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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Dec 11. 2023

혁명이 분화하여 배가 될 때...

때는 2015년 5월...

대부도로 가족 여행을 떠나 아이들과 전망대를 올라가기 위해 줄을 섰을 때...

갑자기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왔다.

생리증후군이겠거니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와 오매불망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정일이 일주일이 지났으나 그분은 오시지 않았다.


이미 우리 부부는 아들, 딸 구별 말고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결심과 각오가 있었고,

2015년 그 당시 우리는 연연년생의 10살, 9, 8살인 2남 1녀의 환장적인 가족체계가 이미 구성되어 있었다.


이상한데???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손을 부들부들 떨며 테스트를 시작하고 시약선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던 그때....


내가 잘못 본 건가??? 벌써 노안이 왔나??

명한 두 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여보..... 나 테스트해 봤는데...."


라며 말을 잊지 못하자


"그렇게 됐단 말이지?"


라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십 대 아이들이 사고 쳐서 아이를 가진 것처럼 많은 걱정이 따랐다.

경제, 양육, 시선 등등.......


"여보, 우리 어쩌지??"


"뭘 어째, 그런 말은 가 결정해야 할 때 하는 말이야. 이게 결정할 일이야??"

(그래,  내 남편이지? ^^)


그 후 시작된 본격적인 임신증상이 나타났고,

오렌지가 먹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날저녁 시각장애인인 내 남편은 눈으로 보고 고를 수도 없는, 어딘지도 모를 곳을 찾아 천금 같은 오렌지를 사 들고 들어왔다.


친정 엄마는

'조금만 애들 키우면 중학생이 되고 이제 곧 니 인생을 살 건데 이게 무슨 일이냐'

하셨고, 그 당시 암투병 중으로 수술 후 요양병원에 계셨던 시어머니는 뱃속에 딸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행복해하셨다.


우리 딸 정일은 1월 13일...

아이들과 가족회의를 열어 태명을 정하기로 했다. 당시 아홉 살이던 둘째 딸이


"엄마, 우리 아기 태명은 '자가'라고 해요"


"왜?"


"우린 교회를 다니니까 십자가라는 뜻으로요..."


"그럼, 우리 아기 성이 십씨야?"


라는 대화가 오가며 고심 끝에 우리 둘째가 '햇님'이라는 예쁜 태명을 지어주었다.

그동안 우여곡절 끝에 이사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아기 물건을 얻어놓기도 하고 선물도 받으며 아기를 맞이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어머님을 뵌 후 집으로 가던 중 건널목을 건너려고 비탈진 길에 서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마른 솔가지를 밟고 그대로 미끄러져 대자로 뻗어버렸다.


'아..... 너무 부끄럽다....'


그런데 부끄러움도 잠시...

양수가 터진 건지 아래가 뜨거웠다.

당장 병원에 달려가 덜덜 떨며 얘기하고, 검사를 하니 자궁 수축이 왔다고 했고, 천만다행이긴 했지만 뜨뜻한 그것은 양수가 아니라 소변이었던 것이었다...

대로변에서 대자로 뻗었을 때보다 더 한 부끄러움이 내 온몸을 감쌌다.


집으로 돌아와 연연년생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나름 절대 안정을 취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던 며칠 후 새벽, 배가 살살 아픈 것이 설사가 나왔다. 그때 시간 새벽 세시 반...


'뭘 먹고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다시 잠을 자려는데 또 다시 배가 아파왔다.


'뭘 먹고 이러지? 뭐야?? 나도 모르게 소변도 봤어? 정신이 나갔네... 시도 때도 없이 소변을 보고....'


라며 대충 샤워를 하고 다시 누웠는데 불현듯.....


'헉! 내가 지금 진짜 진통이 오는 건가?'


그때는 12월 13일, 아직 출산 예정일이 한 달이나 남아있는 상태였다.

다시 화장실에 가서 확인 해 보니 미끌미끌한 그것은 소변이 아니라 진짜 양수였다.


'어머... 나 어쩌지?' 


'그럼 보름만 살고 아기가 두 살이 되는 건가?' 


'그리고 예정일이 방학이라 괜찮았는데 학기 중에 아기를 낳으면 누가 일일이 세 아이들 알림장을 봐주고, 준비물을 챙겨주지??'


'그럼 오늘 이후로는 누가 아이들 학교를 보내지??'

 

하는 생각에 지금 당장의 진통보다 불보듯 뻔한 내 앞의 현실이 더 걱정이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벌떡 일어나 그 전날 뒤늦게 나온 그릇을 설거지 하고, 아기에게 상처가 날지도 모르니 손, 발톱을 깎고...

물론 그때도 진통이 느껴지고 양수는 조금씩 세고 있었지만 생리대를 착용한 채 남은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느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고, 병원 짐가방을 준비하는 등의 소소한 집안일을 마쳤다.


그렇게 어느덧 자질구레한 정리가 끝났을 새벽 다섯 시 반쯤...


"여보, 나 양수 터졌어!!!!"


라며 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우니


"헉!! 어떡해!!!!"


하며 남편은 번개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머리에 새집을 짓고 일어난 남편이


"어떡하지???"


하더니 이내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여섯 시쯤 아이들을 깨우러 방으로 들어갔다.


"얘들아, 일어나 봐, 오늘 아무래도 동생이 태어날 것 같아"


라는 말에 잠결에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세 명이 쪼르륵 일어나 이불을 스스로 개고, 옷을 갈아입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이들 아침밥을 차려주며

"얘들아, 엄마, 아빠 동생 만나러 병원 갈 테니까

먹고 난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두고  학교 잘 다녀와~~!!"


라며 겨울 새벽, 양수가 흐르는 나는 남편과 함께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가서 일단 아기 몸무게가 중요하니 체중을 재 보자 하셨고, 다행히도 2.6킬로쯤이어서 인큐베이터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되겠다고 하셨다.

한시름 놓고 진통을 겪고 있는데 느닺없이 무통주사를 맞으시라며 들어왔다.


'무통주사?? 요즘엔 이게 추세인가?'


10년 전엔 원하는 사람만 간간히 맞았고, 권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냥 쌩으로 견뎌야 되는 줄 알았는데 나도 한 번 맞아볼까?

등의 뼈와 뼈 사이에 들어가는 주삿바늘의 느낌이 얼굴이 확 일그러질 정도로 영 별로였다.  

그런데 무통주사라 그런지 정말 무통 하기는 했지만 아래에 감각이 없는 듯했다.


'이러다 힘을 줄 수는 있나?'


"요즘 신여성들은 이걸 맞는단 말이지? 세상 참 좋아졌네...'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이제 정말 아기가 나올 시간인가 보다.

이제부터는 무통주사고 뭐고, 나와 아기가 온전히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다.


그제서야 담당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시며


"아니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연락받고 부랴부랴 긴장하며 달려왔어요.

지난번 넘어져서 그런 거죠?"


라고 하셨다.


점점 진통이 거세지고, 마징가제트처럼 온몸이 분리되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십 년 보다 근력이 줄었는지 무통주사를 맞아서인지 힘이 안 주어지고 남편은 옆에서 왜 힘을 못 주냐며 안타까움인지 뭔지 모를 소릴 해댔다.


일곱 시에 병원에 왔는데 12시 9분쯤 드디어

"응애~ 응애~"

우리 아기 소리가 들렸다.

다른 병원은 안 그랬는데 시각장애인인 남편에게도 탯줄을 잡고 자를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남편에게 탯줄 한 부분을 잡게 하고, 이 지점쯤 자르면 된다고 가위를 쥐어주었다.

바로 따뜻한 물을 준비해 아기를 씻겨 보라고도 해 주셨다.  


아기를 낳고 2박 3일간 내가 병원에 있을 때까지 연연년생 삼 남매 등교를 위해 81세 된 건강이 시원찮은 친정 엄마를 부르는 무리한 부탁을 해야 했다.

퇴원 후 나는 집에 가서 산후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 삼 남매를 키우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극구 반기를 들었다.


"지금 집에 가면 이 추운 겨울에 아이들이 조심성 없이 문 열고 들락날락하면서 문이 열린 채 그냥 나가고 당신도 아기도 다 절단 난다. 이번이 마지막이니 제발 이번만큼은 조리원에 가자"

는 말에 병원 위층에 있는 조리원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애가 저 애를 고발하고, 저 애가 그 애를 탄원하는 전화를 받으며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은 충동을 너무나도 많이 느꼈다.


열흘간의 너무나도 길었던 조리원 생활을 끝내고 크리스마스에 아기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삼 남매는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아기를 보겠다고 난리들이었다.

마치 인형을 안고 들어오는 것 같았단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이면 아기가 깨어나기만을 간절히 원하는 언니, 오빠들이 매일 명절처럼 얼굴을 이 사람 저 사람이 들이밀며 서로 보겠다고 싸우고 때리고 울고...

학교에 가도 아기가 보고 싶어 얼른 달려오고 아기가 보고 싶어 일부러 깨우다 혼나고....

아기를 낳기 전엔 걱정만 한가득이었는데...

이렇게 예쁜 넷째 안 낳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2남 2녀의 가족 구성원으로 재정비된 우리 집...

우리 막내가 태어나면서 마침내 잃어버렸던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진 것 같은 이 행복함....


이제는 중학생이 된 우리 큰아들이 어린이집에서 막내를 하원시키며 비가 오면 자기 점퍼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그고는 안고 데리고 온다.

사춘기 언니가 친구들과 우정 선물로 주고 받았다는 기초 화장품을 몰래 꺼내 구석에서 엉망을 만들어 놓아 언니가 소리를 지르다가도 아기가 울면 아기를 안고 달래며 자기도 속상해하며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아기도 엉엉 울고 그 습마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내 남편을 만나 예쁜 가정 이루고, 천사 같은 우리 아들 딸 낳아 기르는 지금...


힘들지만 이것이 행복인 걸까?


이 글은 지금은 없어진 "송파맘들 오세요!!" 카페에 2019년 10월 11일 본인이 쓴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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