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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Dec 25. 2023

나의 첫 빠순이 시절 이야기 ^^

이사를 하면서 집이 좁아지는 바람에 남편이 틈틈이 사다 나른 2천여 장의 CD와 8백여 장의 LP판을 우리가 운영하는 사무실로 옮겨왔다.

LP판은 아무래도 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 클래식 마니아인 남편은 나머지 장르를 중고 시장에 내놓겠다고 했다.

중고시장에 내 놓을 앨범을 추리며 남편에게 한 장 한 장 LP 제목을 읽어주다가 너무도 반갑던 음반을 보고 있노라니 삼십여 년 전 먼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아련한 기억 속의 열다섯 살 그때....


내가 대학 생활을 하기 전까지 서울이란 곳엔 연중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시골에 살았다.

고속버스를 타면 한 시간 남짓 걸릴만한 거리이긴 했지만 대문을 열고 나가면 온통 논과 밭인 '리'단위의 시골에서 사는 나로서는 별천지이고, 꿈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열다섯 시골 소녀의 가슴에도 사춘기가 찾아왔고, 좋아하는 가수도 생기게 되었는데 그 순진한 소녀의 가슴에 불을 지른 연예인은...

저 머나먼 나라에 사는 '뉴키즈 온 더 블록'의 막내 '조셉 맥킨타이어' 오빠였다.

없는 용돈에 오빠의 사진, 브로마이드를 사다 시골 소녀의 방에 덕지덕지 벽지처럼 붙여놓고는 오빠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오빠를 보며 잠이 들었다.


달리 학원이란 곳을 생각하지 못하는 시골 소녀는 미국에 사는 오빠와 언젠가는 만날 그날 

의사소통을 위해 '오성식의 팝스 잉글리시'를 듣겠다며 새벽에 일어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이마이 카세트를 꺼내 이어폰을 꽂고, 시골 버스를 타고는 군내에 있는 학교에 등교하곤 했다.

하교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오빠들의 CD 속지에 씐 가사집을 보며 영어사전에 형광색칠을 하며 독해를 하고, 오빠들에게 어설픈 영문 편지를 썼으나

'I love you'가 주를 이룬다.


그 당시 오빠와 나의 사랑이 이루어지겠는지의 징조를 알 수 있는 기막힌 판별법이 있었으니... 2~3교시쯤 쉬는 시간, 일찍 도시락을 까먹고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땡!' 울리면, 연습장이 가득 차도록 하트를 진하게 그려넣고, 새로 끼워 넣은 샤프심을 끝까지 길게 빼고는 하트 안을 조심스럽게 색칠해 나가는 행위였다.

그 샤프심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부러지지 않는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마치 주술 행위와도 같았던 그 퍼포먼스를 할 때면 나는 한껏 예민해져서 남자아이들이 옆을 지나갈 땐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지나가곤 했다.

다섯 명의 멤버가 서로 겹쳐지지 않게 각 멤버를 점찍어 놓고 영희도, 순희도 집중하며 색을 칠하곤 했다.


가난한 우리 집엔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었기에

오빠들의 신상 뮤직 비디오를 보기 위해 친구들의 집을 방문했어야 했는데 그중에는 통일교인인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의 집에 가게 되면 문선명 교주 부부 사진이 벽에 걸려있는 생경한 풍경에 낯설었고, 원리강론을 읽어보라며 포교하는 그 친구의 말에 나는 절대 하나님과 조셉 오빠를 버리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다지곤 했었다.

 친구의 사촌이 뉴키즈 팬인데 서울에 살고 있으며 비디오테이프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기에 기꺼이 고속버스를 타고 알지도 못하는 그 친구의 사촌 집에도 따라 갔었는데 그 사촌은 영파여중에 다닌다고 했다.

다닥다닥 붙어 옆집 소리가 빤히 들릴 것 같은 빨간색 양옥 집들이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이고도 획기적인 소식이 들렸으니 '뉴키즈 온 더 블록, 내한 공연'기사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해댔지만 시골 소녀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티켓값이 어마어마했다.

가난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서울 어디에서 표를 구하는 지도 모를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소녀였다.


그러나, 그래도, D-day!!!


'그래.... 표는 못 구했지만, 돈은 없지만, 오빠가 온다는 올림픽 경기장에 발이라도 들여보자!'


5교시가 끝나고 청소를 마친 후 보충 수업이 있었지만 난 보기 좋게 세 명의 친구와 학교를 빠져나와 그 중 한 친구의 집으로 갔다.

그 한 친구는 군내에 살며 당시 소나타라는 자가용이 있을 정도로 내가 보기에는 부잣집이었고, 고등학생 언니가 있어 신문물을 많이 알고 있었다.

7만 원이나 하는 S석 표를 언니와 동생이 나란히 확보하고 있었고, 나머지 통일교 신도인 친구와 나는 무작정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그날이 대보름이라 친구 집에서 주시는 오곡밥을 먹고는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으로 몸을 실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올림픽 경기장에 도착하니

 

'와~!!!'


나는 실물로는 처음 보는 수많은 인파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경기장은 내 상상보다 훨씬 넓었다.

전화기가 없던 시절, 고등학생 언니와 자매인 친구와 우리 둘은 만약 공연을 보고 나면 여기서 만나자며 큰 조형물을 가리키고는 그 자매는 먼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어둑해진 공연장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잠시 후... 어떤 남자 두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스포츠 머리에 청바지, 청자켓을 입고, 나로서는 아연실색할 귀걸이를 한 남자가 A석 티켓을 삼만 원에 팔겠다며 사겠느냐고 물었다.

만오천 원이 전부였던 나는 아쉬운 마음뿐이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대뜸


"네!!! 제가 그럼 살게요!!"

라는 것이 아닌가.....


'그럼 쟤는 삼만 원이나 있었나보네...'


하는 묘한 배신감과 비참한 감정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그런 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이내 친구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공연장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젠 정말 캄캄해진 경기장....

휴대폰도 없고, 가는 길도 모르는 순박한 열다섯 시골 소녀는 그 넓은 경기장에 그렇게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갈 길을 모른 채 주위를 서성거렸다.

안에서는 무슨 일인지 함성 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그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난 그 자리를 곧 떠나야만 했다.


고속버스 터미널을 찾아, 끝없이 두 볼에 흐르는 눈물에 앞이 어른어른했지만 어딘지 모를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넌다.

너무 추운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쑤욱 넣고서.....


주체할 수 없도록 눈물을 흘리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불빛이 반짝이는 아파트들을 보며 나는 언제쯤 저런 멋진 집에 살 수 있을까...

너무도 간절하고 부러웠다.

저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다행히 터미널에는 도착했지만, 버스를 타고서도 흐르는 눈물은 주체할 수 없었다.

고속버스에서 내려서도 덜컹거리는 시골 버스를 한 번 더 타고 삼십 분이나 더 가야 하고, 정류장에 내려서도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캄캄한 시골길을 십여분쯤 걸어 집으로 들어갔을 때 남의 속도 모르고 엄마는 반색을 하며


'아이고, 무사히 잘 와서 다행'

이라고 했다.

그리곤 공연장에서 지금 사람이 깔려 죽어 콘서트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듣고도 믿지 못할 얘기에 얼른 방으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켰다.

너무나도 흥분한 팬들에게 깔려 앞에 있던 사람이 압사를 당했다는...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다음날이 되어 학교에 가니 어제 같이 공연장에 갔던 친구들이 피곤에 절어 책상에 엎드러져 있었다.

늦게서야 공연을 시작했고, 소나타를 몰고 서울까지 오신 친구의 아버지가 친구들을 모두 함께 태워 오니 새벽 서너 시쯤 되었다고 했다.


그 후 상처가 너무나 컸던 나는 오빠들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시들해졌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며 한국 비하 발언을 했다는 '카더라' 소식을 듣고는 이게 오빠를 잊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라며 열병과도 같았던 나의 첫 빠순이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삼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소녀는 훌쩍 어른이 되어 그만한 나이의 딸이 생겼고, 올림픽 경기장에서 도보로 십여분이면 닿는 거리의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사를 오게 되었지만, 추억의 LP 재킷을 보며 단발머리에 웃음 많고, 수다스럽던 그 쪼그만 열다섯 소녀 생각에 빠져들어 빙그레 웃음이 배어 나왔다.


어쩌면 내 딸이 이다지도 극성맞은 것은 지난날의 나의 모습의 업그레이드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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