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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Jan 08. 2024

성구 오빠

열여섯의 12월 겨울 어느 날.

동네 단짝 친구와 시간을 보내다 저녁 무렵 집에 들어가던 길...

시골집 양철 대문옆 녹슬고 찌그러진 우편함 속에 빨간 하트가 그려진 편지 봉투가 삐죽이 나와 있던....


"뭐지.....?"


편지 봉투를 꺼내자


'보내는 사람: 정 성 구'


"어? 정말 뭐지??"


마당으로 들어설 틈도 없이 편지 봉투에서 꺼낸 편지지는 봉투와 같은 빨간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서너 장을 빼곡히 써 내려간 많은 얘기들 중 사람에게는 여러 개의 마음의 방이 있는데 그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 싫은 비밀의 방이 있고 그곳에 어느 날부턴가 내가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너는 비밀의 방에 내가 있느냐고....


"뭐야? 날 좋아한단 얘긴가? 왜? 뭣 때문에? 언제부터?"


딱히 관심은 없는 상대에게 받은 고백이었지만 아직 솜털처럼 여리고 말랑한 사춘기 소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그 후로 나를 향한 그의 열병이  시작된 순간....


성구 오빠는 내 단짝 친구 오빠의 친구다...

우리보다 두 살 많은 그들 또한 친한 친구였는데 워낙 친하다 보니 휴대폰도 없던 시절 친구 오빠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놀러 왔다가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식구들과 앉아서 이야기하다 가는 그런 사이었다.

나는 그 동네에 살고 있긴 하나 뒤늦게 이사를 왔고, 군내로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기 때문에 이들과는 접점이 없었는데 같은 교회를 다니며 내 친구를 알게 되고 친구 집에 놀러 다니며 알게 된 오빠였다.

도대체 뭣 때문에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지만...

이후 물어보면 좋아하는데 이유가 꼭 있어야 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다 좋다고...


그러나 나로서도 호불호가 있었으니...

땅꼬마처럼 작은 나에 비해 삐쩍 마르고 꺽다리처럼 큰 성구 오빠가 내 옆에 설 때면 왠지 어색했고, 찢어진 가느다란 눈도 싫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후 는 겉으로 드러난 성격과는 달리 굉장히 적극적으로 그의 마음을 표현해 왔고 그럴 때마다 그를 밀어내기에 바빴지만 전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했던지라 고3이 되던 2학기때는 취업을 나갔다.

 나는 곧 열일곱이 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수업이 끝나고 보충 수업과 함께 자율학습까지 끝내면 보통 밤 아홉 시 반쯤 되곤 했는데 종종 교문 앞에서 가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니 나와 친한 학교 친구들은 그의 존재를 다 알게 되고

'잘 해 봐라... 불쌍하지 않으냐 차갑게 대하지 말고 좀 잘 해 주라'는 등의 훈수를 두었다.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는 그가 성인이 되어 운전면허를 땄는지 은색 자가용을 몰고 학교에 찾아오기도 했다.

그날도 캄캄한 밤 자율학습을 끝내고 친구와 재잘거리며 교문을 나서는데 그가 우두커니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친구에게 가지 말라는 절박한 눈빛을 보냈지만


"어... 나 먼저 가 볼게... 내일 봐~"


하고는 지체 없이 떠나버렸다. 

간곡한 의 부탁을 못 이기고 걸어서 간 곳이 시장 근처의 분식집이었다.

마뜩지 않은 얼굴로 마주 앉자 그가 간단한 분식을 주문한다.

그러나 별로 내키지 않던 내 마음과는 다르게 저녁 도시락 먹은 지도 오래됐고 출출했던지라 튀김이니 순대니 이것저것 먹어대기는 했으나 초록색 바탕 흰 점박이 플라스틱 대접에 있는 어묵 국물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꼬치에 꽂힌 어묵이 두 개 들어있는 펄펄 김이 나는 어묵 국물 대접에 가 먹던 숟가락이 들어갔다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아 빤히 쳐다만 본다.

새로 떠먹기에는 내가 너무 한 것 같고, 같이 먹기에는 너무 싫었던 그 어묵국물이 겨울이면 가끔 생각나 '픽~'하고 웃곤 한다.


자주 보내오던 그의 편지 속에는 나로 인해 너무 힘들다는 글이 참 많았다.

어느 날은 너무 괴로워서 세찬 비가 쏟아지던 여름밤 길바닥에 누워 비를 맞으며 엉엉 울었다고도 했다.

ㄱ ㄴ도 모르는 아이가 된 듯, 불나방이 불에 뛰어들어가는 듯 자신이 어리석은 것 같다고도 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산행 중에도 아무런 종이를 쭈욱 찢어 이 순간 내가 너무 보고 싶다며 편지를 보내왔고, 또 어떤 날은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노래한 가사 같다며 변진섭의 '숙녀에게'란 곡을 앞뒤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주기도 했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매달리는 그를 고등학생인 나로서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던지라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만나달라고 부탁하면 열에 한 번은 어쩔 수 없이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생인 나야 돈도 없었거니와 만나 달라는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나갔던지라 약속장소인 군내에 있는 카페에 가면 파르페를 사 주며 목석 같이 앉아 있는 나에게 혼자 들떠서 이 얘기 저 얘기하던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기도 했다.


1,2년 지나도 성인이고 다른 여자친구도 생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고3이 되던 해가 되도록 나에 대한 마음을 거두지 않았다.

고3 여름방학이던 어느 날, 부모님이 어딜 가신다며 하루저녁 집을 비운 날이었다.

장맛비가 무섭게도 쏟아지던 저녁, 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드라이브 갈래?" 


참 변죽도 좋다.. 그렇게도 차갑게 구는 내가 뭐가 좋다고 쓰린 마음을 부여잡고 계속 연락을 해댈까 하는 생각에 한 번쯤 나가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알았다고 대답했고, 가 차를 가지고 집 앞으로 찾아왔다.

와이퍼가 세찬 비를 연신 닦아내며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가득하던 그의  안 조수석에 앉자, 어딜 가던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진흙투성이인 시골 비포장 길을 달렸다.  

나의 손을 잡아되느냐 물었고, 말없이 나의 왼손을 내어주었다.

운전 내내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그의 오른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별 이야기 없이 음악 소리 가득한 드라이브가 어느 정도 끝나자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우리... 영화 보러 갈래?"라며 묻는다.


"그래~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영화나 보자~"


"그런데 나 지금 돈 없어. 저 위에 있는 저금통 한 번 열어서 얼마 있나 봐 봐"


"오빠, 공간도 좁고, 컴컴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얼만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럼 그건 나중에 세어보고... 마지막 영화가 몇 시지?"


"몰라.. 아홉 시 넘어서도 있지 않을까?"


"알았어. 일단 가 보자"


그가 극장이 있는 번화가로 차를 돌려 지하 주차장이 따로 없는 시골 극장 앞에 차를 세워두고 내리려는데 그쳤나 싶던 비가 또다시 후드득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 차에 우산 없어...!!!"


"뭐? 나도 쪼그만 우산 가지고 나왔어~!!!"


"그럼 우리 그냥 이거 쓰고 나가자~!"


는 자신의 단추 달린 얇은 셔츠를 꺼냈고, 우린 양쪽에 한 자락씩 크게 펼쳐 극장 안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것도 꽤 비를 잘 막네..."


"지금 영화 시간 있나 보자.... 아~ 아홉 시 반에 시작이래"


"뭐? 그럼 빨리 표 사야 돼!!"


"안 되겠다. 그럼 이거 바닥에 쏟아서 얼만지 봐야 돼..."


그가 철제 저금통에 있던 동전을 모두 극장 바닥에 와르르 쏟아부었고 우린 쭈그리고 앉아 오백 원과 백 원 위주로 돈을 세자 사람들이 우릴 힐끗거리며 지나갔다.

그 당시 영화표가 약 육천 원 정도였으니 만이천 원이 만들어지자 남은 백 원, 오십 원, 십원 따위 동전들을  급하게 넣어두고 영화표를 구매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 3가 남아있던 유일한 영화였고, 액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였지만 브루스 윌리스가 살신성인으로 이곳저곳을 초인적인 힘으로 뛰고 구르며 폭발물을 제거하는 등의 장면을 두 시간 가까이 관람해야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던 에게 얼토당토않는 희망을 안겨준 내가 참 못할 짓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11월 수능시험일다가오던 어느 날이었다.

동네 단짝 친구가 점심시간 우리 반에 찾아와


"이거 성구 오빠가 시험 잘 보라고 전해주래..."


"이게 뭐야??"


"몰라 한 번 열어봐.."


유난히도 싱글싱글 웃는 친구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이상했지만 궁금함에 열어본 상자 속에서 와락 쏟아져 나온 건 새빨간 레이스 속옷 세트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친구들도 나도 모두 당황하며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이걸 나한테 선물이라고 준 의도가 뭐냐고!!! 너무 불쾌해 너무...

도로 돌려줘... 그리고 이제 다시는 오빠 안 봐... 그런 줄 알고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잘 들어봐..

오빠가 수능시험일 선물로 너한테 뭘 사주면 좋겠냐고 묻길래 빨간색 내복이나 속옷이 단전에 닿으면 안정감이 들어서 시험을 잘 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얘기해 줬어. 

그럼 시험을 잘 볼 거라고 농담반 진담 반 얘기했더니 오빠가 난감해하면서... 그럼 정말 도움이 되려나...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렇지 않겠냐고.."


"그럼 속옷 사이즈는 뭐라고 하고 산 거야?"


"그래서 나한테 묻더라고.. 사이즈는 어떤 걸로 하면 되겠냐고...

오빠가 그냥 내 말 듣고 악의 없이 그런 거야..

내가 두 사람한테 너무 미안하다..."


"야!! 알려주려면 똑바로 알려주던가...

B컵이 맞겠니? 택도 없지...!!

어쨌든 이거 돌려줘.. 악의가 있던 없던 나 이거 못 입어.. 너무 불쾌해..."


"에구.... 미안해...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나 봐..."


평소에도 그가 친구에게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얻을 수 있겠냐며 고민 상담을 했던지라 이번 일도 그런 맥락이었나 보다.

그리고 며칠 후 '그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다른 생각은 못했고, 알지 못했다. 정말 미안하다..'라는 편지가 집으로 도착했다.

친구도 기분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다시 우리는 다가오고 밀어내는 그런 사이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2월,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곧 서울로 이사를 가야 했기에 집에서 뒹굴뒹굴거리던 때였다.

 영하 10도는 족히 넘는 바람이 쌩쌩 불던 어느 날 그가 서울에 가기 전 만나고 싶다며 집 앞으로 나와주면 안 되겠냐는 말에... 그날은 유난히도 춥고 귀찮아서 매번 그랬던 것처럼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너무나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거듭되는 나의 거절에

 '사실은 널 주기 위해 트렁크 가득 꽃을 싣고 왔다'고 한다. 

그날은 유난히도 그런 일방적인 구애가 너무나 싫어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어떤 거절을 해도 화 한번 내지 않고 절절매던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큰 소리를 내며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나도 이제 더 이상은 이런 짓 안 할 거야...

네 마음대로 해!!!"


라며 전화를 끊는 것이 아닌가...

처음 본 그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매번 밀어내는 힘겨웠는데 이젠 그 지긋지긋한 매달림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했다.


온 가족이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고 나 또한 시골에서의 시간은 온전히 잊은 채 서울의 신기함을 만끽하며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종강 후 첫 방학을 맞이하고 곧 개강을 앞두었던 8월 중하순쯤 취업했던 동네 친구도 휴가를 맞아 시골 친구 집에 며칠 다녀오기로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친구와 새롭게 맞은 서로의 일상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을 때 느닷없이 현관문이 열리더니 그가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게 아닌가...

친구의 오빠는 군대에 갔지만 워낙 식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지내왔던지라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친구 집에 놀러 왔을 테고 지난 2월의 사건을 마지막으로 편지도, 전화도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때에 이렇게 마주치다니...

생각 없이 들어오며 콧노래를 부르던 는 나를 보자 노래를 멈추고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그런 를 올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둘이 오랜만이지? 반갑게 인사해... 뭐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하고 있던 친구가


"우리 이러지 말고 밖에 나가서 산책이나 하자!"


친구의 제안에 셋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왔다.


"우리 저쪽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갈래? 거기가 조용하고 좋아.."


친구와 나는 의 차를 타고 칠흑같이 어두운 시골 학교 운동장에 아무 말 없이 도착했다.


"아이고... 나는 왜 이렇게 졸리냐... 그냥 차 안에서 잠이나 자야겠다. 두 사람은 학교 운동장 돌면서 산책이나 해..."


".........."


".........."


"내릴까?"


둘 사이의 어색함을 깨는 대화를 거는 사람은 항상 였다.


"그래..."


어두움이 조금씩 눈에 익어 서로의 형체가 확인되자, 우리는 그네에 앉아 자연스러운 흔들림에 몸을 실었다.


"잘 지냈어?"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이번엔 나였다.


"응.... 아니.... 못 지냈어.... 넌 내 생각 하나도 안 했지?"


"글쎄... 뭐...."


"난 그날 이후로 다시는 너 안 보려고 했어...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못하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너무 화가 나서 방으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너의 냄새가 확 나는 거야...

너는 모르는 너의 냄새....

사람마다 자기는 모르는 자기만의 냄새가 있잖아... 나 너의  냄새를 너무너무 좋아했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그 냄새가 느껴지면서 토할 것 같은 역한 느낌이었어...

지난 세월 동안 너를 너무 좋아했고, 내 마음을 다 바쳤던 지난날의 내가 너무 바보 같았고 사랑했던 것만큼 그 감정이 증오로 바뀌는 것 같았어.

그래서 너의 흔적은 모두 지워버리려고 네가 간간이 보내주었던 답장 편지들을 다 찢고는 우리 집 쓰레기 소각할 때 다 같이 태웠어... 

무슨 생각으로 썼을까 한 글자 한 글자 아껴서 읽으며 품에 넣고 다녔던 너덜너덜 해진 그 소중했던 편지들을 말이야....

 이후로 너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이렇게 다시 보니까...

널 잊었던 내 마음이 다 거짓말인가 봐...

널 보니까 바보처럼 자꾸 웃음이 나고 가슴이 뛰고... 예전처럼 그래...

나 정말 바보 같지?"


"그래... 참 바보 같네..... 오빠 정말 바보다..."


"너 많이 달라졌다. 화장도 하고 귀걸이도 하고... 이젠 정말 예쁜 숙녀가 됐네..."


"예쁘긴 뭐가 예쁘대... 오빠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는데.... "


"나는 네가 화장 안 한 모습이 더 좋지만... 누가 뭐라든 내 눈에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


"........."


"우리 좀 걸을까?"


"그래....."


크지 않은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던 우리는 사열대 옆 계단 맨 위층에 앉았다.

사랑의 감정이 없던 나는 예전부터 그와 단둘이 있을 땐  말이 없었다.

8월 중하순의 시골 밤은 시원했고, 오랜만에 듣는 풀벌레 소리만으로도 어색함이 없었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던 순간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무언가가 나를 와락 덮쳐오며 나는 이내 시멘트 바닥에 눕혀졌고, 뜨겁고 단단한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내게도 선명하게 전해지는 그의 강한 심장소리... 뜨거운 숨소리...

너무도 당황한 나는 힘으로 밀쳐내야 하는 건지 좋은 말로 타이르듯 이야기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지만 더 이상 그런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포개지려는 찰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고 당황스러움은 차가움으로 변해갔다.


"한번만...... 응?"


"싫어!!!"


"제발 한 번만......"


"........"


나의 차갑고도 단호한 심장을 그도 느꼈는지 잠시 주저하던 그가 다시 일어나 나를 일으켜 내 등에 묻은 흙을 털어주더니 긴한 숨을 내쉬며 낮고 가라앉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이젠 그전처럼 울며불며 매달리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일상을 편지로 전해주며 자신의 담백한 사랑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나를 보러 서울에 올라와 놀이기구도 타러 가고 공원도 가고, 내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까지 의 편지가 이어졌으나 답장이 자 편지를 보내는 빈도도 점점 줄어들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 그의 나이 스물여덟.....

열여섯 살에 그의 마음을 안 뒤로 십 년이 흘렀고, 그 세월 동안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은 뜨거운 불처럼, 잔잔한 장작불처럼, 용솟음치는 물줄기처럼, 잔잔히 흐르는 냇물처럼....

형태와 모양만 바뀐 채 계속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철없던 십 대에나 있는 잠깐의 감정일 줄 알았는데 이십 대를 다 보내기까지 나만 바라보며 연애 한 번 못 해 본 바보 같은 사람.....

지금은 무엇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지...

친구에게 의 안부를 물으면 알 수도 있지만 내가 물은 적도, 그 친구가 말한 적도 없이 사십 대 중후반이 되었고, 그냥 우린 우리의 일상을 나누며 산다.


스토커인 듯 아닌 듯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십 년간 나를 해한 적도 없고, 내가 한 걸음 멀어지라면 두 걸음 뒤에 서서 바라보던 그였기에 내가 느낀 의 마음은 사랑이다.

보잘것 없는 나에게 자신의 예쁜 사랑을 보여주던 때론 고맙게 느껴지던 사람이다.


나에게 주었던 철없지만 무모하리만큼 뜨겁고 열정적이던 그 마음 다 거둬들여 더 성숙한 가슴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성구 오빠..

어디서든 행복하고 건강해라...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나랑 같은 이름으로 짓겠다던 말 기억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치했고 우습지? ^^

나는 오빠에게  안 좋은 기억만 가득 남겨줬는데 더없이 좋은 기억 많이 안겨줘서 고마웠어....


잘 살아... 성구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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