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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규슈 - 01

무엇이든 첫 기억은 가장 강렬하게, 그러면서도 은은하게 남아, 마음 한편을 잔잔히 비추는 법이다. 여행의 시작. 일본 본토 최남단에 자리한 도시 가고시마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첫 여행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가져다준다. 


떠나기 전엔 비자 문제나 체류 기간에 대한 것들이 굉장한 고민이었다. 무비자 체류 기간인 90일을 넘으면 어쩌지? 기간이 길고 목적이 불분명하면 입국 거부도 당한다는데. 괜찮을까? 친구들과 가족들한테 당당히 선언하고 왔는데 오자마자 귀국행이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각종 고민이 가방의 무게와 더불어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다. 


그러던 중 비행기 창밖으로 인천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건물들이 해안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출발이구나. 꿈에 그리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온다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피가 혈관에서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가슴을 누르던 걱정들이 어느샌가 눈 녹듯 사라졌다. 가고시마 공항에 도착해 잔뜩 긴장한 채로 심사대를 향했다. 마스크를 쓴 심사관이 어디서 머물 계획이냐고 물어봤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가고시마의 모습.


"목적지가 삿포로 인지라, 전차에서 자거나 그때그때 호텔에서 머무를 생각입니다!"


도보 여행에, 호텔 같은 데는 들를 생각도 없다는 걸 쏙 뺀 채로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전날 밤 예상 질문을 뽑고 몇 번이나 일본어로 답변을 연습해 놓았다. 그런데도 내 일본어는 한없이 느리고 서툴렀다. 그러자 심사관은 미심쩍은 눈초리 대신 걱정을 한 아름 담은 채 혼자 왔냐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돌아온 말은 삿포로까지 무척 힘들 텐데, 항상 몸조심하고 혹시라도 돈이 부족하면 돌아오라는 따듯한 한마디였다. 돈이 부족하면 돌아오라고 재차 강조하셨다. 일본의 물가가 비싸다는 걸 돌려 말씀하셨을까.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장이 여권에 찍혔고 빠르게 심사대를 통과했다. 해왔던 걱정이 무색하게. 




공항에서 나오자 확연히 후텁지근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울에서의 햇살 색과는 사뭇 다른, 좀 더 노랗고 정겨운 빛이 쏟아졌다. 회양목의 잎사귀가 한국보다 넓고 두꺼웠다. 신기하게 족욕탕이 공항 앞에 딸려있었다. 발을 담그기엔 시간이 없었다. 얼른 가까운 도시로 이동해야만 하는데 벌써 태양은 어스름을 드리우며 지고 있었다. 

▲ 가고시마 공한에 딸린 족욕탕. 갈 길이 바빠 족욕을 즐기지는 못했다.

가고시마 전에 있는 키리시마라는 마을을 향해 걸어가던 중 한적한 꼬치 가게 옆을 지나게 되었다. 내 행색이 의아했는지, 꼬치구이를 드시던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키리시마까지 걸어가는 길이라 하니까 길도 위험하고, 오늘 안에 거기까지 걷는 건 절대로 무리라고 하시며 차에 타라고 하셨다. 


어느 소설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시내로 가는 도중 창가 너머로 보니 공항에서 마을까지의 도로엔 도보가 가능한 여백이 전혀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야마시타 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여행의 이유와 목적지 등에 대해 서투른 일본어로 번역기를 두드려 가며 대답을 했다. 야마시타 씨는 마을에서 꽤 먼 곳에 살고 계셨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나를 걷기 좋은 곳까지 데려다주셨다. 여행 첫날부터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나다니. 앞으로의 여정에 행운이 함께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야마시타 씨 내외가 앞으로의 여행에 축복을 빌어주었다.




난 키리시마를 온 감각기관으로 영접했다. 말 그대로 한적한 시골. 맑은 공기에 닿아 선명해진 석양과 파릇한 초목을 한껏 느끼며 끝이 없어 보이는 도로를 걷고 또 걸었다.

▲ 가고시마의 시골길 풍경.

 도보 여행은 첫날이라 그런지, 페이스 조절에 보기 좋게 실패했다. 어딘가 식당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편의점도 안 들렀건만, 두 시간을 걸어야 겨우 배를 채울 수 있을지 누가 알았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대도시였다가 시골로 180도 바뀌어버린 환경에 애써 적응하며 일본에서의 첫 끼니인 닭 다리 카레를 흡수하다시피 했다.

종업원의 친절에 놀랐고 비싼 가격에 두 번 놀랐다. 가고시마에 가까워지자 이미 해는 완전히 져버린 후였다. 축구장만큼 넓은 공원에 새것 냄새가 폴폴 나는 텐트를 치고 화장실에서 대충 얼굴을 씻었다. 

▲ 여행 첫날 쳤던 텐트.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서울에선 보이지 않던 별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편의점에서 과일 향 맥주를 샀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잔디와 나를 흔들었다. 


엄마에게 전화했다. 오늘 처음으로 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20km 정도 걸은 것 같은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 꿈에 그려오던 일을 하니까 아무리 몸이 고단해도 힘이 넘쳐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가장 활력을 얻는 법이다. 당신이 지금껏 마음속에만 담아오던 꿈은 없었는가? 기회가 안 와서, 주변 환경이 가로막아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우리들의 계획은 창고에 박혀 날아오를 날을 고대하는 마법 양탄자와 같다.


과감히 밖으로 꺼내 먼지를 털고 양탄자 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믿기 힘든 힘이 솟아나 우리를 날아오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내 여행의 첫날.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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