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쁨 Oct 20. 2022

도해(渡海)

홋카이도 -01

황혼이 눈더미에 비스듬히 쬐어 수그러드는 저녁 무렵 아오모리에 닿았다. 대지에 쌓인 눈과 대기에 놓인 구름이 대칭을 이루어 마치 몽실몽실한 크림빵 안에 있는 듯한 기분을 자아냈다. 혼슈에서 홋카이도로 도해하는 선박들이 머무르는 아오모리 항에 가까워지면, 맑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얼마 만에 보는 바다인지 몰라 들뜬 마음에 발걸음도 구름 위를 걷는 듯이 가벼워졌다. 

▲ 겨울이 찾아온 아오모리.


정들었던 혼슈에서의 마지막 밤을 축하하고 싶은 마음에 저녁 식사에서 한껏 모양을 차렸다. 신선한 사시미와 뽀얀 국물이 끝내주는 시지미(재첩) 라멘을 호기롭게 주문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이튿날 날이 밝자 페리를 타기 위해 부둣가로 나갔다. ‘삐-’ 아니, ‘부웅-’ 에 가까운 둔중한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제보단 훨씬 쾌청한 하늘이 승선자들을 반겨주었다. 아오모리에서 홋카이도의 남쪽 항구도시 하코다테를 향하는 노선. 내가 탈 배는 대형 선박 급에는 못 미치지만, 웬만한 쾌속선들보단 크기가 커 보였다. 시원시원하게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뱃머리를 바라보며 갑판 위에서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했다. 4시간 정도 지났을까. 도착을 알리는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다 한 자락 건넜다고 밟는 땅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하코다테 항구에서 시내까지는 꽤 거리가 됐기에, 저녁 먹기 전까지 도착하려면 부단히 걸어야만 했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 모자가 몇 번이고 날아갔다. 검은색 바닷새들이 열 지어 활공하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하코다테는 전에 들렀던 고베의 마야산 야경과 더불어 일본 3대 야경으로 유명한 또 하나의 장소다. 또, 일본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 1위라는 기염을 토하고 있기도 하다.

▲ 하코다테 산 정상에서.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가장 먼저 개항한 도시 중 하나인 하코다테는 일찍이 서양의 문물이 흘러들어와, 이국적이면서도 화려한 기독교풍 건축물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코다테에 들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른다는 럭키 피에로. 오로지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수제 햄버거집이다. 솔직히 맛은 잘 모르겠지만, 가성비와 가게 분위기는 괜찮았다. 지금껏 수십 번이고 맞이한 일몰이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하코다테 산에서 만났던 낙조는 아직도 뇌리에 남아 경탄을 일으키곤 한다. 주홍색 태양이 도시 서쪽으로 넘어가면 고대하던 야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찬란한 조명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이고 그 뒤엔 달과 산과 구름이 병풍과도 같게 둘려 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넋이 나가 입을 벌리고 연신 감탄사만을 연발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누구라도 이런 환상적인 장면을 앞에 두면 ‘과연 가장 아름다운 야경이라 부를 만 하구나.’ 하고 생각할 만했다. 

▲ 하코다테에서 마주했던 풍경들.


삿포로로 출발하는 길, 눈송이가 포슬포슬 내리기 시작했다. 쌓인 눈은 봐 왔지만 직접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영하의 온도에 칼바람까지 맞으니 오금이 저릴 정도로 추웠다. 홋카이도 날씨는 변칙적이고 매서워서, 걷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겹겹이 껴입은 옷가지 때문에 속에선 땀이 나고 겉은 피부가 찢어질 것처럼 차가워서 버텨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나름대로 도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한층 더 험난한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하코다테를 벗어나는 길.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힘겨울 때일수록 도움의 손길이 고마운 법이다. 무라타 씨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하코다테와 삿포로 사이 어느 시골길에서 나를 구해주신 분이다. 그는 홋카이도에서 이렇게 걸어 다니면 진짜 조난을 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최북단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경고가 십분 이해되었다) 


간호사인 그는 아픈 환자를 지나칠 수 없는 것처럼, 조난 상태에 가까운 나를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여러 가지 홋카이도 사투리와 더불어, 삿포로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잔기(ザンギ)와 킹크랩(タラバカニ)을 추천해주었다. 연락처까지 알려주시며 남은 여정을 걱정해주시는 그의 상냥함에 마음이 녹았다. 그래! 내 걱정은 다른 사람들이 해주시니 나는 최선만 다하자! 


*잔기: 홋카이도식 닭튀김. 가라아게와 비슷하며 밑간을 해 녹말을 입혀 튀겨낸 것이 특징이다. 


이윽고 일본 일주에서의 마지막 대도시, 삿포로에 다다랐다. 눈의 도시 삿포로에선 마침 화이트 일루미네이션이 한창인 듯했다. 도시 전체가 형형색색 빛의 옷감을 입은 모습이었다. 오색영롱한 불빛이 새하얀 눈 조형물들과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고, 번화하고 북적거리는 스스키노의 밤거리는 한겨울 날씨를 후끈 덥혀 추위를 사라지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바다를 건너 도달한 궁전과도 같은 대처는 또 어떤 기억을 선물해줄까. 기대감과 성취감이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원처럼 심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 화이트 일루미네이션이 한창이었던 삿포로.


이전 10화 끝이 보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