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시선
전시회가 끝났다. 지난주였다.
마지막 전시회를 연 게 2015년 성수동이었으니까,
꼬박 9년 만의 사진전이었다.
나는 파인아트 사진작가가 아니다.
심지어 상업사진가 중에서도 가장 상업적인,
이커머스 사진업계의 고인 물이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사진가가 되었을까?
오랫동안 그 질문을 곱씹으며
지나온 시간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기 시작했다.
어릴 적, 나는 그림을 좋아했다.
다른 친구들이 자동차를 2D로 그릴 때,
나는 4D 개념으로 바퀴 네 개를 전부 보이게 그렸다.
미술대회에 나가 입상도 했고,
중·고교 시절에도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적어도 그때까진,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삶은 예상과 다르게 흘렀다.
질풍노도의 고등학생 시절,
공부는 뒷전이었고,
재수라는 꼬리표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강남의 재수학원에 등록했지만,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는 여전히 고 4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버스에 올랐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종점을 지나 홍대 앞까지 와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버스 정류장 앞에 도일 컴퓨터 학원이 있었다.
그래픽 전문 컴퓨터 및 주변기기를 수입하는 회사였는데,
그곳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다음날, 나는 부모님 몰래 재수학원 대신
컴퓨터 그래픽 학원에 등록했다.
컴퓨터 그래픽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강사들 대부분이 홍익대학교 대학원 출신이었고,
그중에는 사진을 전공한 사람들도 많았다.
수업이 끝나면 지하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사진을 시작했다.
1년간 컴퓨터 그래픽을 배우면서,
대전 엑스포 박람회 2D 애니메이션 부문에 출품해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유학을 꿈꿨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당시 군 미필자는 해외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고,
대학생이면 비자가 나온다고 해서
급히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을 하면서
유학의 꿈은 점점 희미해졌고,
결국 졸업 후
패션 광고 대행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포토그래퍼들과 협업하며
어느 정도 대리 만족을 하고 있었다.
서른 살 즈음이었다.
지인이랑 새벽 낚시를 갔다.
차 안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김광석 – 「서른 즈음에」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노래였지만,
그날따라 그 가사가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그때까지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사진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3개월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런던으로 떠났다.
20여 년이 흘렀다. 프리랜서로 시작해,
큰 회사와 합병도 했고,
미국 주재원 생활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피엔아크까지,
나는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다.
그런데 왜,
9년 만에 다시 전시회를 열었을까?
작년부터 가족이 된 흥이.
나는 그의 사진으로 인스타그램을 도배했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하는 사진가 친구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시회를 기획했다.
나는 원래 어두운 톤과 강한 콘트라스트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의 사진은 달랐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촬영 내내,
나는 반려견들과 그들의 가족을 담았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단순한 촬영이 아니라,
순간을 함께하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먹고,
좋은 말만 하고 살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나는,
조금 더 따뜻한 것들을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