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쁨 Oct 20. 2022

행복이란

홋카이도 -06

재활용 쓰레기 트럭을 얻어타고, 야밤에 눈길을 뚫으며 몇십km를 걷는 등 고생 끝에 삿포로에 돌아왔다. 휴 드디어 살았구나. 토요일 아침 이글루에 다시 체크인했다. 내가 봐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만신창이인 내가 문을 열고 게스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이글루의 스태프들이 환호성과 함께 환영해주었다. 


“박 씨 살아 계셨군요!!”


리나 씨가 제일 먼저 달려와 안부를 물었다. 눈 폭풍이 왔다는 뉴스를 보고 굉장히 걱정했다고,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니 고마웠다. 역시 내 걱정은 다른 분들이 해주시는 모양이다. 이제는 마지막 날까지 몸 보전만 잘하다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왓카나이를 향해 서두른다고 못 했던 프리허그를 삿포로에서도 해야 했다. 말끔히 씻고 셔츠 한 벌을 사서 입은 채 거리에 섰다. 날이 정말 추웠다. 장갑을 뚫고 한기가 들어오는 듯했다. 그래도 활짝 웃고 행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제법 많은 분이 포옹을 위해 다가와 주셨다. 한 할머니는 2,000엔을 건네셨다. 립밤이랑 핫팩을 주고 가는 학생도 있었다. 역시 홋카이도 사람들은 따듯하다. 

▲ 삿포로로 돌아와 프리허그를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한국인 형 둘과 함께 술도 한잔하고 삿포로 구경도 했다. 걸어 다닐 땐 늘 혼자였는데, 이렇게 사람들과 같이 노니까 참 좋았다. 잃어버린 사회성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저녁엔 카드게임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처음으로 시간에 떠밀려 조급해지는 마음 없이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형님들. 이날 셋이서 맥주만 20잔 넘게 마셨다.


이글루에서 제일 친해진 스태프 리나 씨는 나보다 네 살 많은 누나다. 그렇지만 둘 다 존댓말을 사용했다. 샤이니를 좋아하고,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그녀는 글씨가 참 예뻤다. 한국인인 나보다도 한글을 잘 썼으니 말 다 했다. 그녀의 휴무 날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참 안정돼 보였다. 물론 사람마다 저마다의 사정이란 것쯤은 있기 마련일 테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데 없이 착실하게 삶을 쌓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행복한지를 물어보았다.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녀는 그렇다고 답했다. 상당히 진정성 있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애송이지만, 더 애송이였던 시절, 만나는 어른들한테마다 ‘당신은 행복하신가요?’ 하고 묻곤 해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사실 그 당황하는 반응이 더욱 그 질문을 하도록 부추겼다. 부모님, 선생님, 학교에 강연하러 온 강연자 누구도 질문을 듣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 돈을 많이 번 부자. 강단에 서서 무언가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냐는 질문 하나에 고장 난 로봇이 되곤 했다. 그게 한편으론 재밌기도 했고, 씁쓸하기도 했다. 어린이였던 내가 생각하는 바론,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데 어른들은 다들 행복하지 않다니. 안타까웠다. 당시 나에게 ‘행복하다’라는 말의 정의는 감정의 고조 상태 즉 ‘쾌락’의 의미에 가까웠던 듯하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이나 생일 파티 때 한껏 웃으며 “행복해!”라고 외치는 그 ‘행복하다’ 말이다. 


그런데 감정의 고조 상태는 끊임없이 이어질 수 없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재화를 소비함으로써 얻는 추가적인 만족감은 소비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감소한다는 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하나를 얻어도 충만하지 못하고 또 하나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화는 한정돼 있다. 결국,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거나 운이 따르는 사람일지라도 어느 이상으로는 재화를 획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만족감(쾌락)은 필연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위적인 노력으로 만족의 역치를 낮춘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마치 종교에서 말하는 ‘작은 것에 감사하라’ 혹은 에피쿠로스의 ‘빵과 물만 있어도 행복하다’처럼,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논리에 따라 의도적으로 결핍상태를 만들고, 작은 재화만으로도 최고의 만족감을 낸다면 그것이야말로 행복을 향한 지름길일까?


이미 결핍상태 자체가 감정의 하강 상태일뿐더러 그 결핍상태에도 만족한다고 자신을 세뇌하는 것은 사실 자기기만에 가깝다. 싯다르타가 고행자들의 수행을 그만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식이라면 북한에서 착취당하는 인민들도 머릿속으로는 ‘수령님의 은혜에 힘입어 하루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되뇌면 그만일까. 아니다. 행복은 그런 것이라고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나는 여행을 통해 경쟁과 비교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돌아와서, 나는 어릴 적 세상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고, 살다 보면 힘든 일이 닥쳐오기 마련이기에 언제까지고 즐거운 상태일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건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 생각을 뒷받침 해주는 귀납적 데이터는 어른들이 쌓아주었다. 한국에서의 19년 동안 그 누구도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최소한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 가정이 틀렸다는 걸 점점 느끼기 시작했다. 꽤 많은 ‘외국인’들은 행복해 보였다. 한국인은 유독 불행해 보이는데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 하고 물어본다면 질문해 보았을 때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외국인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남이 어떻게 보든,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나. 


그런데 이들은 돈이 막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사회적인 지위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사람도 아니었으며, 그렇게 유별나 보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무난하고 평범한, 그저 자기 삶에 성실해 보이는 사람 중에 본인이 행복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 리나 씨와 나눴던 대화를 통해 행복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리나 씨가 그중에 한 명이었다. 리나 씨는 제법 괜찮은 직장에, 단란한 가족과 친한 친구들이 곁을 지켰고, 부유하진 않지만, 물질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물론 얘기 몇 마디로 한 사람을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내 시선이 편협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에 ‘네!’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리나 씨는 내가 봐도 행복해 보였다. 마치 유도신문처럼 느껴져 미안한 마음이 일었지만, 나는 조금 더 자세하게 물어보았다. 


“사회 문제에 관한 관심은요?”


“관심이야 있지만, 그것들로 스트레스를 너무 받거나 하진 않아요. 고민이 필요한 지점에선 고민하면서도, 외부의 안 좋은 영향이 내 안으로 들어올 때는 제동을 걸곤 하죠.”


“자아 성취는요?”


“매일 배우는 한국어나 자격증 공부도 저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에요. 늘 나아가려고 해요. 마음처럼 잘 되진 않을 때도 많지만, 매일 노력하면 언젠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리나 씨는 취미도 있고, 건강하게 삶을 가꾸어 갔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행복해지기 위한 요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행복’은 일시적인 감정 상태라기보단, 삶의 가치관에 가깝다. 예컨대 쾌락이 계속되어도 불행할 수 있고, 고통을 느끼는 상태여도 행복할 수 있다. 마약중독자는 지속해서 쾌락을 느끼지만 불행하다. 위대한 희생을 한 위인들은 자신의 몸이 찢겨나가는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을 위한 조건은 의외로 까다롭다. 우선,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 “돈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요!” 따위의 진부한 말을 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재산은 없어서는 안 된다. 이건 동식물이나 심지어 미생물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에너지가 없으면 생명은 살아갈 수 없다. 그 에너지원을 찾기 위해 생물은 생애 대부분을 소모한다. 하지만 인류는 기술발전을 통해 에너지원에 쏟을 시간과 노력을 계속해서 줄여왔다. 따라서 남은 시간은 더욱 가치 있는 일에 쓸 수 있다. 


가족과 친구 역시 행복하기 위해 굉장히 중요하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그 관계망의 가장 기본을 이루는 가족은 행복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고 했던가. 단란한 가족은 고된 삶에 보금자리가 되어주며 고비를 넘어설 수 있는 동력원이 되곤 한다. 외부 조건이 어떻게 바뀌든 옆에 남을 친구도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다. 백아에겐 종자기가 있었고 관중에겐 포숙아가 있었다. 자기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법이다. 


건강하다고 행복하진 않겠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불행하다. 인간은 결국 뼈와 살을 기반으로 하는 생체기계에 가깝다. 거기에 윤활유를 발라주고 관리해주어야만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몸에 좋은 식사, 규칙적인 수면, 주기적인 운동 모두 여생을 최고의 컨디션으로 보내는 데에 필요한 일들이다.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의 시간을 삐걱거릴 필요는 없다. 기왕이면 양호한 몸 상태로 살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자아 성취. 쉽지 않지만, 행복하려면 반드시 이뤄야만 한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이라 할지라도 발전이 없으면 쉽게 무료해지고, 권태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매 순간 도전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일은 성취감과 더불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꿈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결과와 별개로, 땀 흘리며 도전하는 과정 자체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안온하게 자란 부잣집 자제 중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아 성취에 따라오는 사회적인 인정도 참 중요하다. 현대 사회는 개인을 파편화시키고, 분업은 일에서 오는 성취감을 현저히 낮춘다. 매일 컴퓨터에 앉아 같은 작업을 반복하거나, 공장에서 한 부품만을 생산해내는 일은 실로 가치 있지만, 누가 알아준다거나 스스로 지대한 성취감을 느끼기엔 무리가 있다. 과거에 정성 들여 완제품을 만들어내던 장인이 느끼던 찬란한 성취감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자기만의 길을 꾸준히 걷다 보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모두의 인정을 받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런 인정받을만한 삶을 산 사람이야말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안정된 일자리나 적절한 외부 조건(날씨, 국가 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도 행복하기 위해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웬만하면 내 의지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세상이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내면을 지킬 수 있는 견고한 성벽과도 같은 마음도 행복하기 위해서 없어선 안 될 것이다. 시쳇말로 ‘멘탈 관리’라고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심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보호막을 나름대로 고민해보고 구축할 수 있어야만 한다. 취미나 여가생활이 여기에 해당하겠다. 


결론적으로, 행복이란 위에서 말한 삶의 여러 요소 간의 하모니(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난 데가 있으면 바퀴가 굴러가지 않듯이, 인생 역시 저 요소 중에 한쪽에만 치중돼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돈만을 추구하다가 건강을 잃어버려 후회하는 사람이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이러한 삶의 밸런스를 놓치고 만 경우라고 본다. 


물론,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당신에게 나무판을 주면 흠 없이 동그란 모양으로 깎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완벽하게 행복하다는 것도 이상에 가까운 얘기다. 그러나 노력해 나가는 것이다. 모자라고 실수투성이일지라도, 노력하고 조금씩 나아가기에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한 세기를 오로지 돈. 물질적인 번영만을 위해 내달려왔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한국은 필리핀보다 못 살았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땅의 민족들은 사람을 갈아 넣었고, 그렇게 극단적인 자본주의적 성취로 인한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얻었다. 


한강의 기적을 통해 전례 없는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자살과 우울, 황금만능주의 등의 병을 얻었다. 물론 여유를 가지기 싫어서 안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이나 불안정한 고용시장 등 현대인의 삶은 앞날을 내다보기 더 어렵게 변모하고 있고, 경쟁에서 승리해도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말까 하다. 


그러나 무한 경쟁을 방치하고 이기적인 가치관만을 고수한다면 아이들이 죽어 나가고, 어른들은 꿈을 잃으며, 노인들은 삶의 울타리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의 가치관이 맹목적인 성장보단 행복한 삶 쪽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과열된 경쟁은 수그러들고 문제해결을 여러 방면에서 모색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리나 씨와의 대화는 행복에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고민해볼 기회였다. 일본을 떠나는 마지막 날, 여느 때처럼 가방을 어깨에 얹고 허리끈을 졸라맸다. 머리는 덥수룩했고 어깨는 조금 벌어진 것만 같았다. 약간 더 어른스러워진 기분이었다. 나는 리나 씨와 다른 스태프들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삿포로 공항으로 향했다. 날이 풀려 눈이 녹아있었다. 햇살이 새하얀 세상에 반사돼 모든 것을 밝게 했다.      

▲ 일본일주 마지막날, 햇살이 눈 위로 쏟아져 내렸다.


여행은 고됐지만 행복했다. 내 나이 스무 살. 일본 도보 일주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전 15화 화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