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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행복의 스파이

규슈 -06

어느새 정겨웠던 규슈에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기타큐슈에서 간몬 해협을 가로지르는 터널을 하나만 넘게 되면 어느새 혼슈에 도달한다. 도쿄와 오사카, 교토 등의 커다란 대도시들이 있는 혼슈로 넘어가는 것은 마치 연습게임에서 본게임으로 돌입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구나 싶은 성취감도 존재했지만, 따사로운 날씨와 더불어 포근한 인정이 가득했던 규슈를 떠난다는 게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다. 조각배를 떠안고 파랗게 넘실거리는 바다를 옆에 둔 채 길을 걸었다. 어제만 해도 태풍이 몰아치고 잿빛 먹구름만 가득했는데, 오늘은 구름도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뽀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혼슈를 향하는 길. 규슈 안녕!


혼슈의 초입 시모노세키는 항구도시이자 복어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하다. 죽음과도 바꿀 가치가 있는 맛이라고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 꼭 복어를 먹어보라던 사람들의 추천에 며칠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복요리를 맛보리라 다짐하고 있던 터였다. 


현지인들이 솜씨 좋기로 유명한 복요리집을 추천해줬다. 온종일 걸어 땀에 찌든 옷차림에 키를 훌쩍 뛰어넘는 큰 가방을 둘러맨 채 음식점에 들어갔다. 딱 봐도 세련된 분위기에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복어회와 죽을 주문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지. 오늘 하루만큼은 가격이 비싸도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소동파가 "죽음과 맞바꾸는 맛"이라 극찬했던 복어.

계산기를 켜 어제오늘 쓴 돈을 계산하던 와중에 요리가 나왔다. 담긴 복어는 살점이 굉장히 얇아 거의 종잇장처럼 투명했다. 그냥 맛보면 특유의 비린내가 살짝 났지만, 전용 소스를 곁들이면 달콤하고 쫄깃한 식감이 배가되어 가히 일품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양념이었기에 머뭇거리자 주방장이 다가와 고춧가루와 쪽파를 물컹한 모미지 오로시(もみじおろし)에 기호대로 섞어 찍어 먹는 게 정석이라고 알려주었다. 또 라임즙을 간장과 섞어 만든 폰즈(ポン酢)에 복어회를 맛보는 것도 별미라고 했다. 복어집 주방장은 요리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백종O과 외모가 비슷했다. 

▲ 복어집 주방장 츠지노 씨.


그는 내 행색이 특이했는지 어디서 왔냐는 둥 무얼 하고 있냐는 둥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내 이야기를 듣자 그는 굉장히 놀란 기색으로 홀로 그 먼길을 걸어왔냐고 했다. 아직 반도 못 왔다고 답하자 그는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큰 짐과 사진들을 보자 이내 의심을 거두었고, 나중에는 가게 안의 손님들에게까지 한국에서 온 패기 넘치는 소년이라며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가게 주방장 츠지노 씨는 시모노세키에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복어를 손질해온 장인이었다. 그는 덥힌 사케와 창자(チャンジャ), 삭힌 이와시(정어리)를 서비스로 내어주며 맥주도 무제한으로 마시도록 허락했다. 흥분된 목소리로 가게 손님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어느새 그도 술잔을 들고 왔다. 그는 10시도 채 안 됐는데 가게 문을 닫았다. 손님을 더 받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묻자 장사는 매일 할 수 있지만 사내끼리의 대화는 오늘 같은 날에나 가능한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2차를 가자고 권했다. 가게 매니저까지 합세했고 우리는 운치 있는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겼다. 복어집을 나서며 받은 계산서에는 내가 먹은 것의 절반도 안 되는 숫자가 찍혀있었다. 매니저에게 계산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묻자 맞은편에서 츠지노 씨가 윙크를 날리고 있었다. 

▲ 복어집의 모두와 친구가 되었다.


종일 걸은 몸에 공짜 술까지 들이부었으니 이미 혈중알코올농도는 상당했다. 그럼에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곁들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취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일본에 와서 보고 느낀 것들을 얘기했다. 아직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지금껏 일본에서 만나고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은 참 하나같이 인정 넘치고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느 나라나 자본주의 시대를 겪어내는 사람들은 물질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경쟁과 비교에 생애를 할애하곤 한다. 그러나 한국은 그 정도가 다소 극단적이고 치열한 것 같다. 


우린 어렸을 때부터 시험 기간이 되면 음악, 미술, 체육 시간에 국어, 영어, 수학 문제를 풀었고 점심 먹고 쉬는 시간에 시험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동아리는 입시 경쟁에서 자기소개서의 한 줄을 채우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에선 누구든 최소 하나 이상의 부 활동이나 서클(동아리)에 가입해, 흥미와 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즐기고 악기를 다루는 법을 익힌다. 난 특별히 잘하는 운동도 없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는데, 그런 점이 부럽다.


그리고 많은 일본인의 가치관은 경쟁과 비교보단, 자신의 만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대중적인 성공 못지않게,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일 역시 인정해준다. 따라서 장래에 대한 개인의 선택지도 넓고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유리하다.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일상 속에 깔려 있다 보니, 불필요한 분쟁이 적다. 한국이 선진국다운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이런 긍정적인 면들을 배워 가고 싶다. 


얘기를 듣던 츠지노 씨가 날 향해 행복에 관한 비밀들을 가져가기 위해 잠입한 '행복의 스파이'라며 농담 섞인 말투로 별명을 지어줬다. 그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 데도 이 정도 생각을 하는 젊은이가 있는 걸 보니, 일본도 분발해야겠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점장이 서비스로 여러 음식을 내왔고 (이때부턴 상당히 취해서 뭐가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우린 사진도 찍고 다 같이 동이 틀 때까지 마셨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타타미가 깔린 방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알고 보니 복어집 별채에서 뻗었던 것이다. 

▲ 잔뜩 취한 다음날 일어나 보니 복어집 별채다... 


퉁퉁 부은 얼굴로 가게에 내려가자 츠지노 씨가 잘 잤냐며 어제 공원에서 자겠다는 걸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고생 좀 했다고 말씀하셨다. 연신 사과하는 날 만류하며 피곤하면 좀 더 자두라고 했다. 복어회 한 점 맛보려 왔다가 복어집 별채에서 자다니. 이런 여행도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모노세키에 황혼이 내려앉았다. 시 중심에 자그마한 놀이공원이 있었다. 관람차에 탑승해 작지만 사랑스러운 항구도시를 내려다보니 첫사랑을 길에서 마주친 모양 설레는 기분이 밀려왔다. 맛있는 음식과 따듯한 사람들. 청초한 바다와 귀여운 복어. 훗날 노인이 되고 눈꺼풀이 무거워질 적에 과거를 추억하면 이곳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선홍빛 처마가 매력적인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에는 무녀복을 입은 진짜 무녀들이 있었다. 창작물에서나 보던 무녀를 실제로 보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쉽게도 무녀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무녀가 기념품을 판매하는 매표소에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복어 신을 모시는 신사에서는 매년 복어가 잘 잡힐 수 있도록 마을 주민들이 와서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나도 새전을 하며 앞으로의 여정과 사랑스러운 마을에 복을 빌었다.      


행복의 스파이가 되어 세상 곳곳을 방문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다. 각지를 편력하며 알아낸 비밀들을 소중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다한 게 아닐까.


▲ 한 폭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시모노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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