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03
눈이 많이 내렸다. 겨울왕국의 한 장면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났다. 발을 내디딜 적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날리는 눈발이 후끈 달아오른 뺨에 닿아 사르르 녹았다. 삿포로 북쪽으로 30km 남짓 떨어진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아사히카와 방면으로 팻말을 흔들었다. 정오가 되자 진눈깨비가 휘몰아쳤다. 질척이는 눈비 채찍이 몸 전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눈비에 쫄딱 젖어 물독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를 태워줄 사람이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팔을 흔드는 편이 나았다.
진눈깨비가 다시금 함박눈으로 바뀌려고 할 즈음, 후한 인상의 형님이 차를 멈춰주셨다. 세이코 씨는 날 태워주신 데에 모자라 중간에 휴게소에서 콜라 4병, 삼각김밥 10개, 샌드위치와 도넛 등을 한가득 사주셨다.
눈길을 뚫고 최북단을 올라가는 내가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세이코 씨 덕분에 삿포로와 아사히카와의 중간지점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눈 덮인 설산 옆 운치 있게 자리 잡은 한 온천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부지런히 걸어 아사히카와시에 도착했다. 지체할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바로 다음 날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사히카와 라이드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주인장과 태국인 관광객 팟 씨와 함께 맥주 한 캔을 기울이고 아침엔 아사히카와의 주력 음식인 시오 라멘을 맛봤다.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아늑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일정에 쫓기지 않을 때 언젠가 다시 방문해서 관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편의점 도시락을 들고 걸어가며 먹었다. 그러자 속이 더부룩한 게 체한 것 같았다. 옛 어른들이 왜 앉아서 먹으라고 하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지만, 이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발은 짓물러서 물집투성이에다, 어깨 쪽 살은 무게를 견디다가 세포가 괴사한 모양인지, 꼬집어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엄살을 부릴 동료도 옆에 없다. 오로지 홀로, 눈앞의 난관을 극복해 나가야만 한다. 의지할 곳이라곤 나 자신의 정신력 외엔 없는 와중이었다. 하늘은 자신을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지금까지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마운 분을 길 위에서 만나게 된다.
아사히카와시에서 북쪽으로 44km 떨어진 곳에 있는 겐부치조(剣淵町)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난 형님은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본인을 겐부치조의 형님이라고 부르라면서, 그편이 나중에 더 기억에 남지 않겠냐고 말했다. 형님은 나요로시에 도착해 지역 명물 찹쌀떡도 사주시고, 니시오콧페라는 지역의 박물관 구경도 시켜주셨다.
홋카이도의 북쪽 지방을 여행할 기회는 별로 없을 텐데,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보고 가길 바란다며 기념품으로 사슴 가죽 팔찌까지 사주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받다니. 나중에 꼭 찾아뵈어서 은혜를 갚겠다고 말씀드리자 그럴 줄 알고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단다. 자기는 그저 길 위에서 만난 홋카이도의 인심 좋은 형님으로만 간직해달라면서, 쿨함의 절정을 뽐내시는 형님의 라이더 재킷에서 광택이 났다.
저녁으론 회전 초밥을 원 없이 포식했다. 걷느라 고생했을 텐데, 사양 말고 먹으란다. 초코케이크와 아이스크림, 카페 모카도 행복한 기억이었다. 구체적인 맛은 잊힌 지 오래지만, 형님의 온정 가득한 마음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듯하다.
든든히 배를 채운 뒤에는 온천에 들렀다. 목 아래로는 뜨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살포시 떨어지는 흰 눈을 얼굴로 맞이하는 기분이란! 우리는 사우나에 들어가기로 했다. 화끈한 열기가 영하의 바깥 날씨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하루의 피로가 땀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나와 형님은 참을성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했는데, 화두가 된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 어느 쪽이 인내심이 강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의 이열치열 문화를 예로 들며, 더운 여름에도 찜통 같은 찜질방에서 피서를 해버리는 지독한(?) 국민성을 설명했다. 그러자 형님도 일본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면서, 사우나 안에서 몇십 분이고 부동자세로 있는 아저씨들의 곤조(근성)이야 말로 근면 성실한 일본의 국민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좋은 예라며 자부심을 드러내셨다.
자, 이쯤 되니 먼저 사우나 밖으로 나가긴 글렀다. 서로 각자 나라의 끈기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우나에 들어간 지 어언 20분. 연탄불 위 아지랑이를 후욱후욱 들이마셨다. 뜨거워 죽을 맛인 건 형님 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둘이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나누는 대화는 더 가관이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럼요. 한 시간도 껌이죠.”
“…….”
십 분 정도 더 지났을까. 양쪽 모두 묵묵히 도를 닦는 그림이었다. 나는 수분 방출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입술을 입안으로 오므렸고 형님은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계속해서 닦았다.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지만, 저절로 시작된 두 남자의 자존심 싸움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내 쪽에서 백기를 드는 편이 이치에 맞아 보였다. 하지만 난, 이 순간만큼은 태극기를 두르고 한일전에 임하는 국가대표와도 같은 심정이었다.
구레나룻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겨레를 위해 스러져간 영웅들의 눈물이요, 열기에 말라버린 수건은 나라를 생각하던 열사들의 타는듯한 목마름이다. 어찌 질 수 있겠는가. 그렇게 또 십 분, 이십 분…. 이겨봤자 상처뿐인 대전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형님 쪽이었다.
“갈까…?”
“네!!”
나는 육상선수가 허들을 넘듯이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왔다. 말을 꺼낸 건 형님 쪽이고, 먼저 나간 건 내 쪽이니, 비긴 셈으로 치자.
나오자마자 냉탕에 싱크로나이즈드 다이빙으로 입수했다. 달군 쇳덩이를 수조에 넣었을 때 치이익 소리가 나듯이 내 입에서도 히이익 소리가 났다.
우린 기진맥진한 채로 밖에 나와 음료수로 화기를 달랬다.
사선을 함께 넘은 동료의 우애가 돈독해지듯, 고생한 우리도 더욱 친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바탕을 끝내고 향한 곳은 한적한 숲속에 자리 잡은 신사였다. 형님은 신사에 엮인 역사를 설명해 주시며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새전을 하면 앞으로의 여정에서 신불의 가호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일본의 신이 한국어를 읽을 수 있을까 궁금했지만 어쨌든 이름을 썼다.
형님은 가능한 한 멀리까지 데려다주시려고 야심한 밤까지 차를 몰았다. 왓카나이에서 불과 90km밖에 안 떨어진 나카가와조 휴게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우리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백 시트를 젖히고 침낭을 덮고서는 눈을 붙였다. 스펙타클하게 흘러갔던 하루여서 그랬는지 잠이 솔솔 잘 왔다. 아침이 밝자 형님은 휴게소에서 자그마한 오마모리(부적)을 사주셨다. 행운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시고는 차를 돌려 어제 내달렸던 도로로 돌아가는 형님을 향해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틀 새 정이 들어 이별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사우나에 들어갈 때면 매번 형님 생각이 난다. 여기서 십 분만 더 버티면 나도 형님처럼 멋진 남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해보곤 하는 것이다. 홋카이도의 겨울은 분명히 추웠다. 그러나 홋카이도 사람들의 마음씨는 사우나처럼 따듯했다. 어쩌면 이렇게 추운 날씨를 이겨내려면, 뜨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역시 현실이 차갑게 느껴질 때면 뜨거운 마음을 갖자. 찬바람을 물리치고 얼음꽃을 녹일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