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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Mar 29. 2024

1막 17장. 야반도주

곤한 잠에 빠진 나를 새아빠와 엄마가 조용히 흔들어 깨운다.

오늘은 깨워서까지 싸우는 모습을 생중계할 모양인가 싶어 어렵게 눈을 떠 보니 지금 당장 이 방을 빠져나가야 한다며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한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당황스럽다.  

어쨌든 이제 막 열 살로 접어든 2월의 찬 공기를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두툼한 솜점퍼를 걸치고 엄마 손에 이끌려 대문 밖을 나간다.

가로등도 없고, 달빛도 흐린 캄캄함 새벽, 그 보다 더 시커멓고 거대한 트럭이 괴물처럼 우뚝 서 있다.

트럭의 앞 좌석은 엄마와 내가, 아빠는 짐칸에 탄다.

운전수가 시동을 걸자 요란한 엔진 소리에 모두 깨어나 밖을 내다볼 것만 같아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트럭은 곧 기찻길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가 왼쪽으로 운전대를 꺾어 앞으로 쭈욱 내달린다.

너무도 졸린 나는 눈을 떠 보려 안간힘을 써 봤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또다시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떠 조수석에서 폴짝 뛰어 내려온다.

어스름한 새벽이지만 이곳은 내가 살던 도시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냄새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밟고 있는 땅은 시멘트가 아닌 흙길임이 분명하고 마주 보는 서너 채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내가 살던 도시의 골목과는 다르게 간격이 널찍하다.

양철 대문과는 다르게 둥그런 쇠 손잡이가 달린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니 어둠 속에서도 널찍한 흙마당이 어스름히 보이는 듯하다.

넓은 댓돌을 두세 번 올라가니 그리 좁지 않은 대청마루와 나뭇살에 한지를 바른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이 고르지 못한 장판은 아랫목에 탄 자욱이 선명한 썰렁한 방이다.

너무도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했지만 엄마가 급히 깔아 둔 이불 위에 쓰러져 다시 잠이 들었다.

내일 일찍 일어나 주위를 좀 둘러봐야겠다.


냉기가 올라오던 방이 어느새 뜨겁기까지 하고, 밖에서는 새의 지저귐이 들리는 것을 보니 아침이 밝은 듯했다. 방 안까지 나무의 타는 향이 진하게 풍겨오자 정신이 확 드는 듯하다.

문을 열어젖혀 비몽사몽 걸어 들어왔던 마당을 둘러보니 아직 추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흙마당의 움푹 파인 곳엔 살얼음이 얼어있기도 하다.

신발을 신고, 마당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집 뒤편엔 깨진 항아리와 멀쩡한 항아리 몇 개가 줄지어져 있고, 지붕 위 기와의 홈이 난 모양으로 물방울이 여러 번 떨어진 이유인지 좁고 일정한 간격으로 땅이 야트막하게 폭폭 파여있다.

부엌엔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과 물을 담아 쓸 수 있는 깊고 큰 빨간 고무통, 오래된 나무 찬장 안에 언제 다 정리를 마쳤는지 그릇이 반듯하게 엎어져 있다.

부엌 한편엔 누가 땔감으로 사용하고 남은 것인지 두껍고 큰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으며 한 옆엔 불쏘시개로 사용할 만한 솔가지들도 정갈하게 쌓여 있다.

대문 초입의 왼쪽엔 사랑방인듯한 또 다른 방과 그 옆으론 작은 부엌이 있는 것으로 봐선 살림을 살던 곳이었나 보다.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 불과 오늘 새벽까지 살았던 대전에서처럼 좁은 공간이다.

벽 모서리 구석구석에 거미줄이 쳐진 것을 보니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듯했다.

부엌 옆으로는 박물관에서 볼 듯한 쟁기며 호미 등이 보관된 창고가 보인다.

마당은 눈이 녹아 질퍽해져 신발에 진흙이 잔뜩 묻은 탓에 댓돌 모서리에 신발 바닥을 문지르며 흙을 떨어냈다.

다닥다닥 붙은 숨 막힐 듯한 도시의 삶보다 이곳이 마음을 놓고 살기가 훨씬 나을 듯하다.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지 상을 펴고 앉아 어리둥절한 이곳에서의 첫 식사를 한다.


"지금 사람들이 일어나가 우리가 없어진 걸 알고 즈그끼리 싸우고 난리가 났을끼다"


새아빠의 말에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눈이 동그래진다.

아무래도 동네 이 사람 저 사람, 이 가게, 저가게, 월세며 뭐며 감당 못할 빚을 많이 지고 도망을 나왔는가 보다.

어린 나였지만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이 확 느껴진다.

그들이 금방이라도 죽일 듯 싸우지만 결코 헤어질 마음이 없는 공동체 의식이란 이런 것인가?

이제 정말 같은 배를 타고 이곳에 몰래 들어와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참인가 보다.


그러나.... 개버릇 남 주나? 사람이 변하나?

또 이틀이 머다 하고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고, 이젠 자기들이 고학력자라는 어줍지 않은 잘난 체를 하며 시골 사람들에게 훈수질을 해 댄다.

밤이면 나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 가서도 둘이서 술을 마시고 같이 취해 소란을 부린다.

한 술 더 떠 엄마마저도 오밤중에 감정이 상한 이웃집의 철문을 발로 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니 동네 개들은 왕왕 짖어대고 부끄러움은 진정 나 혼자만의 몫이 되었다.

이젠 제법 친해진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고무줄놀이를 한다며 가위바위보로 편을 나누려 할 때였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 너랑 놀지 말래, 너네 부모 같은 사람이 키운 애랑 놀면 이상한 물 든대"


"맞아,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너네 새벽에 몰래 이사 왔다면서? 아마 도시에서 죄짓고 여기 몰래 들어온 걸거래 아니면 뭐 하러 새벽에 몰래 이사를 오겠냐?"


여기저기서 미처 대꾸도 못할 사실만을 얘기해 대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나마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쭈그려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계속 그렇게 앉았으려니 내 신세가 더 처량해 보여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아 얼른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빠, 엄마에게 내 이런 속상한 마음을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아니 왜 내 집에서 살고 있어요?"


"누구십니꺼?"


"나 이 집에 이사하기로 한 사람인데 여기 왜 살고 있느냐고요!!!"


"뭐라꼬예? 우리가 박 씨한테 계약해 가 이사 왔다 아임니꺼!!"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모르겠고요. 당장 짐 빼요. 내 이삿짐이 밖에 있잖아요"


"아니 잘 알도 몬하고 머라캐쌌노? 이거 우찌 해야 되겠노?"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에 내가 마루로 나가 서 있으니 머리가 약간 벗겨질듯한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반곱슬이 남자가 나를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짝다리를 짚은채 아빠, 엄마를 향해 따지듯 서 있다.


"그라모 이랄기 아이라 박 씨한테 가 봅시더"


아무래도 우리 집과 다른 집을 이중 계약을 한 모양인데 부동산이라야 딱 한 군데밖에 없으니 따질 곳은 한 곳뿐이다. 세 사람이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온 아빠, 엄마는 전후사정이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세간을 거미줄이 쳐져 있던 작은 방으로 옮기고 문간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혼자 사는 아저씨가 그 큰 본채를 덩그마니 혼자 사용하고, 우리 셋이 이 작고 좁은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 내 눈에는 불공평해 보이기도 했으나 어른들만 아는 그런 상황이 있다 하니 별 수가 없다.


평지의 흙길을 걸어 거리가 꽤 떨어진 학교에 간다.

양쪽은 산이고, 그 밑은 내가 흐르고, 다른 한쪽은 논밭이 즐비하다.

아이들은 그 지루한 길을 뭐가 그리 할 이야기가 많은지 끝없이 재잘대며 심심찮게 걷는다.

동네 어귀에 다다를 무렵엔 기찻길이 지나는 터널을 건너게 되는데 아마 이곳은 내가 살던 대전의 철길과 이어져 논산을 지나는 호남선로인가 보다.

친구들과 나는 한옆에 가방을 벗어놓고 미술 시간에 사용하던 스케치북과 물감을 꺼내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물통은 필요 없다. 그냥 흐르는 냇물에 붓을 가만히 담그기만 하면 깨끗하게 물감이 씻겨나가니 말이다.

때로는 머리 위 철길로 무거운 쇳소리를 내며 무궁화호니 새마을호니 색이 다른 기차가 속도를 달리하며 우리 머리 위를 지난다.

아빠, 엄마가 자주 놀러 가는 이웃집엔 고등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오빠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읽는 김소월이나 윤동주, 박목월 등의 시집을 틈나는 대로 읽었다.

그러곤 마치 내가 시인이라도 된냥 시구를 끄적거려 사람들에게 읽어주면 감탄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웃집에 가서도 아랑곳없이 둘은 할퀴고 뜯고 욕하며 싸움을 하고, 말리는 나를 공처럼 이리저리 굴리며 발로 차고 여하튼 지긋지긋한 둘의 싸움은 어딜 가나 지속되었다.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 밖을 나도는 일이 훨씬 좋다.

노을 지는 저녁 무렵 들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동네에서 술주정뱅이로 소문난 선예 언니네 아버지가 고주망태가 되어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한다.

된장찌개에 넣을 요량인지 밭에서 호박 한 개를 따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선예 언니 엄마가 취기가 잔뜩 오른 남편을 보더니 '이제 술 그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자'며 팔을 잡아끌자 다짜고짜 욕을 하며 억센 손으로 아내의 따귀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한 손에 들려있던 호박이 땅에 떨어져 데구루루 구르고 아저씨는 곧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어린 내가 말릴 재간이 없는 탓이기도 했지만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쿵덕거려 도망가듯 그 자리를 떠났다. 아닌 게 아니라 선예 언니는 그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집을 가끔 빠져나와 나처럼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가 보다.

갈 곳 없는 언니는 동네 교회의 기도실에 들어가 이슬을 피하는 듯했다.

찬 바닥에 방석을 아무렇게나 깔고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 예배가 시작될 때쯤 나가는 것 같다며 이웃들끼리 수군댔다.

이제 생리를 시작했지만 신변 처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탓인지 때로는 진한 자주 빛 방석에도 표시가 날 만큼 시커먼 피가 말라붙어 있기도 했다.

언니는 내 존재를 잘 모르지만 내 처지나 별반 달라 보일 것 없는 선예 언니가 내 눈엔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몇 년 후 내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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