 중년 여성이 된 언니가 어디선가 즐겁고 당당하게 살고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경숙이 언니 행복하게 잘 살아


쌈꾼이었던 나의 뒤늦은 인사가 언니에게

전해지기를...


대문사진 출처  : 네이버 위키백과 엔칸토 미라벨

작가의 이전글 야나할머니네 구들장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