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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읽는 그림

by 한나

모든 첫 만남은 어색함을 기저로 삼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도 그러하지만 그림을 보러 오는 관람객과 그림의 만남도 예외는 아니다. 재밌는 것은 관람객만 낯선 게 아니다. 그림도 조용히 수줍어한다. 서로 모르는 남녀가 맞선 자리에 앉았을 때처럼 두 개체 사이에 공기의 흐름을 좌우하는 것은 어색함이다.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서 탐색전을 펼치기도 하고, 불편함을 이겨 보려고 침을 꼴깍꼴깍 삼켜보기도 하지만 공기가 자연스러워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디서든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은 어색함을 가져가고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그때부터 공기의 흐름은 달라진다.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대화가 시작되는 시점도 이때부터다. 관람객과 그림의 이야기도 이때부터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수많은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전시장엔 다양한 직업과 관심사, 다양한 연령층의 관람객들이 다녀간다. 그중에는 취미든, 직업이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많다.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어도 그림을 보는 자세와 표정만 봐도 그들의 등 뒤에서 물감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림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확인해 보면 대부분 내 느낌이 정확했다. 아마도 뭔가에 심취한 사람들이 지니는 아우라가 아닐까.

지난주 전시가 끝난 서양화가 윤장렬 작가의 그림은 처음엔 뜨악한 마음이었다. 미리 접한 정보로는 자연을 주로 그리는 화가이며, 이번 전시의 주제는 꽃의 열정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확실하게 꽃으로 보이는 그림은 몇 작품 되지 않았고, 사물의 형체를 나타내는 경계선이 안개처럼, 아지랑이처럼 허물어져 있었다. 우리의 인식 속에 남아 있는 그런 꽃이 아니었다. 각진 선과 면으로 분할된 사각의 구성이 논밭 같기도 하고 아파트나 건물처럼 보이는 추상화들이 갤러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나마 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색깔뿐이었다. 낭패다 싶었다. 나도 모르는 그림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관람객들에게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안내를 드리고 좀 더 편하게 그림을 관람할 수 있도록 돕는 전시해설사다. 의무감에서라도 어떻게든 낭패감을 수습해야 했다. 빨리 작가님을 만나서 본인의 그림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고 싶었다. 작가를 만나면 해석이 어려운 비구상 그림에 대한 막연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해질 거라 기대했다. 기다림에 지쳐 갈 때쯤, 한때 시월의 마지막 밤을 이별 감성으로 수놓았던, 잊힌 계절의 가수 이용을 닮은 아담한 체구의 작가님이 도착했고, 우리의 모든 관심은 작가님께로 쏠렸다. 작가의 호흡 하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보는 사람이 보이는 대로 보고 느끼면 됩니다’. 이럴 수가, 우리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작가의 말은 너무나 무성의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그저 그림을 바라보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한없이 보고 또 보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림이 한 꺼풀씩 양파처럼 껍질을 벗고 속살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림은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했다. 누가 봐도 다 알 수 있는 구상화에서는 상상되지 않던 것들이 비구상에서는 가능했다. 관람객들도 자신이 보는 대로 마음껏 이야기를 만들 수가 있었고, 한계가 없는 추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관람객들이 풀어놓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느낌을 공유하면서 내 감정은 부피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림 속의 꽃밭에서 꽃잎이 바람에 나부끼고, 나비가 날아오르고, 벌레들의 소리와 풀들의 흔들림이 보였다. 그림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이니 꽃을 통해 생명의 열정을 보여주고 싶다는 작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작가의 말 없음이 오히려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많은 말을 끌어내게 했다.

초록이 가득하고 군데군데 핑크와 노란색이 칠해진 그림 앞에서 젊은 엄마는 장난감이 있는 아이 방 같다고 했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악어 뱃속으로 보인다고 했다. 순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을 모자로 보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 왕자가 떠올랐다. 나는 아이의 동심이 좀 더 오래 지켜지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했다. 아흔의 할아버지는 꽃상여가 지나가는 것 같다고 하셔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내 눈엔 논밭으로 보였던 그림이다.

같은 그림이 관람객들의 각기 다른 얼굴의 생김처럼 느낌도 전부 다 다르다는 것에 내 마음은 옅은 흥분마저 일었다. 과학은 우리에게 지식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만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할 수는 없으며 오직 예술만이 영혼의 허기짐을 채울 수 있다는 니체의 사상을 연구한 『초인수업』 작가의 표현에도 동조가 되었다.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그림이 너무 예뻐요, 초록이 좋아요, 이 그림 집에 두고 싶어요.’ 그들의 행복감에 젖은 말들 속에서 예술이 주는 충만함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 일어날까 싶지만 때로 한 줄의 문장이 우리 삶의 모양을 바꾸어 놓기도 하는 것처럼, 그림에도 그런 힘이 있다. 그림 치료나 아트세러피란 말이 생겨나고, 우리가 그 단어에 익숙해진 것만 봐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림은 눈으로 보이는 형상의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색 자체가 주는 힘도 크다. 색은 우리의 시각을 환기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여 위로와 쉼을 주기도 하고 치유까지 나아간다.

지인 중에 어떤 분은 오랫동안 힘들고 복잡한 업무에 시달려서 마음의 힘을 잃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중, 업무 차 찾았던 보건소 벽에 걸린 노란색 그림 앞에서 한참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마치 그림이 자기를 안아주는 것 같은 위로와 따뜻함을 느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했다. 그 후로 노랑을 좋아하게 되었다면서 우리가 만났던 그날도 그녀는 연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봄날 산유화처럼 빛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색을 연구해 온 『컬러의 힘』 저자 캐런 할러는 색의 역할과 속성들에 대하여 몇 가지 단락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중 색채의 심리적 영향으로 살펴본 네 가지 원색에서, 빨강은 신체에 영향을 미쳐 심장의 박동을 높이고, 맥박을 빠르게 하며, 노랑은 감정에, 파랑은 지성에, 초록은 균형과 조화의 색으로 규정하고 있다. 색은 우리의 심신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프랑스 출신 화가 앙리 마티스는 나는 봄날의 따뜻함을 그리고 싶었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안락의자와 같은 편안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수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의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즐거움을 주고 있다. 요즘 단색화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선과 면을 한 가지 색으로 채운 그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는 분들을 봐도 컬러에 힘이 있다는 게 확인이 된다.

나는 봄을 좋아한다. 무채색 세상에 툭툭 불거져 나오는 컬러에 미칠 것 같은 환희를 느끼기 때문이다. 색이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생기는 사라지고, 재미없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으로 우리의 삶도, 꿈도 전부 소멸되어 버릴 것만 같다. 색이 없는 음식과 과일들, 색이 없는 꽃들, 무채색의 옷차림들,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무채색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인지.

재작년 봄, 봉화 백두대간 박물관에 갔다가 산불조심 전시회에서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해설가를 만났다. 신뢰와 안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성실하게 잘 살아왔을 것 같은 태도와 기품 있는 해설에 매료되어서 나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에 시간이 입혀지고 오늘에 이르렀다. 내 나이 예순에 겁 없이 도전한 이 일이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이 일이 주는 삶의 기쁨을 사랑한다.

관람객이 뜸한 시간에 그림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조용히 앉아 물감 냄새를 느끼며, 그림들이 건네 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림의 일부가 되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그림도 그림을 봐주는 관람객이 있을 때 생명을 얻고, 풍성한 이야기의 주체가 된다.

가열 찬 초록의 삶을 마친 나뭇잎들이 가을 편지가 되어 날아드는 계절이다. 누군가는 단풍을 그리면서 행복해하고, 누군가는 그려진 단풍을 보며 행복을 느낄 것이다. 씨줄과 날줄이 만나 면이 되듯 관람객과 그림도 서로를 알아봐 주고 끌어주며 함께 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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