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들바람 Mar 15. 2024

1막 15장. 또 다른 지옥

적성에 맞지도 않게 밖에 나가 일을 하는 대신 작은 단칸방이라도 쓸고 닦고, 작은 수돗가에 쭈그려 앉아 손빨래를 하는 아녀자의 삶.... 그만으로도 엄마는 마음의 안정을 찾는 듯했다.

또한 십수 년을 삭막하고 외롭게 살았던 남자.....

그러나 이제 궂은 막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준비해 둔 따뜻한 밥과 찌개를 먹으며 그날의 고단함을 보상받을 수 있다.

그것뿐인가.... 아직 귀여운 태를 벗지 않은 어린 딸내미가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는 모습을 보노라면 척박하고 메마르던 그의 삶에 단비가 내리는 듯했다.

그럴수록 전 부인을 닮은듯한 자신의 친딸과 어린 새 딸을 비교하며 가뜩이나 못마땅하던 큰딸을 못살게 괴롭힌다.

자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어보면 언니가 엉엉 울며 말대꾸를 하고, 급기야는 아저씨가 언니의 얼굴에 큰 육각 성냥갑을 집어던져 안에 있던 성냥들이 우수수 쏟아지거나 무거운 메밀배게던 뭐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며 육두문자 욕을 하는 광경이 거의 매일이다.

내가 보기에도 사람이 이러고 어떻게 살겠나 싶을 만큼 들들 볶아대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공부를 못 해서 전교에서 꼴등을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긴 열다섯 살이 되었어도 조금 멋쩍기는 해도 나와 종이인형 놀이 상대가 되는 것이 나로서도 이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언니는 경도의 지적 장애가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른들은 아무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단순히 게으르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옥에서 사는 듯 힘들어 보이는 언니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안식처는 교회인 듯했다.

언니를 따라 종종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한다며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고 있다가도 흐느끼는 소리에 이내 눈을 뜨고 가만히 언니를 쳐다보게 된다.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까...

쉴 새 없는 눈물이 언니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며 콧물과 함께 범벅이 되어도 언니는 그것을 손이나 휴지 따위로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절규에 가깝도록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면 매일밤 아저씨에게 폭력을 당하는 언니의 고통과 원망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 내 가슴도 저려온다.

육 개월쯤 지났을까? 학교에 다녀온 어느 날 한참이 지나도록 언니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 언니 어디 갔어?"


"언니는 즈그 이모가 와 가 언니 옴마한테 데꼬 갔다"


"정말? 그럼 이제 언니 안 와?"


"그래... 인자 옴마한테 가서 산다 카드라"


"그렇구나.... 언니는 잘 됐네..."


생각도 못했던 언니라는 존재가 생기자 괜한 짜증도 어리광도 부렸었지만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교회도 가고, 가게도 가고 같이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도 하며 나쁘지만은 않았는데....

허전하지만 언니가 기도한 대로 지옥 같은 아빠에게서 벗어나 언니가 원하는 곳으로 간 것이기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언니가 가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언니도 없는 밤인데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을 깬다.

누운 자리에서 겨우 눈을 떠 위를 바라보니 엄마와 아저씨가 마주 보고 서서 언성을 높이고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아저씨가 팔을 뻗어 두껍고 억센 손으로 엄마가 날아갈 정도로 힘껏 뺨을 때렸고, 엄마의 입 안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밖으로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피.... 피라니... 나는 당장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엄마 성격도 보통은 아닌지라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긴 손톱을 세워 아저씨의 얼굴을 할퀴고 멱살을 잡고 옷을 쥐어뜯자 셔츠의 단추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하게 굴러가다 멈추어 선다.

그러자 아저씨는 엄마의 머리를 벽에 찧어대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컥컥 거리며 발버둥을 친다. 엄마를 구해야만 한다.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가 죽어요!!!"


모두가 잠든 밤, 방문을 열고 비명에 가깝도록 외치자 엄마의 목을 조르던 아저씨는 나를 힘껏 끌어 벽에 부딪치도록 밀어뜨렸다.

엄마는 왜 애한테 그러느냐며 죽기 살기로 덤벼 들었고, 아저씨는 세상에서 처음 들어본 저주의 욕을 하며 양손으로 엄마의 따귀를 이리저리 쉴 새 없이 때려댔다.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심장이 뛰고 바들바들 떨리는 그날의 두려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괴롭힘의 대상이었던 언니가 없어지니 그동안 그가 숨기고 있었던 폭력적인 성향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엄마에게 사흘이 멀다 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뒤틀리고 왜곡된 감정을 아무렇게나 배설할 수 있는 쓰레기통이 필요할 뿐이다.

아저씨는 매일밤 귀신 들린 주술사처럼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마음껏 풀어냈다.


'열손가락 마디마디를 칼로 썰어 다 끊어놓겠다',


'모가지를 비틀어 도마에 올려놓고 도끼로 찍어버리겠다'


너무도 겁에 질린 나는 도루코 칼부터 컴퍼스 따위의 날카롭고 뾰족한 모든 도구를 모아 종이로 둘둘 말아 철제 책상과 벽 사이의 좁은 틈 속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나눠준 구구단이 씐 제법 두꺼운 도화지 뒤에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써 두고 싸움이 시작될 때마다 벽을 보고 누운 채 그 문구가 씐 도화지를 들고 기도인지 주문인지 모르게 수도 없이 외워댔다.

그러나 광기 어린 그들의 악다구니에 가려져 나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느 날은 주인집에서 거실에 난 방문의 유리를 통해 싸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보고 부디 어떻게든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려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어떤 날은 이렇게는 못 산다며 내 손을 잡고 나가려는 엄마의 머리 끄덩이를 억세게 잡아끌어 욕설을 퍼붓고 더 심하게 때리곤 했다.

정말 강도 높은 지옥이다.


내가 느끼기에 아저씨는 이 무시무시한 지옥을 좌지우지하는 마귀 대장쯤으로 느껴졌다.

언니가 떠나기 전 놓고 간 '기도하는 소녀'가 그려진 동그란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아이는 뭘 기도하고 있는 걸까? 나처럼 이렇게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나는 걸까?

그러다 문득 압력밥솥 고무 패킹처럼 생긴 액자의 검은색 테두리를 벗겨내고 그 사진을 덮어씌운 볼록한 유리 안에 있던 사진을 드러내니 그것이 구겨지지 않도록 둥그런 모양의 두껍고 빳빳한 누런 마분지가 아래에 덧대어져 있다.

나는 그 안에 '우리는 언젠가 악마(김용석)로부터 벗어날 것이다'라고 쓴 뒤 다시 본래대로 제 자리에 올려 두었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부적을 만들어 자신에게 닥친 화를 면하려 하는 인간의 본능이었을까?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떤 것이 이런 행동을 하게 했던 걸까?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행동에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누군가가 그것을 열어서 읽어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결코 그 액자를 치우거나 글씨를 지우지는 않았다.

꼭 늦은 밤에 싸우는 일이 많았기에 좁디좁은 단칸방에서 몇 시간이고 계속되는 그 무서운 싸움을 함께 느끼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아이는 거의 매일밤을 공포에 질린 채 잠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 폭력의 행위가 끝나면, 아니 정확히는 그 난리 끝에 아저씨가 술이 깨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말수 없고, 순박한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게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엄마와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철없는 내 눈에도 다 보일만큼 진실해 보였기에 그 황당함은 매일을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아저씨가 일 년 365일 중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을 마시고 그 기운이 떨어지면 손을 벌벌 떠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이다.  

무엇이 이 아저씨를 이런 괴물로 만들었을까...

왜 스스로 이 괴물의 형상을 벗어던지지 못하게 되었을까.....


엄마는 재혼만은 실패하지 않겠다고 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이미 실패한 재혼인데 그래서 제발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밖에 나가 또다시 밥벌이를 하는 것은 정말 자신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엄마도 아저씨의 성질을 조금이라도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싶지만 속에 말을 참는 성격이 아닌 엄마는 어쩔 땐 일부러 아저씨의 속을 긁어 싸움을 만들 때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다고 싸움을 걸지 않을 사람은 아니지만 매일매일 공포 속에 벌벌 떠는 자식을 생각한다면 한 번이라도 좀 참아주면 안 될까...

도대체 내 입장이란 생각하지 않는구나 싶은 생각에 이젠 엄마도 원망스럽다.






                    

이전 14화 1막 14장. 새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