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네 참외 이야기

참외 향에 잠드는 밤

by 별바라기
돋아나는 달래


*달롱 : 달래의 방언(강원)

*나새이 : 냉이의 방언(강원, 경북)


겨울 내내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 밑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던 산기슭의 달롱은 막냇동생 머리카락 맨치로 가늘고 연한 파란 싹을 틔우더니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게 보였다.

그렇게 낙엽 이불을 덮고 작년보다 더 넓게 퍼져 자란 달롱 무더기를 지켜 보시던 할머니는 한 날 달랑 호미 한 자루 들고 마치 산을 개간하듯 캐셨는데 가느랗고 작고 동그란 머리가 뜯기지 않게 조심조심하다 보니 일은 더디게 진행되었는데 대신 다라가득 달롱이 쌓여 갈수록 향긋한 달롱향도 까뜩 채워졌다.




할머니가 대낮부터 저녁상을 물린 이후까지 침침한 백열등 아래서 밤늦도록 달롱을 다듬고 계신 것을 보며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 새 깔끔하게 정리를 마치셨고 첫 차를 타고 장에 가시려고 대문간 앞에 보따리도 꾸려 놓으셨다. 동생과 나는 학교 가는 길에 버스가 서는 가겟방 앞에다 할머니 짐을 날라다 드리려고 함께 나섰다.


"할머이 안녕히 다녀오세요"


"할머이 잘 댕기와"


"오이야. 늬들도 핵교 잘 댕기 온나"


"네에~"


동생과 나는 할머니가 오늘 달롱 판 돈으로 장에서 무엇을 사 오실지 기대 뿜뿜의 얘기를 나누며 학교엘 갔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는 마당에서 나새이를 다듬고 계셨다.


"이 마한 것. 핵교 끝나고 후딱 안 오고 어딜 또 쏘다니다 이제 오노?"


"할머이 일찍 오싰네? 아 오늘 갑재기 새마을 운동 한다고 남으래서"


"그랬나? 야야 내가 오늘 장에서 뭐 사 온 지 아나?"


할머니가 등 뒤에 감춰뒀던 봉다리를 주섬주섬 열어 보이셨다.


"우와 참외네. 안즉 추운데 참외가 나와?"


"신기하기도 하지. 시상이 어째 돌아가는지 벌써 위가 다 나오고"


"근데 언제 먹어?"


"이따 다 모이는 지녘에 무야지. 야나 이거 정지에 잘 갔다 논나"


할머니는 내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노란 참외 두 개가 든 봉다리를 쥐어 주셨다.




저녁상을 물리고 엄마는 참외를 깎아 돛단배 모양으로 여러 조각을 내셨다. 아빠는 철 이른 비싼걸 뭐 하러 사 왔냐며 타박하면서 한 조각 드시고 물러나 앉으셨고, 할머니는 우물우물 달그닥 거리는 틀니 소리를 내며 우리가 참외 먹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셨는데 오래 씹는 할머니 대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게 눈 감추듯 단숨에 먹어 버렸다. 작지만 참외의 노오란 단내는 안방에 차고 넘쳤고 그 한 조각의 맛은 지금껏 세상의 어떤 달콤함도 감히 대신하지 못하고, 그날 안방의 노오란 광경과 감동의 맛은 지금까지도 어제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산책을 하다가 바람을 따라온 향기로운 냄새를 맡게 되었다.


"우와 단내"


"그러게 단내가 여기까지 나네"


나는 자석에 이끌리 듯 과일 가게로 들어가 참외를 덥석 집어 계산을 끝냈다.


"나 정말 출세한 거 같애. 이젠 눈치 안 보고 참외를 사다니"


"뜬금없긴. 누가 참외 산다고 엄청 눈치 주는 줄 알겠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에겐 참외의 슬픈 사연이 있다고 뜨흑"


"그 슬픈 사연이 뭔데?"


"안 갈촤 줘"




너의 이름은?

"우와 완전 꿀이야. 나 이렇게 맛있는 참외 거의 사십 년 만인 거 같애"


참외를 깎다가 끝 부분을 먼저 먹은 내가 격하게 감탄하자 식구들은 우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 진짜 속고만 살았나. 뻥 아니고 진짜라고. 먹어보래니"


한 조각 건네자 작은 아이는 향을 먼저 맡더니


"음~ 일단 향은 통과인데 꽁대기를 먹은 엄마가 사십 년 만에 맛있다고 하니깐 좀 의심스러워"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입으로 참외를 집어 넣은 아이의 눈은 커졌고 감탄의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


"것봐 내가 뻥 아니랬지?"


"엄마 근데 그렇게 흐뭇해? 엄마가 참외 농사진 줄 알겠어"


아이가 참외를 먹으며 특유의 표정으로 나를 또 놀렸다.


"나도 십구 년 만에 먹은 참외 중에 젤 맛있네. 근데 뭘 먹여 키워서 이렇게 달은 걸까?"


"아마도 설탕물?"


너무 식상한 대답을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남편 덕분에 우리는 또 웃었다.




아들아 생일 축하해~

오늘은 군에 가 있는 큰 아이의 생일날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군에서 생일 아침을 맞을 아이를 떠올리며 어젯밤 불려 놓은 미역을 볶고 북어를 찢어 국 끓일 준비를 하는데 긴긴밤을 보내고 식 전 북어 냄새를 맡은 앙꼬가 열심히 냥펀치를 날리며 발 밑에서 서성거리기에 나는 양발로 밀어내는 전쟁을 치르며 미역국을 끓였다.


어제저녁 주술에 걸려든 것처럼 사들고 온 참외는 아들의 생일을 맞을 나에게 내가 주는 축하 겸 위로의 선물이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 두었던 참외 얘기를 해보자면, 내가 첫 아이를 품었던 그 시절에 가장 많이 먹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나름 눈치를 보며 먹었던 과일이 참외였다. 참외 하나에 뭐 그런 슬픈 사연씩이나 갖다 붙이냐고 한 집에 사는 누군가(?) 말할 수 도 있겠지만 결혼 초 시댁에서 보내 주시는 생활비로 생활을 해야 했던 나는 철 이르게 나온 비싼 참외를 감히 먹고 싶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한 날 언니네 집에 갔다가 얻어먹은 참외는 기가 막혔고 참외를 처음 맛본 태중의 아이도 신이 났는지 그날 유난히도 꼬물거렸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잠잠한 아이의 태동이 궁금했던 나는 큰맘 먹고 참외를 사 먹고 태동을 관찰했는데 그날은 꼬물 댐을 넘어서 무서울 만큼 내 몸이 들썩일 정도로 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내가 맛있게 먹으면 아이도 맛있게 먹는구나'였고 가능하다면 참외를 자주 맘껏 먹고 싶었다. 하지만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봉다리 사러 가끔씩 들르는 동네 슈퍼 진열대에 팽팽한 랩을 뒤집어쓰고 노란 향으로 나를 유혹하는 참외를, 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에서 입술이 부르트게 애쓰며 공부하는 남편을 두고 혼자 먹으려니 차마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었고, 나는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임신당뇨를 걱정해야 하는 주수에 들어섰다며 설득했지만 그 상황이 너무도 서러워서 눈물이 났던 기억을 이십 년이 훨씬 넘도록 가슴에 묻어 놓고 있었다.




우적우적 먹으며 담아뒀던 참외 사연을 꺼내자 남편이


"자 똥색시 많이 먹어"


하며 포크로 두 개를 꾹꾹 찔러 왼손에 쥐어 주었다.


"우리 엄마 많이 먹어"


작은 아이가 또 두 개를 꾹꾹 찔러 오른손에 쥐어 주어 나는 사랑탐지기, 아니 참외 포크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자정이 넘었고 큰 아이의 생일은 어제로 흘러갔다.

내년 생일엔 얼굴 보고 축하해 줄 것을 기대하며 사십 년 전의 그날처럼 노란 참외 향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날이 되었다. 혹시 더 많은 참외를 먹고 싶어서 꿈속에서 밤 새 참외 서리를 하러 참외 밭을 기어 다니지나 않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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