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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오랜 친구

규슈 -04

잔뜩 고생한 뒤 피로가 몰려왔다. 으슬으슬 추운 게 감기 기운이 든 것 같았다. 태풍 속에서 그 난리를 벌였는데 몸이 멀쩡하면 이상하다. 약국에 들러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도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오이타와 벳푸는 일본에서도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피부가 빨개질 정도로 높은 온도의 유황 온천에 들어가 이마 위에 수건을 올리고 있자면 어떤 병도 나을 것만 같았다. 피부도 뽀송뽀송해지는 느낌이었다. 고생한 나에게 주는 보상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식당에 들어가 사시미 모둠도 시켜 먹었다. 얼추 몸을 회복하고 나니 문득 이곳이 내 오랜 친구가 있는 곳이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 벳푸의 온천. 벳푸 팔탕(別府 八湯)이라 불리는 각양각색의 온천들이 방문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료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쭉 연락을 해오던 친구다. 동갑이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와 나이를 세는 방법이 달라서 내게 항상 오빠라고 부르곤 했다. 벳푸라는 도시에 사는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고 연예인 소속사에 들어가 데뷔하는 걸 꿈으로 삼던 아이였다. 상황과 배경이 따라주지 않아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그녀를 나는 진심으로 응원했고, 료 역시 내가 수능을 치르고 대학을 들어가는 동안 쭉 지켜봐 주었다. 


그녀와는 사실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어느새 연락이 소원해졌고 SNS엔 생일 때 주고받은 메시지가 전부였다. 그런 그녀가 사는 땅에 도착하고 보니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난 새벽에 몇 번이고 지우고 썼다 반복한 글을 그녀에게 보냈다. 


"네 생일 때 썼던 편지를 직접 전해주고 싶어. 잠깐 시간 될까?"


사실 전에 먼저 연락을 보지 않은 건 나였다. 어느새 그녀의 인스타그램엔 남자친구와 같이 찍은 사진도 올라왔었다. (만난 뒤 들으니, 이미 헤어졌단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리다 눈이 감겼다. 새벽에 그녀로부터 답장이 왔다. 


"당연히 시간을 낼게요. 만나기 쉽게 오이타 역에서 보면 어때요?"


그녀의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바로 답장을 해야 했는데, 바보같이. 날이 밝아오자 눈이 뜨였고 제일 먼저 핸드폰을 확인했다. 얼른 얘기해달라는 그녀의 재촉에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답을 남겼다. 아침 11시. 그녀가 오이타 역 플랫폼에서 개찰구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반짝이는 눈망울과 수줍은 미소. 내 시선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나도 그 애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로 어설픈 일본어를 몇 마디 뱉었다. 그동안 꽤 는 줄 알았더니, 왜 갑자기 단어며 문장이며 생각이 안 나는지. 


그녀는 내 큰 가방을 보고 기겁을 하며 이걸 매고 가고시마에서 여기까지 왔냐면서 놀라워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오이타 백화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곳은 푸딩이 맛있는 집, 이곳은 녹차가 향기로운 집. 소개는 잔뜩 해주면서 정작 먹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이 의아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꼭대기 층에 있는 푸드 코너에 들렀다. 료는 딱히 배고프지 않으니, 나만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마지못해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나온 덮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그녀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화장실에 갔겠거니 했더니,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 때 즈음 그녀가 양손에 큰 음료 컵을 들고 걸어왔다. 


"오빠 먹다가 목 막히면 안 되니까 사 왔어요."


타피오카 펄이 잔뜩 들어있는 버블티였다. 사실 버블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료의 성의가 기특해 한껏 빨아들였다. 

윽…!

맛이 없었다. 그녀는 이곳 유명한 카페에서 제일 잘 팔리는 음료가 이거라고 했다. 그럼 너도 마셔보라고 장난을 치니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계산하려고 보니 이미 결제가 된 뒤였다. 


"앞으로 여행하면서 많은 돈을 써야 할 텐데, 여기서 낭비하지 말아요."


내가 먹은 음식을 왜 료가 결제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녀의 고집은 대단했다. 그다음 같이 본 영화도 그녀가 냈으니 말이다. 오후가 됐고 그녀는 벳푸로 전차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 나는 오늘 저녁까지 오이타에서 벳푸까지 걸어갈 테니, 먼저 열차를 타고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다. 

▲ 오이타에서 벳푸로 향하는 길

드넓은 해안선을 따라 노을을 등지고 걸었다. 그녀는 진작 도착해 내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 전화를 해주었다. 내일 벳푸를 떠나기 전 시간이 되는지를 묻자, 그녀는 오이타에서의 첫마디와 같이 당연히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바닷가에서 만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본여행을 왔던 당시 처음으로 그녀와 만났던 장소 꼭 그곳이었다. 내가 먼저 와 앉아있자니 작은 몸집의 그녀가 큰 봉지를 치렁치렁 들고 두 팔을 휘청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아침 안 먹었죠?" 

▲ 이런 걸 다 챙겨주다니, 기특하게.

봉지 안에는 내가 먹고도 남을 만한 양의 주먹밥들이 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또 파스와 감기약, 위장약 따위의 상비약도 들어있었다. 나는 그녀와 바다를 바라보며 내 여행의 목적과 꿈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난 비록 사서 하는 고생이라 해도, 나에게 이득 될 게 없는 무모한 도전이라 할지언정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작은 발버둥이 될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끝까지 내 길을 걸어 나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저 몸조심하라고 했다. 그토록 대단하고 확고한 계획일수록 더욱 건강에 신경 쓰고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면서, 다음에 만날 때까지 무사해야만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가 목에서 금빛 목걸이를 풀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남기신 유품이라고 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거란다. 난 새끼손가락의 은반지를 빼, 료에게 주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음에 만날 때 탈 없이 돌아오겠다고. 그렇게 약속을 하고 우리는 헤어짐을 품은 거리를 걸었다. 그녀는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달려와 볼에 입맞춤했다. 


"다음에 봐요!"


환하게 웃는 그녀는 마치 활짝 핀 해바라기 같았다. 난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는 채로 얼음이 되었다. 료는 총총 앞으로 달려나갔다. 난 한동안 어떤 동작도 하지 못하고 뺨을 어루만져 보았다. 작은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꿈은 아니구나. 얼마쯤 지났을까. 어느새 햇살이 먹구름 사이로 나와 대지를 비췄고 나도 발걸음을 떼야만 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소중한 오랜 친구였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털어놓으면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삶엔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등을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오랜 친구가 있다면 어떤 난관일지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료와 찍었던 스티커 사진. 그녀는 내 영원한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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