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쁨 Oct 20. 2022

최남단을 향해

규슈 -02

새벽 다섯 시. 풀밭 위에 텐트를 쳐서 그런지 사방이 습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근처의 온천을 검색했다. 오늘 안에 사타곶까지 가려면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키리시마를 나가는 도중에 조오야마 온천에 들러 몸을 씻었다. 작지만 깔끔한 시설. 사우나 안에서 할아버지들이 사투리 섞인 말투로 대화 중이셨다.  

▲ 조오야마 온천. 밖에선 이런저런 요깃거리를 팔고 있다.

매일 당연하게 누리던 샤워가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 화산 근처의 뜨겁고 기분 좋은 온천수로 씻고 나오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아침으로 간단하게 컵라면을 고르고 가고시마 특산 명일엽차도 맛보았다. 온천 주인아주머니가 내 가방을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사타곶으로 간다고 하자 가는 길을 알아봐 주시곤 물이라도 충분히 채워가라며 온천수를 담아주셨다. 박카스 같은 음료수도 챙겨주셨다. 


시골의 따스한 온정을 느끼며 키리시마를 벗어나는 국도에 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미 태양은 따가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안에 사타곶까지 가는 건 무리일 듯싶다. 국도에 딸린 로손 편의점에 들러 주먹밥을 몇 개 사면서 점원에게 물어봤다. 




"저기 히치하이킹을 하려고 합니다만, 버리는 박스 있나요?" 


그러자 점원이 손수 밖에까지 나오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박스를 챙겨주었다. 사타곶까진 무리더라도 사쿠라지마 화산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박스에 보드마카로 사쿠라지마 화산을 쓰려던 참에, 로손 편의점의 점장인 이와모토 씨가 다가와 물었다. 


"여기서 사타곶은 꽤 멀 텐데, 조금이라면 태워줄게."


난 이게 이틀째에 만난 최대의 행운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이와모토 씨는 가고시마에서 태어나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키리시마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계신 분이셨다. 나에게 사쿠라지마 화산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화산섬을 전부 돌았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어지지 않은 섬이었는데, 화산 폭발로 인해 땅이 새로 만들어져서 지금은 육지와 이어져 있다는 역사를 여유롭게 설명하시는 모습이 사뭇 가이드 같았다. 이 정도 데려다주셨으면 된 것 같은데…? 고마워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참에도 차는 멈추지 않고 남쪽으로 내달렸다. 


▲ 사쿠라지마 화산의 모습. 저렇게 뭉게뭉게 연기가 나는데도 주민들은 태평하다. 분화하는 것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자    "가끔 터지곤 해." 라며 여유롭게 웃으시는 이와모토 씨.


"저 때문에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는데, 정말 감사하지만, 지금부터는 걷겠습니다…!" 


"이 날씨에 걸으면 쓰러져버려. 텔레비전에 '20살 한국인, 도보 일주 중 쓰러져 의식불명' 이렇게 나와 버리면 자네가 머물다 간 로손이 경찰한테 조사받을 거라고."


서로 한참을 웃었다. 우리는 일본의 정치, 역사, 농사, 가고시마의 인구 등등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눴다.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휴게소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는 부타동을, 이와모토 씨는 가라아게 정식을 골랐다. 


그릇을 들고 먹는 일본 문화와 윗사람 앞에서 고개를 돌려 마시는 한국의 술 문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와모토 씨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가 계산하자 자네는 학생 아니냐며 기어고 돈을 건네셨고 나는 기름값만 해도 적은 돈이 아닌데, 보답하게 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과는 이와모토 씨의 승리였다. 식사 후 마신 음료수를 핑계로 잔돈까지 남기지 않고 갚혀(?) 버렸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이와모토 씨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자네가 가면 또 쓸쓸해지겠네. 오늘의 은혜를 꼭 기억하고 나 역시 언젠가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때 발 벗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게 내가 길 위에서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보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타곶에 도착하고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왔다. 선글라스 밑에 감춰진 이와모토 씨의 눈시울이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반드시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조심하게. 그가 명함을 건네주었다. 

나는 한껏 웃어 보이며 걱정하지 마시라며 눈가를 훔쳤다. 그렇게 나는 3일은 족히 걸렸을 일본 최남단 사타곶에 세 시간 만에 서게 되었다. 

▲ 일본 본토 최남단 사타곶 도착!


한껏 들뜬 마음으로 인증 사진도 찍고, 경치를 구경하고 있자니 마침 사타곶을 구경하던 준이치 가족과 만났다. 준이치, 유키 씨 내외와 8살, 6살인 츠바사, 와타루 군과 이야기를 나눴다. 천진난만 순진무구. 최고의 보석이 세상에 있다면 이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고하는 말일까. 같이 사진도 찍고 건네준 젤리와 주먹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박스에 다음 목적지인 가노야를 적었더니 와타루군이 영어냐고 했다. 

▲ 개구쟁이 와타루 군. 내 한자를 보고 영어냐고 면박을 주었다. ^^;

알아. 나 한자 못 적는 거….^^ 가족들이 일제히 배꼽 빠지게 웃었고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됐다. 두 살 많은 츠바사 군이 쟤는 한자를 몰라서 그래. 잘 썼어. 라며 애써 날 위로해줬다. 


몇 분 후 준이치 가족은 내게 행운을 빌어주며 떠났다. 나는 불타는 태양이 조금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타곶으로부터 북쪽을 향했다. 이제부터 최북단까지 여정 시작이구나. 본격적인 도보 여행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이국적인 아열대 식물들과 파도가 넘실대는 작은 해수욕장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시에서 수십 km나 떨어진 사타곶은 인정하나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초심자의 행운 뒤에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린다고 했던가. 왼편엔 첩첩산중, 오른편엔 망망대해였다. 


어깨가 아파져 오고 몸에 힘이 빠져갔다. 설렘은 이제 사그라진 지 오래다. 가혹한 시련을 겪을 차례가 왔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가장 가까운 휴게소조차 20km 넘게 멀리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없는 도로에서 저녁을 맞이하면 위험하겠다 싶어 아까 목적지를 써놨던 박스를 꺼내 들고 인생 처음으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앞선 행운들은 저절로 나에게 다가왔지만, 직접 도움을 구해보니 얼마나 그 행운들이 감사했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 끝이라곤 없어 보이는 사타곶의 심히 자연친화적인(?) 도로.

주중에 최남단을 통행하는 차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운 좋게, 10분쯤 지나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젊어 보이는 차주는 내게 박스에 적힌 가노야가 어디냐고 물어봤다. 보통은 목적지를 알아야 멈춰주는 거잖아…? 난 그에게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봤고, 미야자키로 간다는 소리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 어차피 미야자키가 목적지입니다! 가노야는 미야자키까지 가는 길의 중간지점인지라, 잘됐네요!"


그렇게 하루 만에 313km를 이동해버리게 되었다. 도보 여행이라면서 이렇게 긴 거리를 이틀째 만에 와버리다니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지만, 남은 노정이 한없이 길었기에 다가온 행운은 망설임 없이 움켜잡자고 마음을 먹었다.

 

▲ 우라노 씨. 살아남는다면 센다이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알고 보니 렌터카였던 차의 차주는 26살 우라노 씨. 센다이의 철강 회사에 다니는 그는,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가 미야자키에서 열려 휴가까지 내고 전날 미야자키로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기왕 남부까지 온 김에 최남단을 구경하고 돌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즉흥적으로 차를 빌려 사타곶까지 당일치기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빌린 차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나를 태우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목적지도 모르면서 선뜻 차를 멈춰준 것이 새삼 고마웠다. 


감사 인사에 그는 쑥스러워하며 사실 혼자 여행하는 길이라 심심하기도 했고, 혼자 늦은 밤까지 운전하려면 피곤했을 참이라 태워줬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의 상냥한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도중에 방지턱을 들이받기도 하고, (나중에 물어보니 다행히도 수리비는 물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도 함께 들으면서 미야자키에 도착했다. 그는 몇 달 후가 되겠지만, 센다이까지 죽지 않고 도착한다면 자기 집에서 재워주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고 나는 반드시 무사히 도착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길었던 하루가 끝이 났다. 남쪽의 따스한 밤바람이 나를 북쪽으로 밀어주는 순풍이 되어주는 듯했다. 


이전 04화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