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쓴 사람보다 읽는 사람이 주인이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 (----) ”
< 가을의 기도 / 김현승 >
자전적 소설을 쓰는 시인 친구가 있다. 가끔 전화로 토막토막 중간 보고 한다. 자기가 해온 작업을 자랑삼아 되돌아보는 과정인 듯하다. 어렸던 시절, 까마득한 옛일을 어떻게 기억해 낼까? 그는 자신도 놀랜다고 말한다. 글을 쓰다 보면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옛일이 살아 돌아온단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신비한 능력’일까.
나는 ‘자서전 쓰지 않고 자전적 소설 쓰기를 정말 잘했다’라고 친구를 칭찬했다. 자서전 쓰려면 잘한 일 침소봉대하고, 잘못한 일은 감추다 거짓말도 하게 되는데,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억지춘향식 기록을 남기느니 마음대로 상상을 펼쳐 꿈꾸는 찬란한 인생기록을 남기는 일이, 자신에게나 후손들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누군가는 소설로 인생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난 무슨 기록을 남기고 있나? 매일 빼지 않고 써온 일기장을 들춰본다. 애송시를 필사해놓은 날도 많다. 토막 시구들도 보인다. “(---) 그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 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 만남 / 이성복 >” “북극을 가리키는 / 지남철은 / 무엇이 두려운지 / 항상 바늘끝을 떨고 있다 < 떨리는 지남철 / 신영복 >”
시는 쓴 사람보다 읽는 사람이 주인이다. 기도 같은 시구가 인생가을을 채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가을의 기도 / 김현승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