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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세계적 명판관 다산 정약용

세상을 여는 잡학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으로 평생 여성 소수자 인권운동을 이끌며 평생을 걸고 약자의 편에 선 진보의 아이콘이었다. 그가 2020년 9월 타계했을 때 그의 법 정신을 존경하던 전 세계인이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그가 그토록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소수의견을 중시한 것이었다. 미국 원주민이나 임금 차별을 받는 노동자, 사회적 약자인 여성 등의 소수의견에 귀를 열어 들어 주었고 그것을 보호하고자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소수의견은 곧 국민 정서에 직결되기도 한다. 아무리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다수의견이 존중된다고 하더라도 소수의견은 무시만 하기에는 때로 예민한 사안이 될 수 있다. 긴즈버그는 소수의 아픔을 들여다보았고 다수에 의해 뭉개져야 하는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그의 인생 여정은 미국의 대중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로하여금 진정한 법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약 십 년 전 대한민국 대법원은 세계적인 명판관으로 옛 이스라엘 왕이요 다윗의 넷째 아들 솔로몬과 중국 북송의 포증(포청천), 조선의 정약용을 꼽았다. 솔로몬과 포증의 얘기야 널리 알려졌기에 쉽게 수긍되나 실학자로 알려진 정약용이 어찌 명판관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을지 궁금해할 만하다. 답은 그가 저술한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 찾을 수 있다. 흠흠신서는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고향 땅 전남 강진에 돌아가 1822년에 완성한 30권 10책 구성의 저서로 조선 시대의 형법을 두루 다루고 있다. 흠흠신서는 중원 땅의 『무원록(無冤錄)』과 『대명률(大明律)』과는 다른 특징을 갖는다. 바로 형벌 결정에 치열한 법리 논쟁을 요구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정약용은 형조참의를 역임한 명확한 법철학자로서 판결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함을 중시했다. 그는 특히 권력 남용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판결을 내리기 전에 논리적이며 과학적 방법의 수사를 강조했다. 당대 권력자들의 범법행위에 대한 잣대를 드리울 때 자칫 권력의 미친 칼에 다칠 수 있음을 정약용은 분명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맥없이 물러날 수는 없는 일. 오만방자한 권력을 극복하기 위한 정약용의 잣대는 곧 공정함이었다. 공정함은 공론을 불러일으킨다. 논리적 과학적 수사는 공정함을 세우는 요소가 될 수 있고 그 공정함에 공론은 자석에 끌리듯 달라붙기 마련이다. 흠흠신서는 현대의 법학자들도 인정할 정도로 상당한 법 정신을 풀어내고 있기에 대한민국 대법원이 정약용을 세계 3대 명판관 중 한 분으로 임명한 배경이 된 것이었다. 정약용은 또 엄중함만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정당방위 살인사건에 대한 판결에는 ‘애민적 정상참작’을 반영하는 아름다운 법철학도 품었기에 존경받을 수밖에 없는 명판관이었다.     

최근 들어 사법부의 이런저런 판결에 국민 혈압 평균 치수가 급상승하고 있다. 극악 연쇄살인범에 대한 판결이 10년 형(刑) 넘기기 힘들거나, 비인간적인 인면수심 성범죄자에게 1년 6개월 정도의 형만 내린다. 웬만한 정치인들의 불법 행각에는 100만 원 미만의 벌금형으로 서둘러 마무리하고 넘어간다. 전직 아무개 장관 아들의 군 시절 병가에는 유죄를 내리면서도 전직 아무개 의원 자녀의 십 수 건 불법 수준 행각에는 전부 무죄를 선고한다. 나라를 불필요한 소용돌이에 몰아넣는 극우 극좌의 악다구니 주장에 넓은 관용을 베푼다. 이런저런 죄목으로 고소당해 구속당한 종교인인지 정치인인지 헛갈리는 교회 목사 역시 무죄 방면해 주는 것으로 대범함을 과시한다.     

이러다 보니 사회 정의의 기준과 가치관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면서 그에 따른 반사적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인명을 가볍게 여기는 살상행위를 다루는 뉴스를 심심찮게 봐야 한다. 여성에 대한 잔인한 성폭력과 몰상식한 성희롱이 난무한다. 철없는 부모는 자녀를 폭행하고 굶기고 심지어 살해하기까지 한다. 이권만 보이면 주둥이부터 벌게져 달려드는 썩은 관료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제는 해외 이주자들까지 이 땅에서 갖가지 범죄행각을 쉽게 벌여댄다. 그렇게 풍속은 나날이 어지러워지고 있음이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코카시안 백묵원>에는 판관 아즈닥이 등장한다. 그루지아(조지아)의 누카시라는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총독이 처형당하자 총독 부인은 자신의 친아들 미헬을 버리고 도망친다. 이에 하녀 그루세는 반란군이 혈안으로 찾는 어린 미헬을 품에 안고 산악지대에 숨어 들어가 친아들처럼 기른다. 세월이 흐르고 옛 권력자들이 반란군을 몰아내자 총독 부인이 돌아와 미헬을 되찾으려 한다. 이에 그루세는 판관 아즈닥에게 하소연하고 아즈닥은 재판을 열어 양육권을 결정짓기로 한다. 그 재판 방법이란 것이 백묵으로 그린 원 안에 미헬을 세워둔 채 총독부인과 그루쉐로 하여금 각각 미헬의 다른 쪽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 ‘어린 미헬 잡아당기기’에 이기는 사람에게 양육권을 준다는 것이고. 총독 부인은 있는 힘껏 미헬을 잡아당기지만 그루쉐는 미헬의 손을 놓아준다. 자칫 미헬이 다칠까 걱정되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자 아즈닥은 앞뒤 따질 것 없이 그루쉐의 손을 들어준다. 그루쉐는 미헬을 되찾고 사랑하는 연인과도 결혼에 이르는 해피엔딩을 맛본다. 여기서 관점 하나가 생긴다. 판관 아즈닥이다. 그는 그루쉐의 심성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민중의 심성이었고 아즈닥은 그것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아즈닥은 민중의 심성에 맞는 맞춤형 판결을 내기 위해 ‘백묵원 재판’이라는 지혜를 발휘했고 그로써 현대판 솔로몬 왕이 된 것이다.                                      

코카시안 백묵원 공연 장면. 사진 베를린앙상블극단


이 내용은 코카시안 백묵원의 극중극으로 꾸며지는 것이고 그 앞에는 이런 장면이 덧붙여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코카서스의 계곡 사용권을 둘러싸고 지주 측과 소작인 측 간의 법정 재판이 일어난다. 이에 어느 가수가 홀연히 나서서 백묵원의 그루쉐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듣고 난 객석의 관객들은 이제 생각하도록 요구받는다. 아즈닥의 법철학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살펴본 관객은 현재 시점인 코카서스 계곡 사용권에 대해 지주 측을 지지할 것인지 소작인 측을 지지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주장하는 ‘서사극(敍事劇)’의 본질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재판은, 아즈닥이 실종되어 사라진, 변형되어 썩은 냄새만 요동치는 코카시안 백묵원이다. 판결은 국민 정서와 선을 긋고 있고 범법자들의 입가에는 악마의 웃음이 마르지 않는다. 서사극 <대한민국의 코카시안 백묵원> 역시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세계적 명판관 정약용을 대선배로 둔 이 땅의 판관들은 독서 좀 하면서 살기를 권한다. 책방에 가면 흠흠신서 책, 차고 넘친다. 어려우면 초등학생용 버전도 있으니 참고들하고.

                                                                      

20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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