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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화해

홋카이도 -05

결말 전에 절정이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고비는 도전을 마무리하고 나서, 왓카나이시에서 삿포로로 돌아오는 길에 닥쳐왔다. 뭐 어제까지야 흥분한 마음에 길길이 날뛰었다곤 하지만, 출국일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사할린섬이 건너편에 보이는 땅에 서 있다는 건 참으로 큰일이었다. 어차피 일주는 끝났는데 대중교통을 타고 돌아오면 안 되냐 싶지만, 가고시마 공항에서 사타곶에 갈 때서부터 진작 도전의 선상이었기 때문에 까짓거 시작한 고생 끝까지 가자는 마인드였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그 결정의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게 된다.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내륙 쪽이 아니라 해안가를 따라 돌아갈 생각을 했는데 여기서부터 단단히 잘못된 계획이었다. 내가 걸었던 길은 오로론 라인(オロロンライン)이라 불리는, 자전거나 바이크 애호가들에게는 제법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다. 380km의 뻥 뚫린 지평선과 측면에 이어지는 수평선을 따라 끊임없이 내달릴 수 있는 꿈의 도로…. 라는 것은 이제 라이더들에게 해당한 말이었고 나한테는 허허벌판 그 자체였다. 


민가나 편의점도 수십km는 가야 있을뿐더러 한 시간에 차 한 대 구경할까 말까 한 도린곁에 나 하나 덩그러니 남겨졌다니. 그래도 지금까지 걸었던 짬이 적지 않기에 웬만하면 걸어갈 성싶은데 문제는 날씨였다. 체감온도 –20℃에 육박하는 미친 한파에 규슈에서 겪었던 태풍을 방불케 하는 눈 폭풍이 매섭게 휘몰아쳐 제대로 눈을 뜨고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추운 걸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지는데…. 

▲ 왓카나이에서 삿포로로 돌아가는 길. 정말 얼어 죽을 뻔 했다.

여행 초반에만 해도 보온병을 들고 다녔다. 길 가다 쉬면서 커피 한잔하는 낭만을 나 역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g이라도 줄여야 살아남는 지옥 같은 행군의 연속에서 0.3kg이나 되는 알루미늄 보온병은 사치였다. 게다가 걷다 보면 체온이 올라가기에 더운물보단 차가운 물이 더 좋았으므로 여행 중반쯤에 보온병을 버리기로 했었다. 편의점에서 1L짜리 생수를 두 개 사서 배낭 양쪽 수납 망에 꽂고 갈증이 날 때마다 퀵드로우로 뽑아 마시면 그게 제일 간편하고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스틱병에 든 물은 영하의 온도를 버틸 재간이 없다. 삽시간에 물이 얼어버렸고 그걸 마을로부터 10km나 가서야 알아챘다. 얼음은 페트병 모양으로 굳어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나와도 어차피 녹여 마실 수도 없었다. 버티고 버티다 갈증 탓에 한계에 봉착했다. 방한화를 뚫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눈이 들어와 이미 발가락에는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 카메라를 켜서 보니 입술이 보랏빛이었다. 


이때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날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뇌리에 스쳤다. 사람은커녕 차도 안 다니는 동빙한설 아래에서 소리소문없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구나. 여차하면 119에 구조요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조난을 당했다고 호들갑 떨던 것들은 장난에 불과했던 거다. 


나는 도로를 막아섰다. 그냥 들입다 대자로 서서 오는 차를 가로막기로 한 것이다. 민폐일뿐더러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워낙에 벽지라 데이터도 제대로 터지질 않아서 핸드폰도 무용지물이었던 까닭이다. 


한겨울 북방의 험로 위에서 사활을 건 기다림이란. 지금 상황이 차라리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좋을 텐데. 대자연의 횡포 아래에서 굳어버린 사지를 휘적대기로부터 한 식경쯤 지났을까. 마침내 회색 SUV 차량이 저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가시거리에 들기 위해 뜀을 뛰며 소리를 질렀다. 차가 가까워지자 멈춰 섰다. 사실, 어떤 차든 멈추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거다. 도로 앞을 사람이 가로막고 있는데 말이다. 


운전자는 부부였는데, 처음엔 놀란 기색이었다가 내 차림새가 말이 아니었는지 얼른 타라며 짐을 트렁크에 싣는 걸 도와주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추운 날씨에 걸어가냐고 묻는 말에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맺혔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오기 부리지 말걸.’ 하는 후회, 도와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 등 만감이 어우러져 배어 나오는 눈물이었다. 이쯤 되면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개명해야 할 판이다. 

▲ 하세쿠라 씨와 오오츠카 씨가 구해주셨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하세쿠라 씨와 그의 아내 오오츠카 씨는 데시오조(天塩町)에 거주하는 마을 주민이셨다. 두 분은 사람 통행도 별로 없는 이런 시골길에 외국인이, 그것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혹시 물을 마실 수 있겠냐고 부탁드리면서, 최남단에서부터 최북단까지의 여정을 간략하게 추려 이야기했다. 


날 때부터 숨이 멎는 순간까지 매일 마시는 H2O분자들이 이토록 귀해 보인 적이 없었다. 하세쿠라 씨는 여기서부터 삿포로까지 몇백km는 줄곧 이런 길의 연속이니, 우선은 날이 저물었으니까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가라고 하셨다. 순량하고 다정한 두 분의 친절에 감개가 무량했다. 


마침 김치가 들어온 게 있어서, 한국인이 온 김에 저녁으로 김치전골을 끓이는 건 어떻겠냐고 오오츠카 씨가 제안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김치를 못 먹었던가. 혈중 김치 농도가 부족해, 만성 한식 향수병에 걸렸던 참이었다. 나는 엄지를 올리며 격렬하게 찬성했다.


그저 우연일까? 여행하면서 지독하게 힘든 고비를 하나 넘길 때면 항상 햇살과도 같은 행운이 있어 왔다. 하세쿠라 씨 가족과의 만남도 그런 행운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두 천사가 날 맞이했다. 우미 짱과 나기사 짱은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었다. 내가 다소 낯설어 보일 텐데도,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다가와 주어서 참 고마웠다. 


내가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이, 오오츠카 씨가 먹음직스러운 김치전골을 내오셨다. 홋카이도식으로 저민 *소고기 타타키(たたき) 역시 훌륭한 술안주가 됐다. 우리는 우롱차에 소주(焼酎)를 섞어 만든 ‘우롱하이’를 연거푸 마셨는데, 우롱차의 은은한 고소함이 소주의 묵직한 목 넘김을 제법 상쇄시켜 마시기 편했다. 


타타키(叩き) : 고기나 생선 따위를 겉만 살짝 익히고 속은 날것인 상태로 얇게 저며 내놓는 요리. 

▲ 몰골인 나를 우미짱이 반겨주었다. 김치전골과 소고기 타타키도 천상의 맛이었다!!


연신 넘어가는 술잔에 이야기도 무르익어 갔다. 양국의 시사, 경제, 문화 등에 관한 얘기가 오갔고, 여행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도 차례차례 나왔다. 도중에 하세쿠라 씨의 친척분들이 방문하셨는데. 두 손 가득 핫팩이며 과자 등 여행에 도움이 될만한 물건들을 사 오셨다. 미리 전화로 나에 대해 귀띔을 해두셨던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당황한 날 향해 모두가 환히 웃으며 사양 말고 받으라고 하셨다. 인류애가 반짝이는 순간이란 지금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북녘땅의 밤은 충분히 길었고, 대화 주제는 어느새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역사와 정치 쪽으로 넘어갔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이 부분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인 만큼, 조심스럽게 얘기 드리려 애썼다. 하세쿠라 씨는 뉴스를 볼 때마다 한국이 일본에 전쟁 배상금을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며, 사과와 배상을 했음에도 계속해서 일본에 날을 세우는 연유가 궁금하다고 물어보셨다.


나는 식민지배 시절 일본에 직접 피해를 받으신 분들과 그분들의 가족들이 살아계시기에 아직까진 국민감정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 일제 치하에서 한 나라가 사라질 뻔했던 경험을 가진 민족이니만큼, 일본의 정식적인 사과와 배상금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거라 말씀드렸다. 


문제는 그 사이에서 부정적인 여론을 확대재생산 하는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이다. 극단적인 성향의 정치가들은 국민을 부추겨,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지지율을 끌어올리고자 상대 국가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 경제가 안 좋아지는 이유는 한국이 일본에 배상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사회 앞에서 백 년도 더 된 일 가지고 일본의 국권을 실추시키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따라서 국민은 특정 당을 중심으로 결집해야만 한다.’ 이런 식의 논리가 성행하고 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언론은 자극적인 기사로 국민 간의 감정을 악화시킨다. ‘한국이 불매운동을 통해 일본에 피해를 주려 한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이 폭행당했다.’ 등 편향된 기사는 언론사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기에 안성맞춤이므로 이용되기에 십상이다. 


그사이 희생되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실과 왜곡된 정보를 전달받은 양측 국민이다. 일부 누리꾼들은 딱히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일이 없음에도 해당 국가를 미워하고, 혐오를 담은 악성 댓글로 상대 국민을 모욕한다. 그 과정에서 정말로 피해를 본 개인이 한명 두명 나오게 되면, 갈등의 골은 더더욱 깊어져만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가와 언론도 상황은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많은 사람이 일본 만화와 애니 주제가를 신나게 노래방에서 부르고, 친구와 스시를 먹으러 가며, 일본 여행을 좋아한다.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K-POP에 열광하고,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며, 한국 여행을 오고 싶어 한다. 


내가 두 발로 걸으면서 겪었던 일본인들은 99%가 모두 친절했다. 정말 너무 고마워서, 지금 떠올려 봐도 코끝이 찡해지는 인연이 가장 많은 나라가 일본이다. 훗날 많은 나라를 돌아보고 나서도,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았던 나라가 어딥니까?’ 하고 물으면 지체 없이 일본이라고 답할 정도로 일본은 소중한 추억이 담뿍 서려 있는 나라다. 


몇 개의 극단적인 케이스들 만으로 서로를 미워하기엔 두 나라 모두 손해가 지나치게 크다. 장점도 각자 다르고 단점은 또 서로 보완하기 충분한 형제 같은 나라. 그게 일본과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형제끼리는 다투면서 크지 않느냐. 티격태격 쌈박질도 많이 하고 그러면서도 많은 부분이 닮은 채, 함께 발전해나가는 모양이 정말 형제처럼 느껴진다고. 나는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두 분은 참 맞는 말이라고 공감해주셨다. 하세쿠라 씨는 지금 일본인이 학교에서 받는 역사 교육 과정 자체에 구체적인 부분들은 상당히 생략되어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일본이 뭘 잘못했는지 알 기회가 적고, TV나 뉴스에서 보도되는 기사들만이 접할 수 있는 정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거다. 


우선 두 분께 역사적 진실을 알려드리는 게 우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임나일본부설, 독도영유권분쟁 등 역사적 왜곡에 근거한 일본의 주장이 틀렸다는 점을 밝히고, 일제강점기 당시 벌어졌던 만행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렸다. 위안부와 군함도, 강제 노역과 마루타 실험 등 비인도적 행위 중 대부분은 두 분 다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학교 역사 시간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 정도는 배우지만, 저런 구체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당국으로서는 굳이 과거의 잘못을 명시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고, 괜히 국민으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도록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일 테다. 꽃다운 나이의 여성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성노예로 만들었음에도 아직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없는 일본 정부의 뻔뻔함. 아울러 곧 있으면 사과받지 못한 채 별세하실지도 모르는 열한 분 위안부 생존자분들의 통한. 그런 것들을 최대한 사실에 근거해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러자 하세쿠라 씨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며 내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 것이었다!


“내 사과로 무엇하나 바뀌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대신 사과하고 싶네. 진심으로 죄송하고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네. 그런 짓을 조상님들이 저질렀다는 걸 아예 몰랐다네. 앞으로 더욱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겠다고 약속함세.”


나는 아니요 아니요 제발 일어나시라고 하세쿠라 씨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함께 울며 뜨겁게 포옹했다. 그런 마음을 가져주셔서, 그렇게 말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요. 옆에서 오오츠카 씨도 조용히 눈가를 훔치셨다. 내 아버지뻘 되시는 분이 단단한 나무껍질 같은 눈가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걸 보니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몇 분째, 서로를 안고 화해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오오츠카 씨가 아침밥으로 비싼 연어 알을 밥 위에 얹어 주셨다. 신선한 재첩으로 끓인 장국과 함께 먹으니 해장에 딱이었다. 하세쿠라 씨는 삿포로로 가는 차량이 많은 루모이시 근처까지 태워다주시겠다며, 셔츠를 걸치고 계셨다. 우리 셋 다 숙취가 장난 아니었는데도 아침밥에 태워다주시기까지 한다니. 전생에 무슨 선행을 했으면 이런 대접을 받을까 싶었다. 


눈이 정말 많이 쌓였고, 내리고 있었다. 차가 나가기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점심쯤 돼서야 마침내 히치하이킹이 잘 될만한 길목에 당도했다. 두 분은 점심까지 건하게 사주셨다. 튀김을 올린 텐동이 바삭바삭 맛있었지만, 숙취 때문에 몇 숟가락 못 들었다. 그건 하세쿠라 씨 내외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눈발이 휘날리는 아래,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두 번 다시 없을 뜻깊은 추억을 뒤로하고서.

▲ 하세쿠라 씨와 오오츠카 씨. 우리는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누구나 어렸을 때 형제나 친구들과 다퉜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다툰 후에는 화해를 한다. 아무리 치열하게 싸웠다 한들 용서와 화합이 있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다시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역사와 정치는 훨씬 복잡하기에 분명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방식은 다르지 않다. 진실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고, 배상을 논의하는 일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양 국민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평화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하세쿠라 씨와 나눴던 포옹처럼, 한국과 일본도 화해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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