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욕 중인 시래기겨울 내내 바짝 건조된 시래기를 갓난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공수해 왔다.
손만 대도 낙엽 같이 으스러질 것 같이 바짝 말랐던 시래기를 뜨끈한 물에 두어 시간 담가두었더니 살아나는 것이 보였고, 이만하면 됐겠다 싶어 골고루 한참을 삶은 뒤 담가 두었다.
저녁이 되자 독서실에 갔던 작은 아이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으윽 엄마 이거 무슨 냄새야?
"뭔 냄새는?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아니야 우리 집에 무슨 이상한 냄새가 나. 아빠 방귀냄새 같은"
아이의 귀가 소리를 들은 남편이 방에서 나오다
"왜 오자마자 가만히 있는 아빠는 걸고넘어져?"
"아빠 도대체 뭘 먹고 뀐 거야?"
"나? 엄마가 주는 거 먹었지"
남편이 억울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대답했다.
"아~ 내가 낮에 쌂은 씨래기 냄새가 다 안 빠졌나 봐."
"쓰레기는 왜 쌂아?"
"쓰레기 아니고 씨래기. 그리고 이게 무슨 방구냄새야? 고향의 냄새지. 고향의 향기 얼마나 좋아"
"엄마, 언제는 고향의 냄새는 소똥냄새라며"
반신욕 말고 온천 투어 마친 시래기아이가 말한 이상한 냄새는 시래기 삶은 냄새가 맞았다. 하지만 한 시간도 넘게 시래기 삶는 작업을 했던 나는 이상하단 생각은 일도 못했는데 아이의 코에는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나 보다. 괜히 아빠만 엄한 누명을 썼지만 나는 그것 조차도 뭔가 통쾌했고, 다음날까지 맑은 물로 헹궈주며 기다렸던 시래기가 먹기 좋게 불려졌기에 텔레비전을 보며 줄기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우리 오늘 저녁 씨래기밥 해 먹을까?"
"나는 좋아"
남편이 대답하기 무섭게
"나는 노"
작은 아이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럼 씨래기밥 말고 씨래깃국 끓일까?"
"엄마가 저번에 버섯 넣고 끓여줬던 그 국? 그거면 괜찮아"
"밥이랑 국이랑 다 먹으면 안 돼?"
남편의 물음 같은 청에
"아 싫어. 우리가 무슨 염소도 아니고 한 가지만 먹어 한 가지만"
아이의 절규 같은 대답이 날아왔다.
조용한 산골의 긴긴 겨울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방바닥에서 뒹굴거리던 내 코에 문풍지 사이를 뚫고 킁킁 연기 냄새가 도착했다. 방문을 열어보니 마당에 걸어 놓은 솥에서 며칠 전 내린 눈에 젖었던 솔가지가 타느라 내는 하얀 연기가 마당가득 운무처럼 깔려 있었고 시계를 보니 2시가 좀 넘었는데 아직 군불을 땔 시간도 아니건만 할머니는 또 무슨 재미난 일을 하시려고 하는 걸까? 궁금해진 나는 마당으로 나갔다.
"할머이 머 해?"
"머 하긴 보믄 몰르나 불 때지"
"오늘은 왜 소죽을 이렇게 일찍 끓이?"
"뭔 소죽은?"
"이거 지금 소죽 끓이는 거 아니야?"
"뭔 소죽은? 씨르기 쌂아물라 그라지"
"쓰레기를 쌂아 먹는다고?"
"이 마한 것좀 보래이. 할미를 놀리네"
"이걸로 뭐 해 먹을 수 있는데?"
"국도끼리 묵고 뽂아 묵고 밥도 해 묵지"
"우리가 소도 아닌데 이 삐쩍 말른 걸 어떻게 먹어"
"가매이 기다리 보래이. 쌂아 껍데기 삐끼노믄 야가 을매나 야들야들 맛있어지는지"
시래기 고향 떠나기 전 사진마당에 걸어 놓은 커다란 양은솥은 겨울 내내 처마 밑에서 마당을 지켜보며 빠짝 말라가던 시래기를 꿀꺽 삼켰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솥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까실했던 시래기는 뜨거운 물에 첨벙 목욕을 하더니 거짓말처럼 금새 얌전해졌고 무꾸의 무성한 머리칼, 초록초록을 뿜뿜 자랑하던 젊은 시절을 증명하 듯 찐 초록빛을 소환하며 통통해졌다.
장작은 타닥거리는 큰 소리를 내며 빨간 혀를 날름거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시뻘건 숯덩어리와 무청시래기 삶는 냄새는 늘어났다.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노를 젓 듯 무청을 뒤적거리며 뒤집어 주시던 할머니는 몇 가닥 건져 손으로 만져 보시더니 이제는 다 된 것인지 깊숙이 들어가 있던 있던 장작을 밖으로 끄집어내시고 아까부터 수돗가 옆에 덩그러니 있던 스댕다라에 물을 받아달라 하셨다. 나는 수도꼭지에 꽂혀 있는 짧은 고무호스를 붙잡고 포물선을 그리게 물을 쏘며 누군가가 싸는 오줌줄기라고 킥킥거리자 할머니는 나를 쳐다보시더니 수돗가에 사방 팔방 물 뿌려 얼믄 누구 하나 자빠져서 머리 깨기 딱 십상이라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김이 펄펄 나는 시래기 뭉텅이를 내가 오줌(?) 받아놓은 다라에 풍덩 담그셨다.
다라 안에 시래기는 며칠 동안 초록물을 뛰어넘은 검은 물을 마구마구 토해냈는데 나는 초록색이었던 시래기가 왜 검은 물을 뿜는지, 혹시 겨울 내내 쌓인 먼지 색깔이 아닐까? 의심도 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지나가시면서 한 번, 엄마가 지나가시면서 한 번. 그렇게 물을 갈아준 덕분에 며칠 뒤 더 이상 검은 물이 나오지 않았고 할머니는 큰 그릇에 시래기를 건져 소죽불 앞에 쪼그려 앉아 줄기를 싸고 있던 흰 껍질을 줄줄 벗기시더니 공처럼 똘똘 말아 물을 꾹 짜서 쌀바가지에 담아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시는 엄마에게 배달을 시키셨고, 그날 저녁 우리 식구는 뼈대있는 집안이라 증명하는 커다란 며르치가 들어 있는 시래기 된장국을, 한 동안 시래기 볶음 나물도 밥상에 올라왔다.
보글보글 시래기 국
현재의 나는 시래기 국도 볶음 나물도 참 좋아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엔 겨울부터 봄까지 지겹게 먹던 시래기 반찬이 싫어서 어른들 몰래 소와 염소에게 건조된 시래기를 훔쳐다 가져다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꼬부라진 손가락으로 깐 시래기가 장터에 장사꾼들에게 전달되어 고등어나 임연수로 셈베이 과자와 알사탕으로 둔갑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절대 소와 염소에게 껌을 주지 않았다.
밥상에 오른 시래기 볶음을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추억은 큰아이를 품고 입덧이 심했던 시절 고추장과 밥을 비며 먹는 걸로 버텼었는데 그땐 왜 그렇게나 시래기 나물이 맛있었는지, 그때 마이 무서 큰 아인 지금도 시래기를 먹지 않는 것인지 살짝 궁금하기도 하다. ㅋ
남편은 나중에 귀촌 생활을 하게 되면 하루에 한 끼만 나물 반찬을 먹고살겠다고 하는데 나는 체력 유지 및 쾌변을 위해 그래도 두 끼는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려면 무꾸를 아주 많이 심어 무꾸랑 무청이랑 열심히 먹고살자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무청을 삶을 큰 솥도 필요하겠다.
사람이 점점 어린시절에 먹던 음식을 추억과 함께 찾게 되면 그것은 나이가 드는 증거라고 막냇동생이 말해줬는데 나이가 드는 것은 어쩌면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추억하는 시간을 갖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시래기를 쓰레기로 알아들은 어린시절의 나와 또 엉뚱한 나를 묘하게 닮아 있는 작은아이. 자 이것은 과연 청력의 문제일까? 유전의 힘일까?
시래기를 삶아보니 나도 할머니를 닮아가고 있는 것도 같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