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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베이스캠프

홋카이도 -02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행 중에 처음 만난 장소가 마치 오랜 고향처럼 포근하게 느껴지는 순간 말이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자꾸만 생각나고, 다시 가고 싶은 그런 곳. 가족과 친구, 직장은 떨어져 있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매력 가득한 도시. 당신에겐 베이스캠프처럼 험준한 산을 오르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안식처와 같은 공간이 있는가? 내게 베이스캠프는 삿포로였다.  


일본 최북단 왓카나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정상 등반을 준비하는 산악인의 마음가짐과 비슷했다. 풍속 25km/h에 달하는 눈보라 아래에 텐트를 치는 것이란 불가능하고, 주위에 숙박 시설 같은 것도 드물었기에 우선 생존이 위협받았다. 또한, 인적이 드문 길이라 고속도로를 제외하면 사실상 시골길을 걷기도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히치하이킹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군데군데 있는 *라이더 하우스나 고속도로 휴게소를 전전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묘안이 없어 보였다. 


*라이더 하우스 : 일본 각지에 있는 자전거, 오토바이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 저렴한 비용에 이용할 수 있고, 정비나 수리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너무 추웠다. 습하고 더운 환경만이 걷기에 있어서 최대의 적이라고 예상한 내 생각이 짧았다. 체감온도가 –20℃라니. 아무리 복기해봐도 가장 더운 9월에 최남단에서 시작해 가장 추운 12월에 홋카이도를 걷는다는 발상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순 없었다. 지금까지 날 도와준 수많은 사람의 기대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다 와서 멈출 순 없었다. 추위에 입이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끝은 봐야만 했다. 


그런 걱정을 한아름 안고 ‘이글루’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했다. 주인 누나(?)(아마도 그렇게 불러주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가 밝은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따듯한 컬러의 원목 가구들과 깔끔하게 정돈된 침구류. 아침이면 주방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조식 향기가 기상을 즐겁게 했다. 많은 사람이 이글루를 거쳐 갔다. 한국에서 온 대학생 형 누나들부터 외국인들까지 각양각색의 여행자들이 아늑한 난롯불 옆에서 경험담을 주고받았다. ‘카탄의 개척자’라는 보드게임을 하면서 친해진 호주의 스키 강사 트리스탄과 나타샤는 휴가를 맞아 삿포로에 왔다고 했다. 함께 게임을 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고, 이글루의 스태프 리나 씨의 추천이었던 삿포로의 명물 수프 카레도 맛보면서 둘도 없는 휴식을 취했다. 

▲ 마음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주었던 이글루 게스트하우스.


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비자가 허용된 날도 얼마 안 남았고, 갈수록 날씨가 매서워졌기에 얼른 준비를 마치고 왓카나이 정복에 도전해야만 했다. 프리 허그도 갔다 와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지금까지 신던 운동화를 게스트하우스에 맡기고 새 신발을 장만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신던 얇은 워킹화로는 도저히 눈 덮인 길을 뚫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한화는 적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필요한 지출이었다. 또, 여름용 옷가지들은 무게를 차지하기에 숙소에 두고 가는 편이 나았다. 랜턴과 상비약도 빼는 등 무게를 줄이는 데에 총력을 기했다. 그렇게 줄이고 줄이니 배낭은 21kg까지 가벼워(?)졌다. 


사실 시작했던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지만, 여행 도중에 늘어난 짐도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11월 30일, 마침내 왓카나이로의 출발을 하루 앞둔 밤을 맞았다. 아침이 밝자 짐을 챙겨 1층에 내려왔는데, 세상에! 트리스탄과 나타샤, 리나 씨와 중국인 이카이 씨가 도전을 응원해 주려 이른 시간부터 나와 있는 것이었다. 

▲ 왓카나이로 출발하는 날 아침, 모두가 1층에 나와 응원해주었다!


그들은 내 팻말 뒤편에 응원 메시지를 잔뜩 써 주었는데, 4개국어로 쓰인 롤링페이퍼는 볼만했다. 나타샤는 짓궂게도 ‘Good luck! Please don’t die’라며 제발 죽지 말라는 다소 과격한(?) 격려를 해주었고(그때 날씨를 회상해 보면 죽지 말라는 격려가 농담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리나 씨는 내게 ‘박 씨 화이팅!    come back to IGLOO’라고 열심히 쓴 한국어를 담은 손난로를 주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기억이 머무는 이곳으로 어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모두의 응원이 담긴 롤링페이퍼와 손난로. 언제 봐도 울컥한다.


돌아올 자리는 인간에게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강렬한 이유와 동기를 부여한다. 산란기의 연어는 고향으로 회귀하기 위해 거센 물살을 뚫으며, 전쟁터의 군인은 가족을 보기 위해 악착같이 사선을 넘는다. 돌아올 둥지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는 위대한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베이스캠프는 정상을 앞둔 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장소다. 어쩌면 우리는 크고 작은 도전 앞에 꼭 하나씩은 베이스캠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궤적을 떠나버린 공처럼 영원히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라기보단, 목적지를 감아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이 순환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당신 앞에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면, 꼭 마음의 베이스캠프를 뒀으면 좋겠다. 설사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할지언정, 온기 가득한 난로와 소중한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릴 테니 말이다.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면, 베이스캠프는 방향이 될 것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다면, 지도가 될 것이고
계속 가야 할지 망설인다면 용기가 될 것입니다.

-포스코 광고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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