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큰 공을 갖고 노는 것을 좋아했었다. 배구, 농구, 축구, 럭비공까지도 괜찮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큰 공을 갖고 노는 시간들은 아이들의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나의 역할도 졸업을 했고, 아이들은 나와 노는 것보다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재밌어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작은 공을 갖고 놀아야 하는 시간들이 늘게 되었는데, 탁구, 배드민턴, 당구였다. 하지만 항상 나의 입버릇은 "작은 공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였는데 이유는 잘하지도 못할뿐더러, 쪼맨한 공을 주우러 다니는 게 너무너무 귀찮았다.
주말 남편과 아이와 함께 간 탁구장. 공이 작다. 역시나 나는 경기 관람자이며, 볼보이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탁구 장서 발견한 이 뜰채는 나의 호기심을 완전 자극했고, 너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내 손짓에 딸려와 소복하게 담기는 탁구공들도 너무 귀엽다. 이 탁구공들이 죄다 알이었으면 좋겠다. 호호호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까? 큰고모네 아이들이 우리 집에 꽤 긴 날들 맡겨진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오면서 오리 두 마리도 덤으로 함께 왔다. 하필 그날 학교 앞에 온 오리 장수를 보고 고모를 부득부득 졸라 두 마리를 샀다고 했고, 서울서 시골까지 장시간 박스에 담겨 온 아기 오리는 처음엔 노란 털이 송송 나 있었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 털 색은 흰색으로 변해갔다.
동생들은 떠났지만 오리들은 우리 집에 남겨졌고, 오리가 어찌나 똑똑하던지 날이 밝으면 모이를 먹고 신작로를 건너 앞 도랑에 가서 물장구도 치고, 물고기도 잡아먹고 놀다가 해 질 녘엔 뒤뚱뒤뚱 걸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들에 다녀오시다 동네 입구에서 오리를 본 동네 어르신들은 오리가 개만큼이나 똑똑하다며 칭찬을 하셨고, 여름방학 내내 감자 물을 갈면서 내가 본 광경은 정말 어른들의 말씀 그대로였다.
오리의 진짜 주인은 서울로 떠나간 탓에 그다음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되었는데 밥을 주는 사람이란 것을 알아서였을까? 오리들이 할머니의 목소리는 기가 막히게 구분했다. 할머니가 집을 비우실 때는 외양간 옆 여물 더미에 튼 둥지에서 조용히 고개를 묻고 잠을 청하다 할머니가 산에 다녀오셔서 우리를 부르시면 오리들도 꽥꽥거리며 대답을 했다.
오리는 쑥쑥 커서 몸집도 꽤 커졌고 목청도 동네가 떠나가도록 커졌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알을 낳기 시작했는데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지만 할머니는 그것도 기가 막히게 알아내셨다.
오리는 처음엔 도랑 풀숲에다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을 바로 건져오지 않으면 동네에 목줄을 하지 않고 풀어놓고 기르는 개들이 와서 알을 홀라당 훔쳐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부턴가 오리가 물속에다 알을 낳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알을 건지러 다니셨다.
나는 학교에 다녀오면 할머니보다 빨리 도랑으로 알을 건지러 가는 것이 하교 후의 일차 과제였는데 하지만 날이 추워지고 물이 차지면서 너무 깊은 물에 있는 알은 건지기가 힘들어졌다. 궁리한 끝에 할머니의 나물 데치는 채를 들고 가는 지혜를 발휘했지만 오리는 그런 나를 약 올 리 듯 점점 더 깊은 물에 알을 낳았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양파망이나 망사로 된 천조각들이 그 당시엔 어쩜 그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는지, 탁구장에서 이 기막힌 아이템을 발견한 나는 올라가지 않는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리고 찬 물에 들어가 옷을 적시고 나와 덜덜 떨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나를 떠올리고선 타임머신이 있다면 길이 조절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이 뜰채를 들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지금도 나의 본가에는 닭장이 있고, 할머니를 대신해 아버지가 닭을 키우신다. 언젠가 이웃 친구네서 얻어 온 청계 두 쌍은 알을 낳고 품어 올봄에도 몇 마리의 병아리들이 부화를 했고,
아버지가 닭 농장 하시는 친구분들에게 얻어 오시는 희한한 알들을 위해 엄마는 인공부화기를 막내에게 사달라고 하시더니 몇 마리씩 부화도 시키셨다. 나는 지난번 집에 갔을 때 언니도 동생들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고 거절한 청계 알을 챙겨 왔다.
붉은 계란은 우리가 흔히 마트에서 사 먹는 계란이고 하얗게 보이는 알이 청계 알인데 오리알은 저 노란 계란보다 2배는 더 크다. 이렇게 알을 보고 있으면, 그 시절 그 큰 오리알을 훔쳐먹던 노마네 누렁이를 제치고, 석이네 검둥개를 제치고 내가 먼저 발견하고 건져 올렸을 때의 그 만족감과 뿌듯함이란 지금 생각해도 흐흐흐 나도 모르게 흡족한 웃음이 난다. 그때 나보다 약삭빠르게 알을 훔쳐가는 동네 개들은 내가 던진 돌멩이에 몇 번 맞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참 욕심이 많다.
닭장 근처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목이 타시면 닭장 문을 열고 계란을 하나 꺼내셔서 계란 끝을 치아로 톡톡 치셔서 호로록하고 계란으로 목을 축이셨는데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먹어 본 적은 없다. 아빠를 따라먹어 봤던 동생이 맛이 없다고 하여 입 짧은 나는 애당초 궁금함도 없었고 환상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도 계란 비린내를 아주 많이 힘들어한다.
내가 그렇게 투철한 사명감으로 알을 지켰던 것은 할머니가 즐겨 드셨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산에 오르실 때 최대한으로 가벼운 짐과 도시락을 챙겨 가셨는데 종종 드시던 음식이 알류였다. 그런데 계란은 늘 손주들의 밥그릇과 도시락에 올려지기 에도 바빴고, 그나마 산에서 드시기에 양도 적당하고 우리가 잘 먹지 않았던 오리알이라 할머니가 드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악착 같이 도랑 풀숲과 물속을 살피고 다닌 이유였고 또 하난 내가 할머니를 위해서 애쓸 때마다 할머니가 틀니를 드러 내며 웃으시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나에게만 몰래 열어 주시던 할머니의 그 빨간 전대 주머니도 너무너무 좋았었다.
나는 요즘 출근길에 한들거리는 버드나무도, 물에서 첨벙거리는 잉어 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유심히 관찰하고 사진을 찍는 버릇이 생겼다. 주변의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겨 있고, 희한하게 소환되는 기억들이 있다. 물론 아직까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안타깝긴 하지만, 부족한 나의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시는 고마운 분들과, 나처럼 할머니란 이름으로 할머니와의 추억을 소환해서 공감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야나할머니도 더 기쁘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