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도 신용카드 대금이 상당하다
월급을 타도
신용카드 대금이 빠져나가고 나면
통장잔고는 늘 바닥이다
무수동 종갓집 사모님한테서
''김장김치를 언제 가지러 올 거냐''는 전화를 받고는
오늘도 어김없이 핸드폰 지갑에
신용카드 한 장을 챙겨 넣는다
시동을 거는데 오래된 차의 시동이 시원치 않다
밤 새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져 버렸고
설상가상 길까지 미끄럽다
긴장한 탓에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운전을 해서 45분쯤 가다 보니
무수동 마을 입구가 보인다
마을 어귀에는 미끄러지지 말라고
그 누군가 연탄재를 뿌려놓았다
그 연탄재를 보니
어린 시절, 엄마의 월동준비가 떠 오른다
엄마, 아버지, 우리 6남매에, 친할머니까지,
아홉 식구의 입은 무섭다
마당 한 켠의 작은 목욕탕과 뻘건 고무다라이(고무대야) 통 안에는 200~300포기의 배추가 절여지고 있었다
친한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모두 모여 김장을 하고 나면 엄마는 몇 포기를 따로 양은냄비에 챙겨서는 동네에서 제일 힘들게 사는 연호네에 갖다 주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김장이 끝나면 그다음에 하는 일이
연탄을 들여놓는 일이었다
블록으로 만든 연탄창고에는 꽤 많은 양의 연탄을 쌓을 수 있었다
연탄 아저씨가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여러 번을 왔다 갔다 하고서야 연탄창고가 서서히 차고 있었고,
그 긴 시간 동안
엄마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흐뭇하게 쳐다보고 계셨다
두툼한 연탄값을 연탄 아저씨께 쥐어주고 돌아서며
옷에 묻은 연탄 먼지를 탁탁 털어내던 엄마의 얼굴은 무척 행복하고 넉넉해 보였다
''야들아~ 이젠 겨울준비 끝이다~''
둥그런 상에 둘러앉아 동태찌개를 맛있게 먹던 초겨울의 풍경.
이렇게 온 가족과 동네 사람들의 손을 빌려
해 먹던 김장김치를
요즘은 전화 한 통이나 모바일 앱으로 간편하게 주문해서 먹는다
나는 손맛 좋은 종갓집 종부가 직접 담가주는 김치를
직접 사러, 연말마다 무수동엘 들린다
'' 이것.. 카드로 결제해도 되지요?''
맛깔스러운 김장김치 속의 노란 꼬갱이를 손으로 떼어서 먹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본다
''에휴~사모님~이것 재료가 좋아서 카드로 하면 남는 것도 없슈.. 통장번호 줄 테니 천천히 보내줘유~''
아뿔싸~!!
카드대금 다 빠져나가고
보험료에, 각종 공과금까지 빠져나가서
통장이 거의 비어있을 텐데,, 돈으로 보내달라니..
김치를 한꺼번에 쓸데없이 너무 많이 샀나?
나눠서 조금씩 살 걸..
덜컥 일을 저지르는 성격을 탓하며
여기저기 돈을 긁어모아 김장김치값을 겨우 보내고 나니
뒷자리에 싣고 오는 김치가 갑자기 짜증스러운 존재로 다가온다
시대가 바뀌어서
집에서 하던 김장을
솜씨 좋은 분의 손을 빌려 편하게 사 먹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지만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현금지출이 생기니
참으로 난감한 기분이 든다
부모님 시대에 비해 생활의 편리함이나 환경이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한 편으로 나의 삶의 질은, 엄마의 젊은 시절에 비해
훨씬 떨어진 것 같다
신용카드도 없던 시절에 울 엄마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가끔씩 생각했었다
뭐 하나 장만하고 싶어도 현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던
그 시절ㆍ
그래도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작은 월급을 쪼개어
조금씩 저축해서는
그 비싼 자개장롱도 사고,
1000장이 넘는 연탄도 연탄광 가득 들여놓고,
2~3접의 김장을 척척 해내면서 우리 6남매를 키워내셨는데.
나는 꼴랑 몇십 킬로의 김장김치값을 부담스러워하고,
아파트 관리비를 날자에 맞춰 내기를 버거워하면서도
친구들이 ''우리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갔다 올까?''이런 얘길 하면 덜컥 약속을 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생각지도 않고 조금씩 쓰다 보니
수입보다 지출이 커져 있을 때가 많고
그럴 때마다 계획 없는 나 자신을 반성해보지만
이미 나는 신용카드라는 매직에 흠뻑 빠져있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쪽하늘로 지는 해가 아름답다
내 인생의 황혼도 이미 가까운 곳에 있다
내 인생도 서서히 겨울을 향해 가고 있는데
인생의 월동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