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잉 죽긴. 머우꽃이 을매나 맛이 좋은데. 니 이따가 티기 노면 무 봐라. 더 달라고나 하지 말고"
산골의 봄은 이른 것 같지만 더디다.
분명 달력은 매일매일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데 뉴스에서 말하는 기온과는 제법 차이가 있고, 장독대 위에도 빛바랜 아스팔트 위에도 아롱아롱 거리는 아지랑이가 많아진 것을 보면 분명 봄이 온 것 같지만 코를 찡하게 하는 추위는 아니어도 몸을 웅크리게 하는 소소리바람이 느껴지는 것이 봄이 완전 온 것 같지 않다.
나물인지 풀인지 구분도 되지 않던 작은 머위 잎이 크고 꽃까지 폈는데 가시가 더덕더덕 박힌 두릅도 개두릅도 더디게만 올라오고, 며칠 더 기다렸다가 따야지 하고 뜸을 들이는 순간 갑자기 훌쩍 커버려 수확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할머니는 매일매일을 독수리 눈으로 두릅나무들을 감시하셨고, 그 결과 올해도 어김없이 장터와우리들의 밥상에여러 요리법으로올라왔다.
2024년 4월의 머위꽃
머위꽃은 덜 핀 계란꽃(개망초) 모음 같이 생겼다.
쌉쌀한 맛이 나는 머위는 맛도 없는 데다 꽃도 별로 예쁘지 않아서 지천에 널려 있는 머위가 나는 그다지 맘에 들진 않았다.
"할머이 맛있는 나물도 많은데 씨구워 맛도 없는 야만 먹어?"
"맛이 없긴. 니 그거 아나? 봄에 머우 나물하고 머우 꽃을 무야 올 일 년 안 아프고 잘 지나간대이. 곰도 겨울잠 자고 산에서 내리 오믄 젤 먼저 뜯어 먹는기 머우 나물이잖나"
할머니가 봄마다 우리에게 머위 나물을 먹이실 때마다 들려주시던 이야기. 나는 많고 많은 나물 중에 하필이면 이렇게 쓴맛이 나고 맛이 없는 머위나물을 곰이 젤 먼저 뜯어먹었는지가 내내 의문이었고, 계속 우리에게 머위 나물을 먹이려는 할머니의 거짓부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나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면 곰의 입맛도 뭐 썩 훌륭한 것 같지 않다 생각했었다.
"야야 거 장독간에 올리논 머우꽃 물 다 삤음 갖고 온네이"
양재기에 밀가루를 풀어 젓고 계신 할머니가 부르신다.
부엌에가니 고구마튀김을 할 때 제일 많이 쓰는 까만 칠이 거의 다 벗겨진 깊은 프라이팬에 노란 기름이 담겨 있고뽀글뽀글 기름 방울이 앞다투어 한 개씩 올라오고 있다.
할머니는 기름 위로 손바닥을 슬쩍 갖다 대 보시더니 "됐다" 하시며 밀가루를 풀어놓은 양재기에다 맨손으로 머위꽃을 한 개씩 넣어 휘적휘적 옷을 입힌 다음 프라이팬 안으로 넣으셨는데순간 풍덩 빠진 못생긴 머위꽃이 엄청 맛있는 소리와 냄새를 풍기며 노릇노릇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할머이 안즉 다 안 됐어? 나 한 번 먹어볼래"
"니죽는다고 안문다 안 했나?"
할머니가 웃길 때마다 하는 동작.손등으로 콧볼을 훔치며 말씀하셨다.
"지달리. 아직 지름이 뜨구와 주대이 딩께"
그날 저녁 밥상엔 머위꽃 튀김과 두릅 튀김이올라왔고이 두릅 튀김은 지금까지도 봄이 되면 친정엄마가 해 주시는 고정음식이 되었다. 두릅도 기본 쌉쌀한 맛이 있어서 어렸던 우리들과 손주들에게 봄을 먹이고 싶으셨던 할머니와 엄마가 튀김 요리로 우리들의 입에 넣어주셨던 덕분에 나도 매해 봄 아이들에게 튀김을 해서 먹이고올해도 맛을 보았다.
24년 4월의 두릅나물
해마다 돌아오는 봄.
해마다 찾아오는 머위와 두릅.
해마다 먹는 나물들.
그게 너무도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심각한지구온난화.
계절을 잊고 철 없이 피는 개나리와 철쭉을 만나고, 계절감 없이 국경도 없이 번지수 틀리게 쏟아붓는 폭우와 폭염, 멸종되는 동, 식물들, 끝나지 않는 곳곳의 전쟁들...
두릅나물을 데치며 언제까지 이 봄을 맛볼 수 있을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살만한 세상일지를 걱정하다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지금껏 누리고 온 이 자연의 선물 보따리가 텅텅 비어버리고 닫혀 버릴까 두렵기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분리수거, 일회용품 덜 쓰기, 걸어 다니기를 좀 더 신경 써야지 다짐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시간이 흘러 단단한 두릅 머리가 먹기 좋게 데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