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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Apr 07. 2024

야나할머니와 햇님나물

조심해야 하는 두 마리의 개


동네에 "대박집" 이란 현수막을 걸고 부식류와 과일을 파는 집이 있다.


 '어 민들레네'


하지만 선뜻 장바구니에 담지 못하고 주저하는 나를 본 가게 점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그거 한 봉지에 이천 원인데 자 기분이다 지금부터 십 분간만 두 봉지에 삼천 원"


봉투에 꽉 차게 담겨 있어도 데치면 부피가 공갈이 되어버리는 나물류라 얼마 큼을 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딱 맞춰 세일을 해 주시기에 냉큼  봉다리를 집었다.

 

"역시 어머니 현명한 선택. 자 딸기도 싸게 드릴게 떨이로 가져가셔"


틈새를 주지 않고 추가 영업을 하는 아저씨의 말이 훅 거슬린 건 바로 그때였다. 어머니라니. 딱 봐도 나보다도 한참 연장자일 거 같은데. 오늘 화장실에 갈 때마다 느낀, 이마 라인을 타고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흰머리 때문인가?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대박집을 몇 바퀴나 뱅뱅 돌아 담은 것은 요즘 버섯류 음식에 꽂혀 계신 작은 아이용 새송이 버섯과 팽이버섯, 기숙사에서 한 주를 보내고 집으로 귀가하는 큰 아이용 시금치와 깻잎순, 남편을 위한 알배기 배추, 나를 위한 민들레, 빈정 상한 딸기는 과감히 외면하고 대박집을 나섰다.




올봄 첫 민들레 나물을 사서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오던 길 아파트 상가 계단에서 노란 민들레와 제비꽃을 보았다.


"옴마나 기서 겨울을 난 거야? 이구 기특해라"


 민들레 나물이 담겨 있던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혼잣말을 하며 노란 민들레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지나가시던 할아버지가 티가 나게 떨어져 걸으시며 묘한 표정으로 가셨는데, 봄바람에 산발된 내 머리카락까지 보태져 정신줄 놓은 아지매로 오해할만하셨다.^^


공갈되기 전 민들레


수많은 봄나물들이 있지만 민들레는 마트에서 어쩌다 만날 수 있어서 만나면 눈이 번쩍 뜨이고 진짜 반갑다. 입에 쓴 것이 몸에도 좋다는 어른들의 세뇌(?) 때문인지 가끔 몸이 쓴 맛을 원하는데, 역시나 집으로 함께 온 민들레는 후적 후적 나의 손놀림이 늘어날 때마다  냄비 속에서 진짜 공갈이 뭔지 보여주며 부피가 쭉쭉 줄어들었다.




기다리던 아이까지 귀가를 하고 일주일 만에 네 식구가 함께한 저녁. 조리 과정을 모르는 유일한 1인인 큰 아이에게 무슨 나물 같냐고 물으니 진지하게 맛을 음미했고, 쌉쌀한 맛으로 시작해 씀바귀로 갔다가 바로 민들레로 맞췄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작은 아이가


"오빠 정말 맛있지? 이거 엄마가 저기 놀이터 화단에서 뜯어 온 거야"


"에이 뻥, 엄마 진짜예요?"


"응. 아파트 화단에 엄청나게 이 나 있더라고"


모녀의 장난 공세에 우적우적 맛있게 저녁을 먹던 큰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오물거리던 입이 멈췄고, 이럴 때 끝까지 포커페이스하며 버텼어야 했는데 특히나 가족들을 속이는 데는 재능이 맹맹이 콧구멍 맨치도 없는 나는 흔들리는 눈빛과 씰룩거리며 삐져나온 웃음 때문에 금방 들통이 났다.




다음 날 집에 들른 여동생에게 큰 아이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했더니 동생은 끝내 맛을 알아내지 못하고 실험관찰하 듯 나물 그릇만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성질 급한 내가 힌트로 강아지똥이라 해 주니 그제야 민들레임을 알곤


"맞네 민들레. 어떻게 이 맛이 생각이 안 났지? 할머이가  챙겨 드셔서 우리도 봄만 되면 엄청 먹었잖아. 학교 다녀와서 작은 칼 들고 할머이 따라다니다가 저녁에 숙제 안 하고 싸돌아다녔다고 엄마한테 맞고"


"그 나물 뜯던 거랑 혼나던 거랑 기억하나?"


"그럼 기억하지. 그때 언니가 우는 나 대신 왼손으로 숙제해 줬잖아. ! 그리고 할머이 무쳐줄 때마다 보약나물이라고 하던 햇님나물 기억나? 나는 햇님나물이 너무 먹고 싶은데 시장엔 없더라"


"나도 나도. 나 햇님나물 진짜 좋아했는데. 나는 벚꽃보다 햇님나물이  이쁘더라. 아쉬운 건 이제 우리가 집에 어쩌다 가니 지천에 나물이 돋아도 뜯는 시기 놓치니 황이고, 할머이처럼 나물 구분하는 눈이  없으니  황이고"


"그래도 언닌 식물이름 많이 알잖아"


"알긴 알지. 근데 옻나무는 아직도 구분 못해. 형부 따라 벌초하러 가면 아무 나무나 막 만지고 톱 들이대서 형부가 기함하잖아. 내가 웃픈 얘기 하나 해줄까? 예전에 시댁 어른들이랑 형부랑 구병산에 송이를 따러 갔었는데 송이 근처뱀이 꼭 있다는 말에 쫄아서 송이는 안 찾고 뱀만 찾은 거야. 근데 

나보다 낮은데 서 계시던 우리 집안 온화의 끝판왕이신 청주 고모님이 나더러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 있으라 고함을 치셔서 오줌 쌀 뻔했잖아. 살살 비키라고 하셔서 움직이고 보니 내 발 밑에 송이가 네 개나 있드라. 그래서 내 덕이라고 두 송이 나눠 주신걸 지금껏  때마다 말씀 하심"


"아이고야 둔하기도 어떻게 송이랑 뱀도 구분을 못해. 뱀은 밟으면 꿈틀 할거 아녀. 그래서 어디 귀촌하겠어?"


"그니께. 이 따러가서 뱀만 찾으니 절대 안 보이는 거지. 재주가 없어도 느므 없어. 그냥 도시사람으로 살아야 할까?"


"엄마 송이도 밟고 뱀도  무서우면서 무슨 시골을 간다고 그래. 시골 갈 생각하지 말고 그냥 도시에서 살아 제발!"


우리 부부의 귀촌을 결사 반대하는 둘째 앞에서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아차 싶었다.




식욕 돋구는 연둣빛, 너무너무 반갑게 만난 흰민들레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파란 촉이 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연하고 작은 잎들이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출근길 만나는 나무 나무마다 죄다 햇님나물로 보이고 산나물로 보인다. 내가 토끼도 아니고 염소도 아닌데 파란 이파리에 끌리는 이유는 뭘까?


얀들얀들 돋아난 연한 잎들을 보면 특별한 조미료도 없이 풀물이  시커먼 손으로 후딱후딱 무쳐 주시던 할머니의 입맛 돋우던 나물들이 생각난다.

우리 집에 오기까지 품고 있던 겨울이야기, 산이야기, 이야기 등 제각기 품고 있던 사연에 따라 달고 쓰고 향긋하게 느껴지던 수많은 맛들.

그 시절 어린 입맛에도 그렇게 맛있었는데 지금 먹는다면 얼마나 맛있을까?

긴 키를 자랑해서 쑴벙쑴벙 썰어서 먹던 흰 민들레와 매꼬로미 윤기가 좔좔 흐르던 햇님나물을 떠올리니 금세 입에 침이 한가득 고인다. 참기름 냄새 풀풀 풍기던 햇님나물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는데. 에휴, 아쉬운 대로 사탕이라도 한 개 물어야겠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송이 따러 갔던 일을 떠올리며 늘 하는 생각이 있다. 내 생각의 틀에 갇히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눈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교양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말씀하셨다며 해 준 큰 아이의 얘기도 오랜 여운을 남긴다.


"엄마 사람은 두 마리의 개만 조심하면 되는데 그게 뭔지 아세요? 편견과 선입견이래요"




그런데 봄이 될 때마다 궁금한 게 있다. 왜 노란 민들레는 흔한데 점점 흰 민들레는 보이지 않는 걸까? 내가 많이 먹어서?


햇님나물 : 화살나무 순을 무친 나물(인슐린 분비를 촉진시켜 혈당을 낮추는데 도움을 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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