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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쁨 Oct 20. 2022

프리허그

주고쿠 -02

'히로시마' 하면 가장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키워드는 아마도 '원자폭탄의 아픔을 겪었던 도시'일 것이다. 경술국치로 통한을 겪었던 한국인에게야 다소 통쾌했던 역사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 자국민에겐 아픈 상처이자,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땐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험성과 경각심을 일깨우는 사건이 바로 히로시마 원폭 투하(1945)다. 


폭심지로부터 반경 1.6km는 가루처럼 지도에서 사라졌고, 적어도 11㎢가 충천하는 화마에 불살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히로시마에 도착해 근처 전망대로 올라가 바라본 시내의 전경은 도저히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번화롭고 장대했다. 가지런히 정돈된 거리와 세련된 건물들. 폭격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대지가 다시금 이렇게 번영하게 됐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나 기분 탓이었을까. 우아한 도시엔 어딘가 모를 우울함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 히로시마 원폭 돔.


제일 먼저 발걸음을 향한 곳은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이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축물은 원폭 돔이었다. 대머리 할아버지같이 생긴 돔은 스러져가는 철골과 바닥에 흩어진 잔해물들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 그날의 악몽을 사람들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저 돌에도 방사능이 남아있지 않을까?' 따위의 가벼운 생각을 하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게 있어 원폭 투하 사건은 학창시절 외기에만 급급했던 역사적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곳곳에 세워진 추모물과 희생자들을 기리는 아이들의 그림이 보였다. 원폭의 어린이 상에는 '이것은 우리들의 외침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세계에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원폭 돔 왼편을 따라 나지막이 흐르는 모토야스 강가를 넘어가자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와 평화기념공원이 나타났다. 

▲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히로시마는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많은 한국인이 끌려왔다가 폭발의 희생자가 됐다고 한다. 평화 기념관으로 들어가자 20개가 넘는 언어로 된 팸플릿이 꽂혀있었다. 원을 그리며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한 곳 한 곳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실려져 있었다. 이어서 폭발로 폐허가 됐던 히로시마의 모습이 대리석 벽에 둥글게 그려진 채로 나타났다. 박물관 내부에는 당시 폭격에 쓰인 원자폭탄에 대한 정보와 폭격 잔해물, 피해자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상영관에선 원자폭탄이 히로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던 당시 끔찍하게 죽어 나간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잔인하리만큼 생생히 스크린을 메웠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묵묵히 기념관을 둘러보던 내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번 퍼붓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인간과 전쟁, 증오의 역사가 만들어 낸 참상을 더는 맨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어떠한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를 따지든 간에, 이토록 많은 민간인이 비참하게 숨을 거둔 것은 너무도 슬펐다. 타인을 미워할 수는 있다. 그리고 다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이런 무자비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분명히 다시금 생각해 봐야만 하는 문제다. 나는 어쩌면 너무도 안온한 시대에 태어나 평화를 당연하게 누려왔을지도 모른다. 당장 우리 조부모님들이 숨 쉴 적까지만 해도 이 같은 비극이 정도만 다를 뿐 온 세계에 걸쳐 벌어졌으니 말이다. 




더 나은 세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 후손들에게, 아들과 딸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사회는 최소한 전쟁의 공포로부터는 안전해야만 한다. 그리고 피상적인 평화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국민이 송곳니와 발톱을 드리우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댄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이와 같은 참극은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념관을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 문구점에 들렀다. 코팅한 도화지 위에 큰 글씨로 평화와 행복을 새겨 넣었다. 그 밑에 Free Hugs 프리허그라고 적었다. 언젠가 평화와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프리허그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회 앞에서 개인의 영향은 한없이 작고 미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작은 행동이 쌓여 다른 이들에게 조금씩 이나마 따스한 마음이 전달될 수 있다면, 언젠가 세상이 조금은 더 밝고 따듯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대도시를 들를 때마다 프리허그를 하는 나만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가방과 팻말을 들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로 나왔다. 이제 팻말을 치켜들고 서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엄청난 긴장감이 몰려왔다. 입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외국에서 홀로 대로에서 팻말을 든다는 건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들숨을 크게 내쉬고 물을 크게 한 모금 마셨다. 한 명이라도 다가오긴 할까? 누가 와서 시비 걸면 어떡하지? 혐한이라도 하는 사람한테 눈에 띄면 위험할 수도 있다. 경찰이 와서 내쫓을 공산도 없지 않았다. 한 10분간은 팻말을 들지도 못한 채 새빨개진 얼굴로 심호흡만 계속했다. 


그래, 야쿠자들과도 친구가 됐던 나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겠지. 마침내 결심이 섰다. 한쪽엔 일본 일주, 한쪽엔 프리허그라고 써진 팻말을 양손으로 들고 웃는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 갈 길 가는 사람들로 들어찬 거리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웃음을 지었고, 누군가는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누군가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유심히 날 지켜보기도 했다. 여자, 남자, 아이, 어른. 행인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혔다. 그리고 이게 말이 프리허그지, 손 들고 벌서는 거랑 다를 게 없었다. 웃는 얼굴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얼굴 근육이 굳어서 딱딱해지는 듯했다. 세상에 쉬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구나. 

▲ 인생 첫 프리허그.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한 무리의 중학생들이 다가왔다. 그 친구들보다 내가 더 긴장했지만, 그녀들은 경쾌하게 달려와서 내게 안겼다. 함께 사진도 찍고, 첫 번째 포옹은 성공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술 취한 청년들, 직장인, 대학생들이 하나둘 다가와 주었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편이었고,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은 팻말을 읽고 미소를 띠며 가던 길을 가시는 경우가 많았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겐 일본과 한국의 국민이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고,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런 캠페인을 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몇몇 시민들은 따듯한 차와 초콜릿, 과자를 건네기도 했다. 만취해서 새빨개진 얼굴로 달려와 과격하게 껴안던 청년들을 제외하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내 인생 첫 번째 프리허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 요세이 씨와 함께.

한 젊은 형님이 프리허그가 끝날 즈음에 다가와서 괜찮으면 저녁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요세이 씨는 녹초가 된 내게 따끈한 규동과 맥주를 대접해주셨다. 


그는 같은 대학생 중에서 이렇게 용기 있게 세상을 여행하고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을 두 눈으론 처음 본다면서, 앞으로 쭉 응원하겠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배도 부르겠다, 술도 한 잔 얻어먹었겠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몸은 피로했지만 기쁨을 전하는 일은 참으로 행복했다. 나로 인해 길을 걷던 사람들이 잠시나마 웃을 수 있다면, 그리고 얼어붙은 한일관계에 작게나마 온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몸담은 세계는 그리 평화롭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를 고의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헤치고 상처 입힌다. 전쟁과 증오의 역사는 인류가 번영한 이래로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일지 몰라도, 화려하게 치장된 문명사회에 가려져 있을 뿐 개인과 국가 간의 다툼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2보 후퇴, 3보 전진. 느리더라도 분명하게 인간은 발전하고 있다. 나는 믿는다. 역사를 돌이켜 보며 반성하고 부족했던 점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 인간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75년 전, 폭발로 폐허가 됐던 도시는 지금,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평화 기념관 위에는 참새가 앉아 노래하고 있고, 아이들은 순박하게 웃으며 공원에서 뛰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이렇게만 있어 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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