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와 수박서리

by 별바라기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동네엔 멜론과 수박 농사 붐이 일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그 농사에 참여하지 않아 나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 멜론이란 과일이 너무 먹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친구는 오늘도 길가에 원두막 흉내를 내다만, 간신히 뜨거운 해만 피할 수 있는 판자 지붕 아래서 멜론을 팔고 있다. 나는 덤프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흔들리는 나름의 원두막이 마치 아기돼지 삼 형제에 나오는, 나뭇가지로 지은 둘째 돼지네 집 같다 생각했지만 열심히 원두막을 지으신 아저씨의 수고를 지켜봤었기에 나름의 원두막 품평은 하지 않았다.


희한하게 멜론은 친구보다도 내가 더 잘 팔았다.

나는 우리 집 과일이 아니니 꼭 팔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고, 친구네 아버지가 농사지으신 결과물이니 나름의 부심도 있어서 신이 나게 멜론 홍보를 했고, 관광지로 여행을 가던 사람들도 이런 촌에서 과일이 난다는 것이 신기한 듯 기웃거리며, 어린아이들이 장사를 하는 것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깎아달라는 말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수박보다 비싼 멜론은 생각보다 팔리지 않았고, 한 시간 동안 지나가는 자동차 수를 돌멩이를 쌓으며 암만 기다려 보아도 돌멩이는 늘지 않았다. 언제 올지도 모를 유령 같은 손님을 기다리다 지칠 무렵 여름날의 더위와 당분을 견디지 못한 멜론 한통이 '쩍' 하는 소리와 갈라졌고, 드디어 멜론 맛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걸 포착한 나는


"이건 하늘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야, 똥파리가 꼬여 알을 낳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해"


지긋지긋하게 하루 종일 우릴 괴롭히는 파리를 핑계 삼은 공포의 멘트로 멜론 사장을 설득했고, 드디어 먹어본, 태어나 첨 맛본 멜론의 맛은 뜨뜻하고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한씨네 밭에는 수박이 통통 익어가고 있었다. 조그만 수박 모가 심기고 꽃이 피고, 매일 아침 등굣길 같은 자리에 있는 수박을 감시하 듯 바라보며 학교에 다녔던 나는 주먹만 했던 수박이 군모만큼, 바가지만큼 축구공처럼 커져 가는 것을 보면서 얼른 속까지 시원해지는 수박이 먹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수박에 손대면 큰일 난다고 늘 밥상교육을 빙자한 밥상 협박을 하셨기 때문에 그저 수박밭에 수박이 얼른 팔리기만 바랐다. 혹시나 남겨진 한통을 주울까 싶어서.


뜨뜻한 멜론의 굵은 씨를 대충 털어 앞니로 속살을 긁어먹던 우리는 심한 갈증이 밀려왔고


"시원한 거 먹고 싶다."


나는 무임금으로 본인 곁을 지키고 있는 친구를 위해서 멜론 사장이 물이라도 떠다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했는데 엉뚱하게도 날아온 멜론 사장의 대답은


"야 우리 저 앞 밭에 있는 한씨네 수박 서리할래?"였다.


매일매일 아침 등굣길마다 커가는 수박을 보며 환상을 키워온 데다 생전 첨 먹어본 멜론의 당도에 목이 타는 갈증에 있던 나는 멜론 사장의 꼬드김에 홀딱 넘어갔지만 밥상 협박이 떠올라 추춤하며 말했다.


"그럼 서리하러 니가 가"


"야 나는 손님 오면 어떡해 니가 가"


멜론 사장의 얘길 듣고 보니 내가 가는 게 여러모로 나을 거 같기도 했다.


"우린 이제 공범이야.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멜론 사장과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주변을 살핀 뒤 한씨네 밭둑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2022.6.25. 그간 샀던 수박 중 제일 큰 수박

밭둑에 엎드려 어떤 놈을 따야 하나 고민하며 이랑을 살피니 화상 입지 말라고 신문지로 수박을 덮어둔 탓에 판단이 쉽지 않았다. 수박밭 위로 지글지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서 심장 떨림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뜨거운 햇살에 정수리와 등은 따갑고 무엇보다 배와 가슴, 팔뚝과 무릎을 찌르는 돌멩이가 아팠다. 나는 밭 깊숙이 기어들어갔다가 수박모를 다치게 하거나 도망 나올 시간이 부족한 것보단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따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박의 신문지를 들추고 두들겨보니 '통통' 맑은 소리가 들려 무조건 익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꼭지를 땄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무거운 수박을 들고선 기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수박밭에 오래 머물 수도 없어서 수박을 안고 냅다 도랑으로 뛰어내렸다.


갑작스러운 나의 출연에 도랑 풀숲에서 쉬던 개구리들이 놀라 사방으로 뛰었고, 덩달아 놀란 나도 거미네 집을 얼굴로 끊어내며 수박을 놓치지 않으려 윗도리에 싸서 도랑을 달렸다. 자꾸 뛰는 개구리들에 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몰려왔지만 '먼저 해꼬지를 하지 않으면 뱀은 알아서 도망간다'는 할머니 말을 위안 삼아 무서움을 쫒으며 쐐기풀에 종아리를 쓸려가며 가까운 길을 두고 먼길을 돌아 나름의 원두막에 도착했다.


"야 니 왜 이리 오래 걸렸나?"


"들킬까 봐 도랑 타고 왔어."


"뱀 나오면 어쩔라고?"


" 무섭긴 하대. 근데 니는 쫌 팔았나?"


"아니 한 명 묻기만 하고 비싸다고 그냥 가드라"


"야 팔지도 못할 거면 니가 가지. 나는 미끄런 수박 들고 오느라 죽을 뻔했잖아 엄청 무거워"


"나는 뭐 안 팔고 싶어서 안 파냐? 근데 니 괜찮나? 다리서 피나는데"


쐐기풀이 나의 정강이와 종아리를 도화지 삼아 선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빨갛게 채색되고 있었다.


"심장 떨려서 아픈지도 몰랐어. 우이쒸 따가워"


"야 쑥이라도 뜯어서 피 좀 닦아봐. 그리고 누가 보기 전에 얼른 먹자"


목은 내가 더 타는 거 같은데 얄미운 멜론 사장이 수박을 빨리 먹자며 재촉을 했다.


우리는 부푼 가슴으로 나름의 원두막에서 조금 떨어진 콘크리트 다리 위에 깨끗한 바닥을 골라 수박을 '쿵'하고 떨어트렸다. 놀부가 커다란 안에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있기를 바라며 박을 탔던 마음처럼 우린 시뻘건 수박 속을 기대하며 톱 대신 패대기를 선택했고 수박은 '쩍' 소리가 아닌 '푹' 소리를 내며 금이 조금 나다 말았다.


"에? 이거 뭐대?"


갈라진 틈을 비집어 양손가락을 집어넣어 수박을 쪼갠 나는 빨강이 아닌 노랑의 수박 속을 확인했고

까만 씨가 아닌 흰 씨가 가득 차 있었다.


"야 안 익었잖아. 니 왜 안 익은걸 따왔나?"


"두들기니 통통 소리가 나길래 익은 줄 알았지. 그래도 맛은 있을지 모르니 먹어보자"


"퉤 퉤 퉤, 맛있긴 개뿔. 소도 안 먹겠다."


친구는 내게 덜 익은 수박을 따왔다며,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핀잔을 주기 시작했고, 나는 아직도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점점 더 따가운 종아리, 돌멩이에 긁힌 팔뚝, 몇 달 동안 수박과 함께 키워온 수박 맛에 대한 환상까지 와장창 깨져 맥이 빠졌고, 무엇보다 원두막에서 편히 앉아 있기만 했으면서 나를 타박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와버렸다.

어린날에 내가 기대했던 수박의 모습

집에 가니 할머니가 산에서 막 오셨는지 수돗가에서 씻고 계셨다.


"할머이 산에서 일찍 오싰네?"


"오냐 니 모하다 오노?"


"나?"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흠칫 당황하고 있었다.


"마한 것, 어서 뭘 하다 왔길래 종아리가 피칠갑이여? 어여 일로 와"


할머니는 바가지로 물을 떠 살살 내 다리를 씻겨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할미가 무스운 얘기 하나 해줄까?"


나는 할머니의 대답도 피하고 생각지도 않은 옛날 얘기도 듣는다니 웬 횡재냐 싶어 물었다.


"무스운게 뭔데?"


"옛날에 어떤 집에 니 같은 언나가 하나 있었대. 근데 동무 집에 놀러를 가니 동무 엄마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기라. 근데 가마이 보니 그 바늘이 너무 좋아 보여. 그래서 도방 구리에 꽂혀 있는 바늘 하나를 몰래 빼왔지. 동무도 모르고 동무 엄마도 모르고. 근데 야야 낭중에 우째 됐는지 아나? 가가 동무 집 오양간에 있던 소를 끌어다 팔았다 자네"


"에이 그놈이 나쁜 놈이네. 어떻게 남의 집 소를 끌어내 팔아"


"그라믄 바늘을 훔친 게 나쁘나? 소를 훔친 게 나쁘나?"


"그야 당연히 소를 훔친 게 나쁘지. 바늘이야 다시 사주면 되지만 소는 어떻게 사줘"


"그라믄 꼭지 떨어진 수박은 어떻게 돌리줄 끼나"


나는 그제야 할머니가 왜 얘길 꺼내셨는지 눈치챘다.


"할머이 혹시 나 수박 서리하는 거 봤어?"


"그래 봤다. 이 마한 것. 니가 슬금슬금 도둑고넁이 맨치로 한씨네 밭에 기가는 거"


완전범죄라 생각했던 수박서리가 목격자가 있다는 것에 놀랐고, 할머니 말고 또 다른 동네 사람이 봤을지도 모를 거란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근데 할머이 어떻게 봤어?"


"어찌 보긴, 산에서 내려오다 봤지. 느 애미한테 들키는 날엔 매타작이여. 얼른 가겟방에 가서 막걸리 두병 받아다 한 씨 할마이 주고 온나. 내가 주고 오랬다고 하래이"


나는 정강이에 꾸덕꾸덕 말라 가는 피 딱지들을 도둑질의 증거로 단 채 할머니가 손에 쥐어주신 천 원을 들고 가겟방 마당에 있는, 펌프 물로 이따금씩 샤워를 하는 고무다라에 담겨 있던 막걸리 두병을 사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며 한씨네 집으로 갔다.

다른 심부름을 할 때는 단숨에 부리나케 달려갔던 곳이었는데 왜 이리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떨리는지, 마당에 들어서니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아래 들마루에서 옥수수를 드시고 계시다 반갑게 반겨주시며 앉아서 먹고 가라고 여러 번 권하셨으나 나는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할머이가 드리고 오래요" 이 말만 하고 죄짓고 도망가는 사람처럼 쏜살같이 달려 그 집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친구도 비밀을 지켰고, 할머니도 목격한 비밀을 지켜주셔서 나의 수박서리는 조용히 지나갔지만 동네에서 한씨네 아저씨나 아줌마를 마주칠 때면 나의 우렁찬 목소리는 쪼그라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인사드리며 오랜 날들을 움찔움찔해야 했고, 일요일 아침마다 애향반 활동을 나가야 할 때 한씨네 오빠들과 청소구역을 배정받으면 되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말을 섞지 않으려고 부단히 머리를 굴려야 했다.


트레이더스에 갔다가 정말 공룡알처럼 큰 수박 더미를 보았다. 어느 지역 농부님께서 지으신 수박 농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까이 계시다면 정말 '엄지 척' 해드리고 싶을 만한 크기였는데 수박 한 덩이를 '끄응' 소리와 함께 조심조심 쇼핑카트에 담으면서 마치 마트에서도 수박서리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뒤로 절대 서리를 하지 않았다. 죄를 지으면 몸도 마음도 편치 못하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고, 아마도 어른들은 아셨음에도 모른 척해주지 않으셨을까? 지금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씨네 수박밭에 트럭이 들어가 수박을 몽땅 따가던 날, 한씨네 할머니는 터지고 깨지고 다 자라지 못한 수박을 리어카로 한가득 싣고 가라 하셔서 우리 식구는 몇 날 며칠을 물리도록 수박을 먹었고, 수박껍질 덕분에 엄마소도 여러 날 껌을 씹었다. 그리고 할머니나 아빠가 수박을 자르시기 전에 톡톡 두들겨 보시곤 우리에게 어떤 수박이 제일 잘 익었을까 맞춰보라 하셨는데 결론은 소리로는 절대 알아맞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수박을 절대 두들겨 보지 않고 그냥 꼭지가 맘에 드는 덩이로 골라 담는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할머니 덕분에 속이 새빨간 수박을 맘껏 먹었을 텐데 나는 왜 그때 수박서리를 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엉뚱하기 짝이 없다. 아마 이 글을 언젠가 읽게 되는 남편과 아이들이 나의 엉뚱했던 어린 시절을 엿보고 매우 당황해할 것을, 또 셋이서 한편 먹고 나를 놀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할머니가 그때 해주신 무스운 얘기를 아이들을 재우려고 해 주면서 '견물생심, 욕심'에 대해 대화를 나눠볼까 하여 얘기해 주고 질문을 던졌다.


"바늘을 왜 가져갔을까?"


누워서 얘기를 곰곰이 듣던 작은 아이가 말했다.


"어 그거 나 알아, 엄마가 하는 거 그거 뭐였지? 아 맞다 십자수하려고"



이전 06화야나할머니의 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