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네 고암마

멧돼지 아니고 굼벵이

by 별바라기

이산에서 저산으로, 이 밭에서 저 밭으로 밤마다 몰려다니는 말썽꾸러기 멧돼지 부대에서 지켜낸 고구마는 긴 긴 겨울 우리들의 입을 심심하지 않게 해 주던 고마운 선물이었다.

고암마 튀김 납시요~

할머니는 고구마를 언나(어린아이) 다루 듯 잘 다루어야 한다며 수확을 끝내시면 숙성한 고구마를 얼지 않고 썩지 않게 애지중지 보관하셨고 혹여나 철 모르고 쑥쑥 싹이 나지 않는지 자주자주 들여다보며 살피셨다.


어린 우리가 깎아 먹기엔 고구마는 울퉁불퉁한 데다 너무 딴딴했고 할머니가 여유가 있으신 날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깎은 고구마를 한 조각씩 얻어 한 참 동안 뜯어먹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고구마는 구워 먹거나 노랗게 튀김을 해 먹는 것에 제일 맛이 있었다.


"이 마한 것. 어젯밤에 또 소죽불에 고구마 묻어놨네"


아침 쇠죽 겸 군불을 때시려 아궁이에 재를 퍼내시던 할머니가 새까맣게 탄 고구마를 꺼내며 아침부터 한소리 하셨다.


"내가 또 일찍 자부맀네"


"묻어놨음 알구치야지. 가매이 있음 누가 아나. 다 타가꼬 아까워서 우째. 뭔 언나가 초저녁 잠이 이래많은지"


할머니는 까맣게 숯이 되어버린 고구마를 툭툭 털며 반으로 갈라보시고 회생불가를 결정, 거름터미에 갖다 버리셨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왜 그때나 지금이나 초저녁 잠이 많은 것일까?

나는 나를 잘 몰랐다. 마흔이 넘은 후에야 내가 평발이라는 사실을 의사 선생님이 보여주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처음 알았고, 뭐든 의욕은 국가대표급이었으나 결정적 기초체력은 바닥이란 사실을.




"언니야 우리 어제 또 고암마 먹었지롱"


"아 내 고구마! 하나도 안냄기 났나?"


"니는 먹지도 못하고 잘 거면서 왜 매번 일을 벌이고 자나?"


언니가 이젠 별 놀랍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이 깨자마자 자매들에게 고구마의 행방을 듣고 마루에 나가니 소여물 담아 줄 때 쓰는 삼태기 위에 어젯밤 내가 잠든 사이 뜨겁고 노란 속살을 보여 주었을 고구마 껍데기가 소복하게 담겨 있었다.




"언니야 오늘은 고암마 안 해?"


할머니가 쇠죽 불을 때시고 외양간에 불을 끄자 동생이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동생은 희한하게 고구마 발음을 못하고 고암마라 발음 했는데 식구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 알아 들었다.


"어 이제 고암마 못해. 엄마가 고구마에 손대지 말래"


며칠 전 엄마는 새앙쥐 골방 드나들 듯한다는 표현과 함께 더 이상 고구마를 아궁이 불에 묻어 놓지 말라는 엄포의 지령을 내리셨다.



고구마 줄거리

"할머이 뭐 해"


"뭐 하긴 보믄 모르나? 고구마 줄거리까지"


"그냥 먹지 뭘 까느라 그래"


"이잉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는데 왜 기냥 묵나. 기냥 먹음 찔기"


"그라믄 푹 삶음 되지"


"나중에 커서 살림할 때 그리 하믄 안돼. 똑디기 배워서 한 번을 해도 지대로 해서 무야지"


"나는 반찬 안 해 먹고 사다 먹을 거야"


"이 마한 것. 말하는 것 좀 보게, 야무지게 배워가꼬 맛있게 해 묵을 궁리를 해야지. 그래 시집가믄 시댁에서 숭봐. 솜씨 없는 딸 보냈다고"


"숭보라 그러지 뭐."


나는 할머니가 "이잉"이라는 소리를 내며 놀라는 모습이 웃겨서 할머니와 계속 말장난을 치며 고구마 순을 깠다.




작년 가을 동네 마트에 갔더니 고구마 순이 어쩐 일로 한 단에 이천 원씩에 팔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심봤다'를 외치며 부리나케 2단을 냅다 집어와 순을 까기 시작했다. 잎을 떼고 억센 부분을 잘라내고 나니 많아 보이던 양이 푹 줄어들고, 데치니 양은 더 더 줄어들었다. 할머니와 도란도란 긴 수고로 만났던 고구마 줄거리 볶음 맛이 떠올라서였을까? 양이 적어서였을까? 이름 모를 아쉬움에 더 맛난 저녁밥을 먹었다.




지나간 한가로운 주말 오후.

입이 심심하던 차에 옆에 동료샘이 알려준 규칙으로 에어프라이기에 고구마를 구웠다.

110도에서 30분, 160도에서 30분, 190도에서 30분을 뒤집어 가며 구우면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군고구마로 구워지는데 긴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똑같은 고구마를 가지고 그간 왜 이렇게 대충 구워 먹고살았나 후회가 될 정도로 맛의 품격이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 브런치 글벗님들도 꼭 한 번 시도해 보시기를 희망해 본다.


아! 그리고 지난해 가을 친정마을엔 멧돼지가 아닌 굼벵이 떼가 고구마 밭을 점령했다. 땅속에서 고구마를 야곰야곰 먹고 있는 굼벵이 부대들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가뭄과 더위로 땅속서 목이 말랐던 굼벵이들은 고구마 껍질을 살살 갉아 수분으로 목마름을 달랬고 우리는 굼벵이 가족과 고구마를 나눠 먹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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