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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 Jan 08. 2024

900년 전 중국인이 바라본 고려의 모습

하루한권독후감20240107 <1123년 코리아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40107] 문경호,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2023.


작년이었던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사실 서긍이 고려를 방문한 후 그 기록을 남긴 <고려도경>은 이미 수차례 번역돼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기존 책들과 이 책이 다른 점은 있다. 기존 책들이 <고려도경> 원문에 충실한 역주의 형태로 책을 냈다면 이 책은 <고려도경>의 내용을 담았으나 독자가 그 내용에 더 다가가기 쉽도록 서긍의 시각에서 마치 실제 기행문을 읽듯 서술했다.      


저자 스스로 서문에서 "소설도 아니고 전공서도 아닌 그 중간쯤"이라고 자평하며 "이런 장르의 글을 무엇이라 해야 할지 모르지만 다양성의 추구가 현대사회의 특징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9쪽)"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복잡한 구성과 어려운 한문으로 이루어진 옛 기록을 그 내용을 충실히 따르되 쉬이 읽을 수 있도록 잘 풀어썼다고 느꼈다. 아마 이런 글로 완성되기까지 딱딱한 학술적 글쓰기에 익숙한 저자가 꽤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먼저 이 책의 원본이 된 <고려도경>에 대해 설명해보자. <고려도경>은 1123년 6월 12일 고려에 도착한 870여 명의 송나라 사신단이 7월 15일 다시 고려를 떠나 송에 돌아가기까지 한 달 남짓 머물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서긍이 기록한 책이다. 총 48권으로 이루어진 <고려도경>은 도경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글과 함께 그림도 첨부된 책이었다. 글과 그림 모두 서긍의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고려도경>은 금의 침공에 따른 정강의 변을 거치면서 그 원본이 사라졌다. 다행히도 <고려도경>의 문장만은 필사를 통해 전해져 고려 말기에 그 내용이 인용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다만 그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 <고려도경>을 쓴 서긍의 행장(죽은 사람의 행적과 성품에 대하여 기록하는 글)에 따르면 서긍은 송의 황제가 감탄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고 글솜씨 또한 "뒷사람들은 더 이상 글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고 감탄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그림 역시 "신품의 경지에 들었는데, 산수화와 인물화 두 가지 모두 탁월하였다(36쪽)"고 평가받았다. 행장이라는 것이 고인의 업적을 과대평가한다곤 하더라도 글과 그림 모두 실력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기에 황제가 보낸 사신단에 참여해 고려에 대한 각종 정보를 글과 그림으로 담아오라는 명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서긍이 탄 배, 신주는 용적량이 465톤에 달하는 당대의 초대형 선박으로 선원만 180명에 달했다. 신주는 송의 수도 개봉에서 출발해 정해현을 떠나 동해로 향했다. 고려의 해역에 도달한 신주는 흑산도에 도착했다. 당시 흑산도에는 사신을 맞는 관사가 있었으나 사신단은 이번엔 관사에 머물지 않기로 결정했다. 흑산도부터는 봉화를 울릴 수 있어 해안을 따라 개경에 까지 사신이 도착했음을 알린다.        


그렇게 고려의 해안을 따라 개경으로 향하는 도중에 고려의 뱃사람들이 사신단에 물이 부족할까봐 물독을 배에 싣고 와 건네기도 하고 군산도에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을 만나기도 한다. 서긍은 상륙하는 곳마다 고려의 대접이 융숭했다고 기록했다.      


예성강을 따라 개경에 도착한 서긍은 개경의 성곽이 엉성해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기 어렵겠다고 우려를 표하면서도 궁궐의 화려함과 빼어남에는 감탄했다. "여러 제후들이 잔을 들어 천만수를 비니, 용포 위로 상서로운 빛이 넘치는구나(154쪽)"이라고 써진 글씨를 보고는 고려가 제후국으로서 예의를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왕과 대신들의 잔치를 보니 "군신 간의 예의가 분별이 있고, 말과 행동은 조심스러웠으며, 분위기는 엄숙(159쪽)"해 오랑캐 중에서는 예의가 으뜸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여겼다.     


서긍은 당시 고려 국왕인 인종은 물론이고, 이자겸과 김부식 등 여러 고려 문신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기록은, 물론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봤다는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에 충분히 남아 있다. 내가 서긍의 기록에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평범한 고려 인민의 삶이다. 다음은 서긍이 기록한 고려 인민의 삶이다.     


고려에도 송과 같은 시장이 있었지만 그 규모는 훨씬 빈약했고 화폐 역시 거의 유통되지 않은 채 창고에 보관되어 감상용으로만 쓰일 뿐 실제 사용되진 못했다. 불상이나 탑을 세울 때 넣거나 건물을 지을 때 기단 아래 묻는 정도로 쓰일 뿐이었다.     


과거제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관직에 오르는 데는 어려움이 많음에도 고려인들은 학구열이 뛰어났다. 문벌가뿐만 아니라 군졸과 어린 아이들도 향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조정에서는 지방의 백성들을 위해 경학박사를 파견해 글을 가르친다. 여염집과 누추한 시장거리에도 책을 파는 가게가 두셋씩 있었다.      


고려의 귀부인들이 썼던 몽수


고려의 귀부인들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라는 너울을 썼다. 길이는 160cm나 되어 정수리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면 땅바닥에 끌릴 정도로 얼굴과 눈만 내놓고 모든 것을 가린다. 여성은 가마를 타지 못하는 법이 있어 말을 타기 위해 치마 안에 바지를 입고 허리띠에는 금방울을 달고 비단으로 만든 향주머니를 찬다. 이 향주머니를 많이 찰수록 귀한 신분이다. 여성의 머리 모양은 귀천 없이 비슷하다. 한쪽은 오른쪽으로 드리우고, 다른 한쪽은 그대로 아래로 늘어뜨린다. 또한 평민 여성은 물건을 머리에 이고 운반하는 데 익숙하다.     


심부름꾼은 방자라고 부르는데 관품에 따라 배정된 인원이 다르다. 비단 두건에 자주색 옷을 입고 행동이 조심스러울뿐더러 붓글씨도 잘 써 얼핏 봐서는 신분이 낮다고 보기 힘들었다. 서긍은 연회에 배가 불러 식사를 거의 하지 않으면 남은 음식들은 이들이 챙겨갔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녹봉 대신 약간의 쌀과 채소를 받을 뿐이다.      


<고려도경>에는 서긍이 고려의 화려한 수공업 기술에 감탄을 표할 때가 더러 있는데(사실 감탄이라기보다 '오랑캐치고 너무 화려하지 않나', '경박하고 겉치레가 많다'는 식으로 비하해 표현했다) 사실 고려의 수공업자는 상당수가 거란인이었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인 포로 중 장인 출신의 기술자들을 뽑아 중앙 관청에 머물며 물자를 생산케하니 수공업 기술이 훨씬 발전했다는 것이다.      


고려인들은 이복형제나 사촌 간에도 혼인하는 사례가 많았고 이혼과 재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뿐더러 이에 따른 차별도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염만 할 뿐 관은 사용하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 목욕할 정도로 청결을 중요시했고 흐르는 시냇물에 남녀가 섞여 혼욕하는 것 역시 개의치 않았다. 왕성의 행랑은 10칸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한 후 큰 항아리에 쌀죽을 담아두고 대접과 국자 등도 놓아두어 귀천에 상관없이 왕래하는 이가 먹도록 했다. 이 일은 승려가 맡아서 했고 왕의 공덕으로 여겼다.     


삼면에 바다에 불교를 중시해서인지 고려인들은 고기보다는 해산물을 즐겨 먹었고 이 때문에 고려에서 먹은 국이나 구이에서는 고기 누린내가 났다고 서긍은 적었다. 다만 고관대작은 고기를 즐겨 먹었다. 대표적인 특산물로는 잣과 밤, 인삼, 더덕, 송연묵(소나무를 태운 후에 생긴 그을음을 아교와 섞어 만든 먹)과 닥종이가 있다. 특히 밤의 경우 가을에 수확한 밤을 질그릇에 담아 흙 속에 묻어두어 서긍이 방문한 여름에도 밤을 먹을 수 있었다.       


서긍은 이러한 고려 인민의 삶을 포함해 여러 기록을 남긴 채 송으로 향하는 신주에 올라탔다. 고려에 갈 때보다 송으로 돌아가는 길이 험난했으나 결국 무사히 개봉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서긍은 송에 도착하자마자 <고려도경>을 쓰는 일에 착수해 한 본은 황제에게 제출하고 한 본은 자신이 보관했다.     


저자는 책의 나가는 말에서 <고려도경>에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로 당대의 혼란한 국제정세에서 비롯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당대의 국제정세 덕분에 송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에 사신단을 보냈고 그 결과 <고려도경>이 세상에 나왔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 배경일 뿐, <고려도경> 자체와는 큰 관련이 없다. 책 자체에서도 국제정세와 관련된 내용은 어디까지나 책이 서긍의 시선에서 서술한 만큼 서긍의 심정을 기술할 때 종종 나올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나가는 말에서 모종의 착잡함을 느꼈다. 국제정세의 혼돈이라는 900년 전과 지금의 연결고리에서 비롯된 교훈,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쓸모를 어떻게든 찾으려는 시도가 보였다. 인문학을 비롯한 순수학문을 향해 쓸모 유무를 따지는 우리 사회 모습가 그에 절절 매는 학자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저 900주년이니 고려의 생생한 모습을 알기 쉬운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것 자체로도 이 책의 쓸모는 다한 것이 아닐까. 책을 잘 읽어놓고도 마지막에 아쉬움이랄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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