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사마리아님의 라이브를 들으면서
생각한 주제가 있다.
내가 올해 임신을 하고
내년에 아이를 낳는다면?
병오년생이며
아이가 내동댕이쳐지는 기울어진 서식지를 제공하는 것도
이 아이를 태어나게 한 부모와, 더 나아가 나라도 일견 관여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이를 한국에서 임신했어도 원정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출산을 한다는 것을.
나는 아이를 말레이시아에서 기르고 싶다.
다국적 이주 문화가 있는 곳에서 아이를 기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재택 근무가 가능한 일 위주로 프리랜서로 살겠다.
이를 위한 지시적, 근본 질문에 화두를 깊게 던지고
철학적 담화로 자연스런 교육이 이루어지는 환경을 조성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죽는다 해도 누군가는 사과나무를 심듯이, 나는 그런 교육을 자녀에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홈스쿨링은 아니다.
사이사이 남편과 나에게서 그 또는 그녀가 흡수하고 소화하는 기초 토대를 마련해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월주.
그리고 나라를 바꾸었다면, 이는 년주.
물론 한국인의 피와 러시아인의 피가 대번에 년주와 월주를 갈아치우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자분자분 공략해 나가는 피의 전쟁이다.
인류의 근원으로 가면 아담과 이브, 뱀이 그 등장인물이고
이브의 갈비뼈, 즉 미토콘드리아로 귀결되는 단순한 분화이지만
어느덧 이렇게 갈래가 다양해진 마당에
자식을 낳아 기르는 환경은 오롯이 부모가 만든다. 일단 자식이 자궁문을 나서는 그 때에.
분수령으로 아이가 스스로 나오고자 했고, 실제로 나오는 그 찰나의 시간과
부모가 스스로 아이를 갖고자 했고, 실제로 아이를 가진 그 찰나의 공간이
만나는 때가
일주이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화의 시대, 즉 드러남의 세계에 등수가 매겨지는 판국에 아이를 낳을 판이다.
물론 내 생식 능력을 100퍼 장담하지 못하지만 40이 넘어서 리스키한 임신과 출산을 겪고 싶진 않다.
이왕 낳기로 했으니.
아이는 좀 화려하게 될 팔자일지도.
화를 갈망하지는 말이지어다.
수의 시공간에 시선을 둔 남녀가 낳을 아이가 화의 아이라니.
아이러니. 아니, 당연한 자연의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