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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Jun 15. 2023

야나할머니와 하드

나 마늘 사랑해

아무 기대 없이 들른 동네 마트에 기다리던 마늘 시즌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실한 마늘 통들이 빨간 양파망에 담겨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순간 나의 마음은 행복함에 꿀렁거렸고 망태기를 덥석 집었다.


나는 마늘 까는 일을 참 좋아한다.

특히나 이맘때 갓 캔 마늘을 만지는 촉감은 얼마나 촉촉한지, 반질반질 뽀얀 윤이나는 알들이 껍질을 벗고 소쿠리에 소복이 쌓여 가는 걸 보고 있으면 뭔가 뿌듯하고 흐뭇한 기분도 드는데 그 쨍한 기분을 와장창 깨는 이가 있으니 바로 남편이다. 생김새(?) 답지 않게 냄새에 민감한 남편은 거실에 마늘냄새가 진동한다며 투덜대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손은 마늘 작업을, 눈은 텔레비전을 향해 있고 그 시간은 내겐 노동이 아닌 놀이시간과도 같다. 만약에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마늘 까는 알바를 꼭! 해보고 싶다. ^^

앉은뱅이책상을 펴고 거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척 붙인 채 상 밑으로 다리를 쭉 뻗고 몇 시간째 마늘을 주무르며 텔레비전에 빠져 있는 나를 보고선 인어공주 영화를 보고 귀가한 작은 아이가 놀리 듯 말했다.


"아직도 마늘을 까고 있는 거야? 엄마 마늘한테 찐이네. 마녀 말고 마늘에게 영혼을 판 것 같아"




마루 끝에 누워 마당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당 위에도 장독 뚜껑 위에도 꼬물꼬물 거리는 아지랑이가 보였는데 그 아지랑이를 한참 보고 있으면 등부터 발가락까지 벌레가 스믈스믈 기어가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외양간의 엄마소도 토끼장의 토끼 가족들도 닭장의 닭들까지도 축 늘어져 꼼짝도 않고, 담장 위에 축 쳐진 호박덩굴을 지나 대문간에서 졸고 있는 누렁이의 귓가를 스쳐 마치 확성기를 다 댄 듯 들리는 강력한 오토바이 소리와 낯선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하대~  하대요"


"할머이 뭐라고 하는거여?"


"니 첨 들어봤나? 뭐라 하긴 아스께끼 장새 소리 자네"


"아스께끼가 뭔데?"


할머니는 피식하는 웃음을 지어 보이시곤


"아스께끼가 먼지 갈촤주래?"


할머니가 오토바이가 서 있는 느티나무를 향해 나서자 나는 양쪽에 동생들 손을 잡고 쿵떡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할머니를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아재요 아스께끼 마이 팔았소?"


할머니 물음에 아저씨가 돌아보시곤


"예이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야아 잘 있었으요. 오늘은 을매나 맛난 걸 싣고 왔나 어대 비키 줘 보래요"


"몇 개나 드릴까요?"


"니개만 주소"


할머니 전대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백 원짜리가 하나 나왔다.


"동상 잘 보라고 사주는 기여."


삐딱하게 세워져 있는 아저씨의 오토바이 뒷자리엔 커다란 상자가 얹혀 있었는데 할머니의 주문에 아저씨는 상자 가운데 뚫려 있는 작은 문으로 장갑을 끼고 토시를 낀 팔뚝을 깊숙이 집어넣었고 그때 아저씨의 겨드랑이 밑으로 하얀 김이 술술 새어 나왔다.




아저씨가 하얀 김 속에서 꺼내 할머니 손을 거쳐 나에게 전달된 것은 짧닥한 나무 손잡이가 박혀 있는 주황색 네모난 하드였다.


"아~ 아스께끼가 하드구나"


하드를 손에 든 나와 동생들은 기분이 좋아졌고 하드 장수가 왔다는 소문은 어찌나 빨리 퍼졌는지 동네 끝집 명순이 언니까지 느티나무 아래로 왔고 이미 하드를 손에 들고 있던 나는 온몸으로 기분 좋음과 시원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근데 조심해. 혓바닥이 하드에 달라붙어. 씨게 띠믄 피난다."


나는 하드에 쩍 하고 달라붙은 혀를 깜짝 놀라 떼고선 동생들에게 겁을 주고 나서도 슬쩍슬쩍 하드에 혀를 댔다가 뗐다가를 반복하며 혀가 닿지 않은 빈 공간을 찾았고 모든 지역을 점령하고서야 츄르릅 츄르릅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핥아먹기 시작했다.


"차가운데 어떻게 이렇게 달달할까? 맨날 먹음 좋겠다."


딱딱한 하드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국물도 흘리지 않으려고 연신 메롱 메롱하며 감탄을 하고 있던 내 눈에 손목을 타고 팔꿈치로 흘러내려 발등 위로 뚝뚝 떨어지는 주황색 국물을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해하고 있는 막냇동생이 보였고 금방이라도 하드 성이 와르르 무너져 땅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기에 얼른 수돗가에 있던 바가지를 받쳐주었다.


"니가 아가라서 천천히 먹으니깐 다 녹는거여. 입으로만 먹지 말고 손으로도 집어 먹어봐"


갑자기 너무 차가운 하드를 먹은 동생은 입이 얼었는지 입주위가 벌게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바가지엔 점점 주황색 국물이 늘어갔다.


"야 니 메롱해봐. 혓바닥 색깔이 이상해졌어"


"진짜? 언니도 이상하네 머"


"눈나야 난도 이상해?"


우리는 마루 벽에 걸린 거울 앞에서 거울 속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쳐다보며 한참을 웃고 또 웃었다.  




"하대~  하대요"


무료하던 어느 날 오토바이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드 아저씨가 또 왔나 봐. 또 먹고 싶다 . 그치?"


"나도"


"난도"


할머니가 가끔 잃어버린 바늘을 찾을 때 쓰시던 시커먼 자석에 붙어 나온 연약한 바늘같이 내 몸과 마음은 이미 파리한 바늘이 되어 하드 아저씨에게 척 달라붙어 있었다. 느티나무로 잽싸게 달려가보니 우리 동네에 과연 살고는 있었나? 할 정도로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던 언니 오빠들이 하드 아저씨가 온걸 어떻게 알았는지 기가 막히게 나타났고 중학생인 준광이 오빠는 돈을 내고 하드를 2개나 사서 성큼성큼 뛰어 집으로 들어갔고, 미자 언니도 돈을 내고 하드를 사갔다. 그리고 영철이 오빠는 주머니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 아저씨에게 건네주고 하드 한 개를 받자마자 아껴먹지도 않고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는데 아저씨는 영철이 오빠가 건넨 그 무언가를 오토바이 옆구리에 달린 주머니에 툭 하고 던져 넣었고 분명 마늘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도착한 순자 언니는 비료포대 한 개를 달랑달랑 들고 와선 아저씨에게 주고 하드를 한 개 받아갔다.  


'분명 뭐가 있단 말이지. 돈 말고'




찜통 같은 더위를 소나기가 식혀주려나 하는 기대를 무색하게 소나기가 그친 후 더 찜통이 되어 버린 어느 날. 하얀 김이 폴폴 나는 주황색 하드를 먹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하대~  하대요"


귀가 뻔쩍 하드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그날도 집엔 어른들이 계시지 않았고 나는 한참 전부터 누렁이 집 안에 꽁꽁 감춰 두었던 비료포대 한 장을 들고 오토바이를 향해 달려갔고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나에게 하드를 한 개 내주었다. 나는 성화봉송하 듯 하드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도마 위에 놓고 정확히 삼등분을 해서 동생들과 먹었는데 다행히 사라진 비료포대는 아무도 찾지 않으셨다.


그리고 한참 뒤, 그날은 정말 정수리에서 쩍 소리가 날 만큼 뜨거운 날이었는데 오랜만에 하드 아저씨가 나타나셨고 나는 며칠 전 아빠가 마당에서 올해 수확한 마늘을 지푸라기로 엮어 마늘 접을 만들 때 몰래 빼 두었던 마늘 통을 들고 아저씨한테 신이 나게 달려갔는데 아저씨는 나에게 마늘 통이 작으니 집에 가서 더 큰 마늘을 가지고 오라는 주문을 했다. 나는 오토바이가 나를 기다려 주지 않고 가버릴까 조바심이 난 상태에서 대책도 없이 마당으로 뛰어 들어오다 순간 눈이 번쩍! 처마 밑에 묵직하게 뿜뿜 자태를 뽐내며 매달려 있던 마늘 접을 보고 망설일 틈도 없이 제일 굵은 마늘 통을 쑥쑥 쑥 뽑아 아저씨에게 가져다주니 하드를 두 개나 쥐어 주셨다.




죄는 언제나 드러나는 법. 동생들과 함께 하드의 시원함과 달콤함을 알게 됐을 무렵 드디어 일이 터졌다.


그날 동네에 대대적으로 마늘을 사려는 마늘 장수가 들어왔고 이 집 저 집 휘젓고 다니며 농사꾼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는데 아빠는 당신이 농사지은 굵은 다마를 자랑하며 열심히 흥정을 하는 도중 마늘 장수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에이 한 접이 안 되겠구먼. 통수가 모자라잖아"


"아니 뭔 소리요. 속고만 살았나. 하나 둘 셋..."


아빠가 두 번 세 번 세어도 마늘은 한 접이 되지 않았다.


그때 마늘이 어떻게 팔렸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한 건 그날 나는 광 앞에 세워져 있던 홍두깨로 아빠한테 진짜 세게 엉덩이를 맞았다. 그날은 할머니도 엄마도 아무도 말려주지 않았고 나는 눈물자국인지 땟국물 자국인지 꼬질꼬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집엔 우리 동네서 1호로 냉장고가 설치되었다. 냉동실에는 항상 스댕 밥그릇에 얼음이 까득까득 얼려졌고 동네 사람들은 주전자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얼음을 얻어갔다. 하지만 냉장고님에겐 규칙이 있었는데 아무나 맘대로 열 수 없었고 오직 언니만 열 수 있었다. 이유는 하얀 냉장고에 땟구정물을 묻히고 문을 자주 열었다 닫았다 하면 전기요금도 수억 나오고 얼음이 더디 언다는 엄마의 엄포 때문이었는데 냉장고 지정 관리사이자 전담사가 된 언니의 권력은 대단했는데 얼음을 얼려 혼자만 와그작와그작 깨물어 먹었기에 나는 항상 가자미 눈으로 언니를 째려보았다.  


한 날은 얼음이 꽝꽝 언 것을 어떻게 안 건지 언니 친구들이 떼 지어 놀러를 왔고 나는 언니들이 노는 방엔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당에서 기웃거리고만 있었는데 그날 언니가 친구들과 우리들에게 내어 준 것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과일맛 가루를 녹여 만든 빨간색이 나는 밥그릇 하드였는데 달지도 시지도 않은 하드는 그냥 차갑기만 했구만 언니들은 맛있다고 극찬하면서 계속 시끄럽게 웃었다.




더위야 물렀거라

"엄마 더운데 아이스크림 먹을까?"


"뭐 먹고 싶은데 골라봐"


"오키"


학원 간 아이를 마중 나간 날 아이스크림집 앞을 지나던 아이는 별안간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하더니 아빠가 좋아하는 맛, 엄마가 좋아하는 맛, 본인이 좋아하는 맛이라며 골라 포장해 왔고 그중 가장 맛없어 보이는 시커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더니 너무너무 맛있다며 극찬과 함께 우리에게 강제 시식을 시키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히히히 엄마 거울 한 번 봐봐"


"이거 뭐 있지? 우째 너무 티 나게 먹으라 하더라니"


딸아이와 함께 거울 앞에 서서 시커먼 혓바닥을 들여다보며 메롱 메롱하고 있으니 마치 어릴 적 동생들과 거울 앞에 서서 웃고 놀던 그날이 된 기분이었다.


"근데 이건 무슨 맛이야? 색은 시커먼데 맛은 시큼하네"


"이게 친구들 사이선 엄청 핫한 맛이야"


"암만 그래도 난 아슈크림보단 하드가 낫네"


"아이스크림 하면 쮸쮸바가 최고지"


남편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때 딸기맛 나는 오십 원짜리 쮸쮸바를 열심히 사 먹었던 이유는 쮸쮸바 통에 물도 담아 먹고 개미 잡는 통으로 쓰려고 그랬었지"


"아빠 나빠 개미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이구야 놀이터서 네가 개미지옥 만들던 건 생각 안 나고?"


"개미지옥 만든 건 오빠였지 나 아니었어"


"뭐야 부녀 싸움에 애꿎은 우리 이병장까지 소환되는 거야?




마늘을 몇 시간째 만지고 있다 보니 나에게 처음으로 아스께끼란 신세계를 알려준 할머니의 고마움도 떠오르고 가슴 쿵쾅거리게 찾아왔던 하드 아저씨도 생각이 난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그 시절 냉장고를 왜 뜨뜻한 안방에다 설치를 한 걸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냉장고 청소를 끝내고 보자기를 씌워 겨울 내내 장승 같이 안방을 지키던 동네 1호 냉장고는 생각할수록 우습다. 그리고 아빠한테 첨으로 된통 씨게 엉덩이를 맞았던 그 홍두깨. 왜 하필 홍두깨는 그날 그곳에 놓여 있었던 걸까?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날 홍두깨를 광 앞에다 던져둔 것도 나였다. 그 전날 할머니 방에서 나온 호두알이 속이 찼는지 안 찼는지 확인한다고 광 앞에 있던 돌도마 위에 놓고 빈 호두알을 확인한 뒤 휙 던져 놓았는데 내가 호두알이 될 줄이야... 근데 암만 생각해도 맞아도 싸다. 맞을 짓을 했으니.


아~  그때나 지금이나 나 마늘 사랑하는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마늘 통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도 내내 따라다니니 이건 어쩜 좋을까? 주황색 하드에 영혼을 팔아버렸던 나는 꼬마 마늘 루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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