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달빛 아래 비치는 백합의 모습이 밤의 요정들이 찾아와 나팔을 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고, 바람이 불 때마다 함께 실려 오는 그윽한 백합 향. 이 향기는 진짜 어떤 향수로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좋은 향이다.
아버지가 태어나시고, 내가 나고 자란 그 흙집 마당 가운데 있던 작은 꽃밭은 여름이 노크하는 계절이 되면 하얀 백합 밭이 생겼다.
내 기억의 시작은 조각조각 깨진 슬레이트 지붕을 세로로 세운, 마당 가운데 차지한 작은 꽃밭이 있었고 다른 꽃들 대비 키가 큰 몇 그루의 백합이 있었다. 하지만 내 키가 자라는 것 같이 한 해 한 해 시간이 흐를수록 봄을 맞은 화단엔 막냇동생의 까까머리 같은 뾰족뾰족 어린순들이 올라와 하루가 다르게 쭉쭉 자라 처음엔 콩 꼬투리 같은 가는 꽃송이가 달리다가 꾹 한번 눌러보고 싶게 유혹하는 통통해진 꽃송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펑펑 소리를 내는 것 같은 향기 대포를 쏘아댔는데 학교 다녀오는 길, 이미 바깥마당을 넘어 신작로까지 진한 백합 향기가 나를 친절히 마중 나와 반겨 주었다.
"야야 니 그거 아나? 이 백힙을 방에 느고 문 꼭 쳐 닫고 자믄 사람이 죽는데이. 그라니 백힙은 절대 방에 꼽아두지 말고 눈으로만 보래이"
"에이 할머이도 참. 냄새가 이래 좋은데 우뜨케 사람이 죽어"
"이잉 내 말이 참말이래도. 거 그라고 저 백힙은 절대 맨지지 말고 눈으로만 보래이. 꽃개루 만지고 눈 비비믄 눈 까진다잖나. 저 연당에 뉘 집 아가 잘못 만져가꼬 눈 빙신 됐다 자네"
나는 할머니 말을 퍼뜩 다 믿진 못했지만, 너무도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에 덜컥 겁이 나서 백합꽃 군락에서 멀찌감치 물러났다.
"엄마 꼬, 꼬"
"응 꽃이지? 이건 백합꽃이야 백합꽃"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친정 마당 화단에 가득 핀, 제 키보다도 더 높은 곳에 피어 있는 백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꽃이라고 좋아했다.
"꽃 예쁘지? 그런데 이 꽃은 이놈~하는 꽃이라 만지면 안 돼. 꽃은 눈으로만 보는 거야"
혹시나 아이가 호기심에 꽃술을 만질까 염려되어 나도 할머니처럼 말하고 있었다.
2024년 6월의 붉은 백합
작은 손가락으로 꽃을 가리키던 아장아장 아기는 덩치 좋은 전역 청년이 되었고, 구멍 난 문풍지가 매력 포인트였던, 삐딱한 방문을 달고 있던 흙집은 네모반듯한 벽돌집으로 변했다. 그리고 깨진 슬레이트 조각으로 아슬아슬한 꽃밭 울타리를 하고 있던 앙증맞은 꽃밭은 사라지고, 담장석으로 쌓아 올린 긴 담 밑엔 담벼락 길이만 한 긴 화단이 생겼는데 그 화단에는 봄이 되면 튤립과 수선화와 히아신스가, 뻐꾸기 울고 앵두와 보리수가 빨갛게 익어가는 계절엔 하얗고 붉은빛을 띠는 백합이 뜨거운 여름이 왔다며 꽃 나팔 향기로 알려주고 있다.
할머니를 따라 들로 산으로 다니던 그 시절엔 백합처럼 유혹적인 향은 없지만 맛있는 나물을 내어주고 예쁜 꽃을 보여주었던 원추리꽃도 있었다. 그리고 산에 오르고 오르다 지겨울 즈음이 되면 보물찾기하 듯 만난 산나리꽃도 있었는데 꽃들을 꺾으며 할머니 발자국을 따라가던, 흘러내린 칡덩굴과 할미밀망이 발목을 잡아당겨 철퍼덕 엎어졌던 오솔길의 추억도 아련히 지나간다.
백합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백합처럼 널리 널리 뿜는 고운 향은 내지 못하더라도, 묵묵히 그자리를 지키는 원추리꽃처럼, 산나리꽃처럼 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결같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곁에서 식후 커피를 드시던 친정아부지가
예전에 다방에 "커피 끼리는 여자가 있었다."는 말씀에 식구들이 배꼽을 잡고 백합 향기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참 좋은 행복한 여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