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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Mar 08. 2024

1막 14장. 새아빠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다녔다는 과부가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딸아이 하나를 키운다는 사실은 뭇남성들에게 깨나 추근거림의 대상이었을게 분명하다.

또한 고생 한 번 해 본 적 없고 생활력도 없는 여자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미혼모가 되어 부양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은 또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장학사가 자주 온다던 그 식당엔 가정을 가진 남자가 대부분이었던지라 엄마에게 추파를 던지는 도 그런 조건의 사람들이었다.

그중 가끔 혼자 식당에 들러 말없이 국밥에 반주를 하고 간다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은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자 엄마에게 용기 있게 말을 붙여오더란다.

서로 대화가 깊어지자 엄마의 고향에서 약간 떨어진 동향 사람으로 낯설고 외로운 타지에서 듣는 경상도 사투리가 그간의 시름을 다 잊게 해 줄 만큼 정겹고 포근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서로 얘기가 오가던 홀아비와 과부는 외롭고 고단한 인생을 함께 의지하며 살아보자는 데까지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돈을 벌어도 어린 딸의 밥을 먹이기도 버거웠다던 엄마는 이것저것 재고 따질 여유도 없이 큰 가방 하나에 다 채워지는 짐을 서둘러 챙겨 담는다.

그리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던 지긋지긋한 여관을 도망치듯 떠나온다.

결국 생면부지의 시간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은 어색한 남자의 집으로 급하게 들어갔다.


학교에서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으로 들어서면 드럼통 위에 걸쳐진 큰 가마솥 안에 찰랑찰랑 넘칠 듯한 뜨거운 기름 속에 침이 꿀떡 넘어갈 만큼 먹음직스러운 도넛이 둥둥 떠 다닌다.

아저씨는 기름을 가득 머금은 채 보름달처럼 둥글고 빵빵해진 갈색 빛 도넛을 쇠집게로 연신 건져낸다.

도넛 속에 든 소가 팥인지 공갈인지 먹어 본 적이 없어 알 길이 없지만 기름에서 막 건져 올린 뜨거운 도넛 한 개만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학년이 되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운 동네 어귀엔 기찻길이 머리 위를 지나고 그 아래 터널을 조금 더 지나면 내가 살 집이 나온다.  

주욱 이어진 담벼락으로 유리 미닫이문이 달린 가게와 녹이 슨 짙은 초록색 대문이 연달아 붙어있다.

그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그리 깊지 않은 골목 안에 엄마와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로 했다는 낯선 아저씨의 단칸방이다.

말을 하자면 마당 가운데 주인집이 있고, 마루의 오른쪽 벽으로 두 개의 방이 붙어 있는데 하나는 무속인이 살고 있어 꽹과리와 징 소리가 자주 들리고 나란히 붙은 또 하나의 방이 새아빠인 아저씨가 사는 단칸방이다.

우습게도 나무문 위쪽 중앙엔 약 30 ×20센티 크기의 길쭉한 유리가 있어 주인집 거실에서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생활 보호가 전혀 되지 않는 방이다.

낮은 삼단 서랍 위에 고장 난 흑백텔레비전을 올려 주인집과 방 사이의 문 앞에 두어 경계를 짓고자 했으나 유리문을 가릴만한 높이는 아니어서 큰 의미는 없는 듯했다.

마음만 먹으면 문을 열고 들어 올 수 있을만한 구조였다.


그 반대편으로 방문이 있어 그 문으로 세입자가 출입을 하는데 위에는 천막 지붕이 쳐져 비를 막고, 왼쪽엔 문도 없이 뻥 뚫린 부엌과 그 앞엔 쭈그려 앉아 이용할 수 있는 작은 수도가 있다.

앞은 다른 집 담벼락이라 옆집 소리가 고스란히 방 안에서도 들린다. 그러니 대문 쪽에서 바라보면 깊지 않은 골목과 같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문을 열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작은 방 왼쪽 벽엔 검정 바탕에 자개가 박힌 유물과도 같은 장롱이 벽 한쪽이 꽉 차도록 가득하고 장롱이 끝나는 문 앞엔 작은 텔레비전이 주인집 문 앞에 놓여있다. 그 옆으로는 앉은뱅이 철제 책상이 꽉 끼어 있으며 그 옆으로 오른쪽 벽면엔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작디작은 다락방 문이 보인다.


그곳에서 나와 일곱 살 터울의 중학생 딸과 아저씨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우리 두 명까지 그 좁은 방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니 세 명은 꽉 끼어 눕더라도 한 사람은 발 밑에 가로지어 누워 자야 하는 형국이다.


이사 오기 전 어느 날 체기가 있었던지 머리가 아프고, 구토가 나서 조퇴를 한 적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친구더러 굳이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했다.

내 집이 여인숙이라는 것과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아무도 집에 데려 온 적이 없었는데 혼자 가겠다는 나를 친구는 내 가방까지 들고 데려다주겠다며 끝까지 따라왔다.

친구에게 사는 형편이 들통나며 통증이  달아날 만큼의 부끄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바뀐 이 공간도 여전히 친구를 데려 올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딱 봐도 내가 원하던 삶과는 거리가 먼데다 낯선 언니와 아저씨를 하루아침에 가족이라며 '아빠'라 불러야 한다니 도대체가 마음이 열리지 않아 '아저씨'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아빠'라고 부르라 하지만 당장 처음 본 아저씨를 '아빠'라 부른다는 것도 언어도단이다.

나에게는 그를 아빠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아저씨는 어릴 때 꽤나 똑똑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느니 마느니 하다 육군사관학교로 들어가 전교 1등으로 졸업을 하게 됐단다.

전교 3등까지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보직을 맡을 수 있어 아저씨는 수도 경비사령부에 가기를 원했고, 이십 대 초반에 다이아몬드 한 개, 소위 배지를 달고 군부 시절이었던 그 당시 비교적 화려한 인생의 문을 열게 되었다고 했다.


융통성이라고는 한 치도 없던 아저씨는 상명하복의 군 생활이 자신의 적성에 잘 맞았고, 여러 여자들과 맞선 자리가 있었으나 어쩌다 인연이 닿게 된 다방 마담의 딸과 결혼을 하고 그 사이에 일남 일녀의 자녀까지 두게 되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며 결혼한 두 명의 형들이 재산을 모두 차지한 탓에 어렵게 자수성가하여 안정된 가정을 이루었으니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도 서로의 이상이 맞지 않으니 오래지 않아 갈등을 겪기 시작했지만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기대어 간신히 부부의 명맥을 이어갔다고 했다.


그 당시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파된 김신조 외 31명의 무장공작원 일당을 소탕하는데 한몫했던 아저씨는 다이아몬드 두 개의 중위까지 진급하며 성공적인 군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지 직속 부하가 업무 중 만취 상태에서 군용 지프차를 몰고 가다 민간인을 치어 죽인 탓에 그 책임으로 직속상관인 아저씨가 군복을 벗게 되는 불운을 맞게 되었다.


그의 지위와 명성이 사라지자 간신히 부부의 연을 이어가던 아내는 자신이 보고 자란 대로 다방을 꾸렸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아내가 자신의 눈앞에서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이혼을 했고, 모아둔 돈 일부를 들고 전라도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14년을 무위도식하며 살았던 듯했다.

결국 돈이 떨어지며 육지로 나와 어디서 기반을 잡아야 하나 고민하던  잠깐 군 생활을 했던 대전에서 일용직 막노동을 하며 밥벌이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원치 않은 운명에 내몰려 쓰라린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던 아저씨와 엄마가 만나 비슷한 처지와 같은 지역의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며 더욱 의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집에 들어와 산지 며칠 지나지 않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아저씨가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는 등 외출 준비를 하는 듯했다.

딱히 약속이 있다는 말도 없었는데 어디 가느냐 물어보니 마당에 있는 공동 화장실에 간다고 했다.

아홉 살 어린 나였지만 현실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쩍 벌어졌다. 겨우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데 와이셔츠에 넥타이라고????


이렇게 사회성도 융통성도 없는 사람이라니....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삶을 예고하듯 한 기가 막힌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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