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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최북단 도착

홋카이도 -04

이젠 정말 끝이 보였다. 북위 45도, 일본 열도의 최북단인 소야곶이 100km도 안 되는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일본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종단이라는 목표 달성이구나. 휴게소 식당에서 레토르트 카레를 먹고 벤치에서 잠깐 졸았다. 그러고서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작열하는 태양이 피부를 사정없이 태우던 9월. 가고시마에서 시작해, 최남단 사타곶으로부터 3,256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한 끝에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질 않았다. 도착이 가까우니 지금까지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났다. 죽을 때가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힘들기도 처절하게 힘들었고, 즐거운 일도 참 많았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만났고, 사랑스러운 기억들을 두 팔 가득히 모았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절절히 느꼈고, 그럼에도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면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 


성공에는 운이 필요하지만, 운은 도전하는 이에게 허락된 선물이라는 사실도 여정 속에서 깨달았다. 그리고 인생이란 줄곧 어렵기만 하거나 끝없이 달콤한 것이 아닌, 다채로운 일들의 합주곡이라는 결론을 구할 수 있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더위가 있으면 추위가 있다. 


여행에 녹아있는 또 하나의 핵심은 ‘삶의 다양함’을 깨닫는 데에 있지 않을까?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겪게 되는 신선한 체험들. 그 안에서 느끼게 되는 살아있는 교훈들. 하나둘씩 앨범을 장식하는 귀중한 기억들. 그리고 마침내 삶이란 그저 밋밋한 단조(單調)가 아닌, 생기 있는 교향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개인에게 여행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 마지막 여정. 걷고 또 걸었다.


요즈음 현대인에겐 삶의 다양한 면모를 느낄 기회가 점점 소실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시험 점수, 취업 대란, 무한 경쟁에 시달리며 천편일률적인 가치만을 좇다 보면 결국은 번아웃이 오고야 만다. 왜냐하면,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일하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비교하고 비교당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물론, 사회에서 어엿이 한 자리를 확보하는 일은 중요해 마지않다. 그러나 거기에만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엔 못다 할 경험이 너무 많다. 마치 구절판이나 팔보채처럼, 단맛, 짠맛, 신맛, 쓴맛 온갖 풍미가 다 녹아들어 있는 게 인생 아닐까? 무슨 맛을 볼지는 대개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선택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 있더라도. 눈물 콧물 다 빼는 매운맛을 보았더라도, 언젠가는 달콤한 시기가 찾아오게 되어있다. 반드시 그렇다. 가령 동전 던지기를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뒷면만 나올 수는 없다. 그래서 잘 될 때 교만하지 말고 못 될 때 좌절하지 말라는 거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을 볼 때면 그지없이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로지 삶의 쓴맛만을 보다가 도저히 못 견디고 부여잡은 동아줄을 놓아버리고 마는 어린잎들을 보면 어떻게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장면들만 펼쳐져 있는 게 아닐진대.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 전율하는 순간도, 사랑하는 사람과 설레는 말을 주고받는 순간도, 공을 들여 가꾼 결실에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맛보지 못한 채 신산스럽게만 살다가 단명하는 것만큼 가탄스런 일도 없다. 


내가 한 경험과 성취는 그렇게 별이 되어버린 이들의 몫을 대신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있을 턱이 없을뿐더러, 자라올 때의 배경이 조금이라도 달랐더라면 나와 그들이 겪을 인생이 정반대됐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힘을 내주기를 바란다. 저렇게 어리고 쬐끄맣고 까불대는 녀석도 꿈을 이룰 수 있구나. 하면 되는구나. 미친 짓도 계속하면 멋진 짓이 되는구나. 인생이라는 어려운 숙제도 까짓거, 즐기면서 풀어나갈 수 있구나. 그런 메시지가 닿기를 바란다. 




그렇게 마침내 소야곶에 닿았다. 12월 5일 10시 15분. ‘일본 최북단의 땅 The Northernmost Point in Japan’이라고 적힌 비석 앞에 섰다. 가고시마 공항에서 출발한 날로부터 81일 만이다. 엄청난 눈보라가 정신없이 안면을 강타해서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환호성이 쉼 없이 터져 나왔다. 

▲ 일본 최북단, 소야곶 도착!

“해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구나. 가장 먼저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고생했네. 잘했어. 얼른 돌아오거라.”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단톡방의 소꿉친구들이 수고했다며 격려해줬다. 여행을 응원해준 분들에게 연락해 소식을 알리자 모두가 격렬하게 축하해 주셨다.


내 나이 스무 살. 일본 열도를 일주하는 데에 성공했다. 첫 번째 목표가 이루어진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힘들었다. 생고생이 따로 없었다. 몸이 부서지는 줄만 알았다. 굳건한 줄 알았던 정신력도 수차례 극한상황에 처하곤 했다. 이렇게 열심히 한 이유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경쟁하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전달해, 극단에 치달은 사회를 조금이나마 식히고 싶었다. 역설적이게도 그걸 위해 너무 고생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물론, 꼬마 하나가 공간 조금 이동했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의지가 전해질 수 있다면 충분하다. 의지는 생각을 바꾸고, 생각은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도전은 계속된다.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한 걸음씩 걸어 마침내 소야곶에 도착함과 같이, 한 걸음씩 걸어 나가면 오대양 육대주를 모두 돌아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왓카나이시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직도 들뜬 마음이 진정이 안 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땅끝마을답게 방값이 비쌌다. 날씨가 워낙에 추운 탓에 사진을 찍으려 해도 자꾸만 핸드폰의 전원이 꺼졌다. (아X폰은 날씨가 추우면 전원이 꺼지곤 한다) 저녁엔 후미진 골목 안쪽 이자카야에서 갓 나와 후끈후끈한 꼬치구이에 보각보각 거품이 이는 생맥주를 곁들였다. 식당 안의 아저씨들과 성공담을 나누고서는 다 이루었다는 만족감에 가득 찬 채 숙소로 돌아와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제 삿포로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 왓카나이 시에 돌아왔다.


하지만 이 앞에 얼마나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직 몰랐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애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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