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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定石).

커피와 정석

by 함수규


정석(定石).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수학의 정석’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왔고,


어떤 것을 배울 때나 가르칠 때,


늘 ‘정석대로 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정석이라는 것이 오히려 걸림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빨리빨리 해.”


“대충대충 유들 있게 좀 굴어.”



세상은 정석과는 다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50년을 살면서 나는 정석대로 살지는 못한 부분이 좀 많은 거 같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떤 방법이든 목표를 이루는데 정석이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생각하지 않았던 거 같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시절 책도 머리말만 보고 독후감을 쓰기도 하고,,


일을 하나하나 배우기보단 일을 진행하면서 거꾸로 배워지게 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 방식이 꼭 나쁜 것만 같지 않았던 거 같다.


하지만 때론 처음 해보는 일도 많이 해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도 해야 되고...


무모한 도전정신도 생기기도 하고 인생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 처음의 두려움을 줄여주는 역할도 주었었다.


런던, 야매 가이드


사진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지인이 여행사 가이드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케줄이 겹쳐서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네가 해보는 건 어때? 어차피 차도 있잖아.”



나는 황당했다.


겨우 1년 전에 런던이 영국 어디쯤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런던 투어라니.



“말도 안 돼요.”



그러나 꽤 많은 페이를 듣고, 나는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문제는, 어디를 가야 하는지, 무엇을 설명해야 하는지


아무 정보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유행하던 노란 표지의 배낭여행자 바이블,


「세계로 간다 – 영국」 편을 통째로 외웠다.


다행히 그날의 손님들은 역사나 유적지 보단 쇼핑이 우선이어서 마침 버버리 아웃렛에


모시고 가니 너무 좋아하셨었다.



그 일을 계기로 어설픈 자신감이 붙었고,


단가 좋은 가이드 일을 종종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번은 실수도 했다.


러시아에서 온 주재원이 대영박물관 투어를 부탁했다.


나는 가이드 경험이 쌓였다고 착각했고,


어설픈 상식으로 잘난 척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분은 런던에서 미술을 전공한 분이었다.


나는 크게 망신을 당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가끔은 정석대로 해야 하는 것도 있는 거구나.’





커피와 정석


얼마 전, 사무실 1층에 작은 카페가 생겼다.


우드톤의 인테리어,


감성적인 바리스타 사장님,


조용한 음악.



그곳은 순식간에 삼청동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사장님은 정석대로 커피를 만들었다.


학원에서 배운 대로,


한 잔 한 잔, 천천히,


모든 과정을 거쳐서.



그 결과, 손님들은 늘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결국 기다리다 떠나갔다.



나는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어서


카페에 가면 머신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한가한 시간에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다,


슬쩍 의견을 말했다.



“조금 빨리 추출하는 방법도 있어요.


사실 현업에서는 프로세스를 몇 개 패스해도


맛에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거든요.”



그러나 사장님은 단호했다.


그는 정석대로 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 후로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내가 새로운 직원이 오면 ‘정석대로 배우라’고 하면서,


왜 단골 카페 사장님에게는 편법을 쓰라고 했을까.


오지랖이었구나, 싶어 슬며시 미안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커피 맛이 더 좋아졌다.


천천히 만들어져도,


정석대로 만들어진 커피.


그것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감사하게 느껴졌다.



요즘, 사장님이 힘들어 보인다.




커피를 만들면서 점점 말라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어쩌면,


세상에는 정석대로 가야 하는 것들이 있고,


정석을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경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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