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호구조사를 공개적으로 하던 90년대 그 시절, 겨우 10살 남짓이었던 난 그 시간이 참 싫었다.
집이 자가인지 임차인지 부모의 학력이 고졸인지 대졸인지까지는 공개적으로 진행했다.
" 이제 모두 다 눈감고 엎드리세요"
그건 선생님 재량이었을까? 부모님이랑 같이 안 사는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손을 들면 된다고 했다. 꼭 눈은 감고 엎드리라 강조를 했고 눈을 뜨는 아이에겐 주의를 주셨다. 부끄러운 게 아니니 조용히 손들면 된다고 했지만 남들한테 들키면 부끄러우니 최대한 들키지 않게 손을 들면 된다라고 들렸다.
10살의 나는, 들키지 않았을까?
부모직업란 중 부의 자리엔 항상 사업이라고 쓰긴 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다단계였다. 어린 나로서는 뭘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딱히 채울 말이 없어서 사업이라고 좀 있어 보이게 썼다.
부모님은 항상 돈 문제로 싸웠고 아빠는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없는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러한 아빠 대신 엄마는 가장 역할을 하며 나와 오빠를 키웠다.
이러한 환경은 나의 결혼관에 뚜렷한 기준을 만들었는데 반드시 나와 남편은 안정적인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 전 남편의 직장은 공기업이었고 나는 제법 연봉이 높은 중견기업에 다녔다. 친구 중에서 제일 일찍 결혼했던 것도 빨리 정착해서 안정적인 삶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해서 결혼 한 건 맞지만 100% 사랑만 있진 않았다. 어쨌거나 결혼을 결정한 데 있어 남편의 직장은 긍정적인 요소였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몸소 느끼게 된 건 결혼 후 6개월이었다. 남편은 공기업을 때려치웠다.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초역세권이었던 24평 신혼집 아파트 하나가 공중분해가 되었다는 정도로만 해두겠다.
어찌 됐든 나는 혼자 아이 둘을 케어해야 했다. 가루가 되어 버린 아파트를 만회하기 위해 남편은 평일 주말, 낮밤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양가 부모님들도 모두 일을 하셨기에 그야말로 혼자 육아를 뒤집어써야 하는 독박육아를 해야 했다.
1년의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 하루 전 밤이었다. 멀쩡하던 아이는 열이 40도를 웃돌았고 밤새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여도 다시 열이 오르기를 반복했다. 복직 첫날 출근도 못한 채 병원부터 갔다. 폐렴이라 바로 입원을 해야 했다. 잠시 아이를 아빠에게 맡기고 회사로 향했다. 회사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똑같이 일을 했지만 아이가 아파 밤새 케어한다던가, 갑작스레 입원을 해야 하는 일의 수습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육아휴직을 당당히 1년을 쓴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임신과 동시에 퇴사하는 것이 당연했고 출산휴가 3개월만 겨우 쓰고 복직하는 게 일반화된 문화였다. 그 당연시되는 문화를 처음으로 깬 사람이 나였다.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사장님도 흔쾌히 1년의 육아휴직을 허락해 주셨다.
“ 우리 회사에서 1년 육아휴직은 처음이네요. 그동안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잘할 거라 믿습니다.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를 만들어 주세요”
약간의 부담감도 함께.
그렇게 1년을 꽉 채우고 첫 출근하는 날이 하필 이모양이었다. 그것도 아이가 아파서. 더 기가 막힌 건 복직 첫날 휴가를 받으러 회사에 간 사실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아픈 것도 속상한데 회사에 폐를 끼치게 되니 면목이 없었다. 이사님의 눈을 볼 자신은 없어 무릎을 보며 말씀드렸다. 울지 않으려 주먹을 꽉 쥐었다. 다부지게 꽉 진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 엄마 되는 거 참 어렵다 그죠? ”
이 한마디에 눈물은 흐를 새도 없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기만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출근과 등원시간은 같았다. 제일 먼저 등원하고 제일 늦게 하원을 했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욱여넣었다. 아이도 울고 나도 울었다. 고작 13개월짜리 아기였다. 퇴근 정각이 되면 부리나케 하원시키러 갔다. 눈썹이 휘날린다 라는 말이,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닌 것 같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땐 일의 욕심도 있었고 아이가 핑곗거리가 되는 게 싫었다. 잘해서 준건지 후배가 먼저 승진을 해서 위로차 준건지 알 수 없으나 복직한 그 해 회사에서 우수직원상도 받았다.
이제 숨 좀 쉬나 싶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암이 찾아왔다. 불행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완치율이 높은 갑상선 암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 퇴사를 했고 그때부터 나는 경단녀가 되었다.
시간은 기억을 흐리게 능력이 있다. 암수술을 했다는 사실도,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다짐도 모두 잊게 하는 그런 능력.
덕분에 둘째가 태어났다.
회계학과 출신으로 나름 수에 빠삭한데 아무리 셈을 해봐도 1+1=2가 아니었다. 한 놈은 자꾸 자기를 보라지, 한 놈은 계속 울어대지 이건 뭐 녹다운이 아니라 넋다운이다.
사실 이 정도 되면 독박육아금지법 같은 거 하나는 만들어 줘야 한다고 본다. 직장인처럼 9 to 6(9시 출근, 6시 퇴근) 이 지켜지는 삶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철야나 당직만 안서도 땡큐다 이거야!
에필로그(epilogue)
겨우 잠들었다.
침대에 내려놓는 순간까지 집중해야 한다. 숨도 쉬면 안 된다.
제발... 제발.. 깨지 마라..
까치발 들어 무중력상태로 조심스레 거실로 나온다.
밤 11시다. 드디어 육퇴다!!!
만세가 절로 나온다.
냉장고에 모셔둔 생명수를 꺼낸다.
푸슛-치-익
오오 거품 거품, 한 방울도 놓쳐선 안돼.
꿀꺽꿀꺽꿀꺽 꺼~~~~~~억.
이제 좀 살 것 같다. 이건 생명수가 분명하다.
“으앙 으앙 으아아아아앙”
2초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못 들은 척을 해본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눈이 질끈 감긴다.
혹시나 아빠가 벌떡 일어나 아기를 보러 갈 거란 헛된 희망을 품는다.
역시나.
들리는 게 분명한데 자는 척 오진다.
생명수마저 때려 붓고 캔을 찌그러트리며
외마디 하나 남기고 소리를 향해 걸어간다.
“간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