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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유럽의 샹송 칸초네와 한국의 판소리

세상을 여는 잡학

유럽 음악의 역사는 기원전 4천 년 이집트 시대에서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제례 음악의 흔적인 하프, 관악기, 북 등이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스라엘 등에서 흐르던 음악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신전과 디오니소스 축제, 각종 연극에서 세속음악으로서의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4세기 무렵부터 유럽 땅에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오로지 저들의 신을 위한 암브로시우스 성가, 그레고리 성가가 대표하는 로마네스크 음악만 교회 안에서 울려 퍼지게 되었고 일상의 세속음악은 엄격한 통제를 받기에 이른다. 농민들은 그저 자신들이 직접 지어낸 엉성하고 투박한 노래를 들판에서 조심스럽게 읊었고, 목동들은 산에 들어가 입으로 갈대 피리나 물었다. 종교음악 자체도 모노폴리(Monopholy)라 하는 화음이 없는 단순한 단성(單聲) 음악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긴 암흑기가 지나는 중 10세기가 되면서 네덜란드에서 푸가 형식의 다성(多聲) 음악인 폴리포니(Polyphony)가 생겨난다. 중심이 되는 단선율에 여러 성부(聲部)를 가미, 화음을 얹는 한결 발전된 방식을 취한 것이다.   


프랑스 노틀담의 종글레르. 그림 magazine.nd.edu

                                

이즈음 들어 세속음악 역시 중요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시장이나 성을 떠돌아다니며 노래와 악기 연주를 팔고 요술 곡예까지 시연하는 광대의 등장이 변화의 시초였다. 이 광대를 프랑스어 권에서는 종글레르(Jongleur)로 불렀고, 독일어 권에서는 민네징어(Minnesinger), 영어권에서는 광대보다는 격을 조금 높인다는 의미로 기능인 뜻에 가까운 민스트럴(Minstrel)이라 했다. 훗날 세상은 이들을 음유시인이라 했으나 정작 시인들은 따로 있었다. 11세기 말부터 등장하는 트루바두르(Tourbadour)가 그 주인공이다. 트루바두르의 원조는 프랑스 중서부 뿌와티에의 백작이요 남서부 아퀴텡의 공작이었던 기욤으로, 종글레르의 활약을 유심히 지켜본 그는 자신이 직접 시를 지어 종글레르에게 그에 맞는 곡을 짓고 노래 부르도록 했다. 종글레르 입장에서도 멋진 가사를 얻을 수 있었기에 그들의 결합은 쉽게 이루어졌고,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음악들은 점차 세상 사람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마침내 종교의 통제를 벗어나 세속음악이 기지개를 피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맞춰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 기로 보르넬, 베르트랑 드 보른 등 많은 귀족이 트루바두르로 활약하기도 했다. 몇십 년 후 프랑스 북부 지역과 영국 런던에서 활약한 트루바두르의 후예 트루베르(Trouvere)들은 더욱 세련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군주들도 있었다. 기욤의 손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한 영국 왕 헨리 2세,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사자 왕 리처드 1세, 스페인 북부의 나바라(Navarra) 왕국의 티보 4세 등이 트루베르 명단에 들어있다. 세속음악의 변화에는 약 2백 명 정도의 트루베르뿐 아니라 십자군 전쟁에서 활약한 기사들도 힘을 보탰다. 십자군 전쟁이 수그러들면서 기사들은 용병이 필요 없어진 영주와 교회로부터 내침을 받았다. 유럽의 기사는 유사시에는 전투를 수행하고 평소에는 귀족 파티에 불려가 귀부인들에게 시를 지어 바쳤다. 군인이자 시인이었던 기사들은 거리로 내몰리면서 시 짓는 재주를 앞세워 종글레르와 손을 잡았다. 귀족과 기사들을 협력자로 둔 종글레르들은 서당 개 풍월 삼 년 격으로 점차 작시 능력에 눈을 뜨게 되더니 마침내 직접 가사를 짓고 곡을 붙여 노래 부르는 1인 엔터테이너로 변신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오늘날의 가수 협회일 음악가 조합을 만들어 전문 음악인으로서 메네스트렐(Menestrel. 佳客)이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든든한 사회적 지위를 얻기도 했다.          


종글레르의 노래책 샹소니에. 사진 chansonniers.pwch.dk

                                                      

이 당시 종글레르들이 지은 노래 중 3백여 곡이 노래책이라는 뜻의 『샹소니에(Chansonniers)』로 전해지고 있다. 샹송의 명칭은 바로 이 책에서 나왔다. 대여섯 개의 연으로 이어지는 운문 형식을 띠는 그들의 시를 ‘칸초(Canso)’라 했다. 칸초는 서민들을 위한 연가(戀歌)로 칸초네 명칭이 이것에서 나왔음이다. 후렴구가 있는 ‘당사(Dansa)’ 혹은 ‘발라다(Balada)’라는 춤곡까지 생겨났다. 당사는 오늘날의 춤곡, 발라다는 서정 가요의 시발점이 되었다. 남녀 간의 대화체 노래인 파스토렐라(Pastorela), 훗날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영향을 준 음악으로 연인을 위한 알바(Alba) 같은 노래들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선사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재액을 물리치는 굿에서 굿 음악을 들었고, 사람이 죽으면 상두 소리와 묘 다지는 소리를 함께 불렀다. 고대 부여인들은 해마다 연말이 되면 천제를 지냈다. 그들은 천제에 참가한 사람들을 집단 엑스터시로 이끌어 일체감을 북돋기 위함은 물론, 풍요를 기원하는 열망을 천신에게 어필하는 방법으로써 원시적인 춤과 함께 음악을 동원했다. 신의 귀를 열고 마음을 얻기 위하여 북을 크게 두들기고 목청껏 노래했다. 부여 이후 고대국가들이 들어서면서 구지가, 도솔가, 황조가, 해가사, 공후인, 정읍사와 같은 시가(詩歌)들이 지어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고, 서양의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와 조선 중엽 때에는 가요, 가사, 노동요, 민요가 많이 불리었다. 이러한 노래들은 계층별로 나뉘어 불렸거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계층 구분을 떠나 모든 사람의 총애를 받는 판소리가 등장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판소리는 충청도에서는 중고제로, 전라도에서는 동편제와 서편제, 보성제 등으로 각자의 길을 다졌다. 종글레르의 노래들이 지역에 맞춰 샹송과 칸초네로 각각 정립한 것과 유사성을 갖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으니 유럽에는 오로지 농민 출신의 종글레르만 있었다면 이 땅의 종글레르들은 출신이 다양했다. 우선 무당들의 무악(舞樂)에서 판소리가 발원했다는 설이 있으니 무당이 판소리 탄생에의 한 축을 맡은 셈이다. 왕실 잔치에서 재주를 시연하던 광대들도 한몫했다고 한다. 두 번의 호란(胡亂)을 겪는 동안 국력 피폐에 국고마저 증발하자 일체의 왕실 행사나 잔치를 치를 여력이 없어졌기에 산대도감 소속이었던 광대들은 도리없이 모두 궁 밖으로 내쳐졌다. 이에 광대들은 생존을 위해 저자 판에 뛰어들어 각종 놀이와 음악을 시연했는데, 중간중간 풀어내던 재담이 판소리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사람 모아놓고 소설을 읽어주던 전기수(傳奇叟)의 낭독 음은 판소리의 ‘아니리’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하고.  

   

위에서 만들어져 아래로 흐르는 문화는 문화가 아니라 사람을 박제로 만드는 세뇌 행위다. 군부 정권이 활개 치던 시절 이 땅에는 통제 하향 문화의 칼날이 시퍼렇게 서 있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상향 문화의 채널을 옥죈 자물쇠였다. 밑에서부터 끓어 올라 위까지 뜨겁게 달구는 문화가 진정한 그 시대의 문화가 되고 여기에 관성이 붙어 후대에까지 전승되는 것이다. 유럽의 농민들이 그랬듯이 조선에서도 민초들의 감성과 신명이 오늘날 세계적인 인류 문화유산의 초석을 다졌음을 볼 때 문화의 진정한 생명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인데, 한국의 문화예술에는 문화예술인과 전문가의 상향 의견은 드물고 높은 자리에 있는 관료들의 하향 입김만 넘치니 슬플 때가 한두 번 아니다.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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