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와 사건 파일 1

(저희 장독대 아니에요. 동네 찻집 사진입니다. ^^)

by 별바라기

국그릇에 꾸역꾸역 만 밥을 잠이 덜 깬 채 먹고 있던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야야 오늘 비가 온대제?"


"늦게 소나기 한줄기 한다 하니 어머이 산에 가시거든 일찍 내려와요. 아니믄 가지 말고"


"금방 올 비는 아인 거 같으니 일찌감치 댕기 오지 뭐"


아빠의 대답에 할머니가 중얼거리 듯 말씀하셨다.


"할머이 근데 비가 올라는지 우뜨케 알아?"


"우뜨케 알긴 아니깐 알지"


"아 알았다. 할머이 또 무릎고베이 아프구나?"


"그래 니가 용하다"


"그리 아프믄서 산엔 왜 자꾸 간대요. 그냥 집에 있지"


나의 말에 웃으시던 할머니는 아빠의 말엔 아무 말씀 없으신 체 밥만 드셨다.


"다들 우산 챙기고, 이따 비가 안 오거든 고추장 단지 뚜껑 열어놔"


반공일인 오늘, 학교를 가려고 가방을 메는 나에게 엄마가 당부하셨다. 그리고 다행히 수업이 끝났을 때도 비는 오지 않았고, 나는 우산을 양산 삼아 어깨에 걸치고 빙글빙글 돌리며 3킬로미터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의 지령(?)대로 고추장 단지 뚜껑을 열어 놓았다.


작년 겨울 눈이 많이 왔다며 엄마가 보내주셨던 사진

지금의 장독 유리뚜껑은 옆면 통풍구멍까지 달린 효율적인 뚜껑이지만 어린 시절 내가 빗자루로 눈을 쓸다 날려버린 장독 뚜껑 속에 숨어 있던 덮개는 광목으로 된 천이었다. 그 천은 쫀쫀하고 힘이 센 굵은 고무줄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었는데 나는 그 고무줄을 늘여 덮개를 닫는 일이 정말 고역이었다. 이쪽을 잡아당겨서 늘려 이쪽을 잠그려 하면 '팅'하고 튕겨지고, 또 힘을 내서 시도를 해 보아도 고무줄은 자꾸만 튕겨져 나갔다. 손끝에 있는 힘을 모두 모아 간신히 고무줄을 승복시키면 삐딱하게 덜 덮인 광목천 때문에 고무줄에게 항복을 하고 다시 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무진장 더웠던 여름날 고추장 단지 뚜껑을 열어 놓지 않았던 탓에 고추장이 찐빵 반죽처럼 부풀어 올라 용암처럼 흘러넘쳤던 최초 목격자이며 신고자였던 나는 엄마가 흘러넘친 고추장 때문에 죄지은 사람처럼 어쩔줄 몰라하며 주변 정리를 하느라 고생하셨던 광경까지 기억하고 있었기에 학교를 가면서도, 수업을 하면서도, 집에 오면서도 계속 맘속으로 '고추장 단지, 고추장 단지'를 외웠고, 집에 오자마자 뚜껑을 조심조심 열어 옆에 있는 장독 위에 거꾸로 얹어 두고 홀가분한 맘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앞 도랑에 물장구를 치러 갔다.


고르게 펼쳐져 있는 돌들이 물에 잠긴 모습(치악산에서)

앞 도랑 풀장 개장의 계절이 돌아오면 나를 즐겁게 해 주던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우선 바닥에 울퉁불퉁 박혀있는 돌들을 꺼내 차곡차곡 쌓아 댐을 쌓고 주변을 살펴서 지난해 농사 짓고 버려져 있던 비닐을 주워와 돌무더기 사이사이를 막고, 비닐이 모자라다 싶으면 도랑 주변에 있는 쑥 무더기를 뽑아다 돌 사이를 막고 기다리다 보면 물이 차 올라 깊고 널따란 풀장이 생겼는데 나는 키 큰 쑥을 뽑아오면서 맨 윗부분에 있는 연한 쑥잎을 챙겨 윗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긴 시간 잠수를 할 때 똘똘 말아 귀마개로 썼다.


눈을 뜨고 바라보는 물속 세상은 정말 다른 세계였다. 커다랗게 보이는 내 손도 신기하고 물을 뚫고 들어와 바닥에 부딪히는 햇살은 더없이 멋졌다. 방향을 잘못 잡은 물고기가 내 몸에 와서 부딪히기도 하고 가끔 욕심쟁이 녀석들은 내 귀마개가 탐나는지 쑥잎을 물기도 했다. 잠수부가 된 나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씩씩하게 헤엄쳐가는 물방개도 따라가 보고, 떼 지어 놀고 있는 버들치 동네를 방문하면 나의 인기척에 놀라 우왕좌왕하는 녀석들을 손만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은데 절대 잡히진 않았다. 그리고 더 잠잠히 개울 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호색을 띤 모래무지와 미꾸라지가 바닥에 납작 붙어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 내가 손으로 톡 하고 건드리면 술래를 하기 싫었는지 잽싸게 숨어 버렸다. 그렇게 해저탐험 하 듯 풀장을 빙빙 돌다 보면 유난히 찬물이 솟아나는 곳이 느껴지는데 전신에 돋아난 닭살을 참으며 풀숲 밑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면 반짝이는 등을 가진 붕어 새끼 떼가 그 까맣고 작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쑥으로 막은 먹먹한 귀로 뭔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통수와 등에 투둑 투둑 하고 떨어지는 뜨뜻한 빗방울을 느껴 물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샤워기를 튼 것처럼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빗방울이 어찌나 굵은지 머리와 얼굴에 떨어지는데 따갑게 느껴졌다. 지나가는 비인지, 계속해서 내릴 비인지 알 순 없지만 앞이 보이지 않게 시끄럽게 내리는 비에 우선 동생들을 다리 밑에서 피하라 하고 나는 뜨뜻한 비를 맞으며 물놀이를 계속 했다. 열어둔 고추장 단지는 까마득히 잊은 채.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도랑과 다리 밑에 한기가 밀려왔다.


"언니야 추워 집에 가자"


입술이 파래져 덜덜 떨고 있는 동생이 집에 가자고 재촉을 하고 이 정도 빗줄기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막내를 업고 집으로 향했는데 도랑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거짓말처럼 날이 개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경운기도 없고 할머니 방문도 닫혀 있는 걸 보니 어른들도 어디선가 비를 피하고 계시거나 아니면 그곳엔 소나기가 내리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면서 나는 수돗가에서 동생들의 머리를 감기고 씻겨주었다. 도랑물 보다 차가운 수돗물이 닿을 때마다 동생들은 비명과 기합 소리를 내며 움찔움찔했고 그럴수록 나는 더 잽싸게 물을 뿌린 뒤 바들바들 떠는 동생들을 수건으로 닦이고 홑이불로 꽁꽁 싸매 주었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가 되었으니 씻어보자' 하다가 그제야 뚜껑 열린 고추장 단지를 보았다.


"어떡해"


나는 내가 가진 힘으론 전혀 감당이 되지 않는 이 어마 무시한 사건 앞에 손과 발이 덜덜 떨렸다. 거꾸로 얹어 두었던 장독 뚜껑에 눈에 보일 만큼의 비가 고인걸 보니 장독으로 들어간 비의 양도 적지 않을 것 같고, 이미 입으로 새어 나오는 울음과 낮에 내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눈물에 앞이 보이지 않아 팔뚝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바가지를 넣어 보았으나 바가지는 고추장만 묻고 도움도 되지 않아 얼른 부엌으로 가서 국자를 들고 나와 고추장 단지 안에 물을 조심조심 퍼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덮여 있던 광목천이 장독 깊은 곳까지 빗물 침투를 막아 주고는 있었으나 맘이 급해서인지 기술이 없어서인지 물은 금세 퍼내 지지 않았다.


고추씨를 따뜻한 아랫목에 모셔서 촉을 틔우고, 포트를 하고, 비닐하우스에서 이불도 덮어주며 키를 키운 뒤 심고, 따고, 건조하고, 세척하고, 다듬고, 방앗간까지 다녀와서 팔이 떨어져라 휘저어야 고추장이 되는 힘든 여정을 훤히 아는 나였기에 고추장이 얼마나 귀한 장인지, 얼마 큼의 노력이 들어가야 항아리에 담기는지를 알기에 이 상황이 너무도 참담하고 암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엄마를 힘들게 했던 용암 사건까지 떠오르고 '오늘 밤 또 매타작을 하겠구나' 생각하니 더 서러워져 콧물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어쩐지 오늘 물장구도 소나기 놀이도 여느 날과 다르게 그렇게나 재미있다 했더니만 결과는 너무 슬펐다.


"이 마한 단지 뚜껑을 안 닫았구나?"


언제 오셨는지도 모를 할머니 목소리에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소스라치게 놀라자 할머니는 눈물과 땀, 콧물까지 비 오듯 흘리고 있는 나를 보시곤


"비켜 보래이"


그리고 능숙하게 물을 퍼내기 시작하셨다.


물기를 다 제거한 고추장 단지. 장독대 주변에 떨어진 고추장의 흔적과 떨어진 나의 눈물 흔적까지 없애준 세숫대야의 활약 덕분에 장독대는 새 단장을 하여 깨끗해졌고, 소나기를 밀어내고 돌아온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은 장독대도 고추장 단지도 광목천도 금세 빠짝 말려 주었다.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할머니도 살림을 하셨던 아낙네였고 긴 시간 장독대와 항아리를 지켜온 여인이었다는 것을. 할머니의 굳은살 가득한, 나물을 하도 다듬어 손톱 끝이 새까맣게 물든 그 작은 손으로 6남매를 낳고 기르고 살림을 하시며 농삿일에 산을 타시던 솜씨 좋은 여인이었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란 이름에 다 묻어두고 있었다.


"니는 뭘 하다 단지 뚜껑 닫는 것도 이자버렸노?"


"도랑"


"물괴기만 혼이 나간 게 아니고 니도 혼이 나가게 놀았구먼"


할머니가 니가 노느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근데 할머이는 비 안 맞았어?"


"안 맞긴. 피하다 왔지. 하늘을 가매이 보니 한차례 딸굴라 하길래 후딱 내려왔지. 동네 들어서니 후둑후둑하길래 한씨 할마이네서 미싯갈 한 잔 읃어 먹고 왔지"


"근데 다리는 안 아파?"


"그래 이 마한 것아, 정신없이 돌아치느라 아픈 것도 이자뿟네, 느 애미가 봤음 어쩔 뻔했어. 니 암마또 마라"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듯 미간에 주름이 더 깊어지게 인상을 쓰셨지만 금새 입가엔 팔자 주름이 더 깊게 파이도록 나를 보며 웃으셨다.


방에 들어가 보니 홑이불에 똘똘 말아 놓은 두 동생은 이불을 감은채 그대로 잠이 들어있었고 나는 동생들을 제대로 눕혀 주었다.


"야나 누가 이거 물래?"


할머니 목소리에 마당으로 나가니 배낭 안에 으름이 한 무더기 담겨 있었다.


"우와 할머이 으름 마이 땄네"


"마이 땄나?"


할머니가 약간의 흐뭇한 웃음으로 물으셨다.


"또 술 담글라고?"


"니들 먹고 남으믄 담궈보고"


"아녀 할머이 술 담궈, 이거 약이 자네"


나는 솔직히 으름이 아주 맛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할머니한테 술을 담그라 위하는 척 대답했다.


"약 먹던 느 할애비가 음써서 이제 약 안 해도 된대이"


괜스레 할머니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매일 소주잔으로 으름주를 한 잔씩 드셨던 것을 기억한다.


"할아부지 술 때문에 아픈데 왜 또 술을 먹어?"


"이거 술 아니고 약이여 약"


"어디에 좋은데?"


"허리 안 아프고 오줌 잘 누는 약이지"


하지만 허리가 아파 매일 새우같이 잔뜩 웅크리고 주무셨던 할아버지는 몸을 뒤척이실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셔서 나는 으름주의 약효가 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요강을 비울 땐 엄청 무겁기도 해서 한편으론 으름주가 진짜 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어린 나의 힘이 부쳐서였을까? 진짜 효능이 있었던 것일까? 이 대답도 영영 알 수 없는 물음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 같다.


해가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밭에 가셨던 부모님이 돌아오셨고, 어둠 덕분에 장독대 고추장 단지는 낮의 비밀을 숨기고 침묵하고 있었다. 장독대 쪽을 쳐다보며 슬금슬금 엄마 눈치를 살피는 나를 보신 할머니는 '암마또 마라'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하셨고, 나는 회초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얌전히 있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이 들었다.

물놀이에 비까지 맞고 긴 긴 낮잠을 잔 동생들 덕분에 나의 고추장 단지에 물 먹인 대형사고는 할머니의 손길로 아주 은밀하게 묻혔고, 여태껏 할머니와 나만이 아는 비밀로 간직되어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봉인 해제되었다. 이제 엄마가 알게 되시는 일도 시간문제인 건가? ^^

아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 나는 지금도 해마다 그 항아리에 담기는 고추장을 얻어다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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