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여는 잡학
조선 중기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 5인방으로 정철, 심희수, 류성룡, 이정구, 이항복이 있다. 이들은 틈만 나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즐겼다. 어느 늦가을 날 여느 때처럼 모여 앉아 술판을 벌이기 시작한 이들은 기왕이면 술맛 좀 올리자고 재미난 내기를 걸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인지를 시로 표현해서 장원을 뽑자는 것이었다.
모임 중 가장 연장자로 좌장 격이었던 정철이 먼저 나서 시를 읊었다. 청소낭월 누두알운성(淸宵朗月 樓頭遏雲聲).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로세~” 하고는 여유 있게 수염을 쓸었다. 당대 최고 문장가다운 한 수에 다들 고개 들어 감탄을 연발했다. 두 번째 연장자인 류성룡이 입을 열었다. 효창수여 소조주적성(曉窓睡餘 小槽酒適聲). “새벽 창 잠결에 들리는 아내가 작은 통에 술 거르는 소리라~”. 마시지 않아도 취할 소리에 모두 무릎 내려치며 탄성을 냈다. 열다섯 어린 나이 때 자기보다 세 살 더 많은 당대 최고 일패기생 일타홍과 애절한 사랑을 나눈 것으로 세간의 부러움을 샀던 심희수가 이어받았다. 만산홍수 풍전원수성(萬山紅樹 風前遠岫聲). “온 산 가득 찬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 스쳐 불어가는 바람 소리는 어떠할지요?~”. 아름다운 추경의 정수가 눈 앞에 펼쳐지니 이 또한 갈채를 받았다. 정철에게는 거의 아들뻘 되는 모임의 막내 이정구가 나섰다. 산간초당 재자영시성(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산골 마을 초당 도련님의 시 읊는 소리도 좋겠다 싶습니다만~”. 아련한 옛 생각도 떠올려지겠다, 선비 되어 어찌 마다할 소릴까보냐 싶어 다들 찬사를 주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항복 차례. 잠시 뜸을 들이며 몸을 좌우로 꺼떡거리던 그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시구가 흘러나왔다. 동방양소 가인해군성(洞房良宵 佳人解裙聲).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잠시 정적이 흐르면서 모두 입을 벌린 채 넋을 잃어야 했고 그로써 내기의 장원은 결정되었다. 소리에서도 시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우리 조상들의 이토록 그윽한 풍류는 세상천지 어디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20여 년 전, 환경부에서 아주 멋진 일을 했다. 인간 사회와 맞물려 있는 자연환경과 일상의 현장에서 생겨나는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국민 공모를 시행, 전문가들의 신중한 심사를 거쳐 마침내 100개의 아름다운 소리를 선정하고는 전문가들을 시켜 원음과 영상을 녹취 제작하도록 했다. 1년에 걸친 작업 끝에 마침내 사계, 향토, 일깨움, 추억, 생명 등으로 분류하여 구성한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을 발표하고 그 음원을 국민에게 제공했다.
사계 카테고리의 ‘봄’에 해당하는 아름다운 소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고드름 낙수 소리, 얼음장 밑 물 흐르는 소리, 동굴 안 낙수 소리 등, 주로 해빙과 관련된 소리다. 여름에는 폭포 소리, 파도에 휩쓸리는 해변의 몽돌 소리, 대나무 부딪는 소리, 천둥소리. 장마 비바람 소리, 우박 떨어지는 소리, 가시연꽃밭의 폭우 소리, 불어난 계곡물 쏟아져 내리는 소리로 여름날의 풍부한 물이 개입하고 있다. 가을에는 벼 이삭 부딪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 싸리비로 낙엽 쓰는 소리, 낙엽 밟는 소리, 바람에 낙엽 구르는 소리, 억새 부딪히는 소리 등으로, 대체로 낙엽이 주역을 맡고 있다. 겨울에는 눈보라 소리, 설피 신고 눈 밟는 소리, 겨울 얼음장 깨지는 소리인지라 눈이 겨울의 소리를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의 분야별로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향토 카테고리 중 ‘고향’에서는 소 울음소리요, ‘어촌’에서는 해녀 숨비소리, ‘일터’에서는 절구 찧는 소리 등이 들어있다. 추억을 카테고리로 잡은 소리에는 ‘울려 퍼지는 소리’에 에밀레종 소리, 성당 종소리 등이 들어가 있음이라, 종교의 선함이 널리 울려 퍼져나감을 연상하게 된다. 학교 종소리와 아이들 전통놀이 소리는 추억을 돌아보게 하는 소리요, 물레방아 소리와 다듬이질 소리는 향수를 느끼게 하는 소리가 되고 있다. 생명 카테고리에 드는 소리로는, 새 울음소리가 단연 두각을 보이고, 벌레 우는 소리, 개구리 울음소리도 한몫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섬진강 동자개 우는 소리와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 연어 돌아오는 소리로 한국의 강에서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소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땅에서 이런 소리만 들으며 살수만 있다면 십승지니 무릉도원이니 샹그릴라니 하는 곳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는 자율(Autonomous), 감각(Sensory), 쾌락(Meridian), 반응(Response)의 줄임말 ASMR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한다는 말로, 이것을 붙인 ‘ASMR 소리’가 전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살랑 바람에 작고 청아한 소리를 내는 풍경 소리, 바람이 언뜻 부는 소리, 연못 수면 위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강물을 저어가는 노 소리, 장작 타는 소리 등과 같은 미음(微音)인데, 가만히 보면 20년 전 우리네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이 갖는 아름다움에의 청감이 ASMR의 표준이 되고 있음이다.
소리는 그저 공기 속에서 일어나는 진동일 뿐이지만 사람이 느끼고 즐기는 오감 중 하나이다. 소리는 크게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언어, 문명에서 파생되는 소음,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음악, 자연으로부터 생기는 음향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 소리 중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소리와 불편하게 하는 소리로 양분한다면, 평소 우리는 분명코 불편한 소리를 더 많이 들으며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어울려 살다 보면 별별 소리를 다 들어야 하기에 그로써 얻어야 하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들어서 불편한 소리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로, 인간의 일상 영역이 자연과 점점 더 거리감을 두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날로 팽배해져 감을 들 수 있겠다. 도심을 수놓는 자동차들이 내는 소리, 장소를 불문하는 기독교 광신도들의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외침, 사람들 간에 서로 감정 올려 멱살잡이하는 소리, 술집에서 옆자리 신경 쓰지 않는 몰상식 주정 소리, 유흥 환락가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에 가까운 음악 소리, 주거 공간에서의 층간 소음, 문명의 파열음인 화이트 노이즈 등등은 매양 들어야 하는 생활 소음이다.
생활 소음이야 우리네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 쳐도 인간이라면 듣지도 내지도 말아야 할 끔찍한 소리도 있다. 보이스피싱은 21세기에 생겨난 가증스러운 범죄 소리요, 여의도 정치꾼들이 상대 당을 해코지하고자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내지르는 소리는 국민 혈압 평균치를 올리는 개소리요, 선거에 임해 밝은 비전의 정견 대신 상대방 약점만 집어내어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소리는 속 좁고 저급한 시정무뢰의 지청구 소리요, 극단적인 유튜버들이 근거 없이 설레발 치는 해괴망측 소리는 썩은 내 진동하는 오물 소리요, 국민에게 고통이 가든 말든 오로지 저네들 이익만을 부여잡는 극렬 이익단체의 확성기 찢어나가도록 악악대는 소리는 떼도둑의 추악한 소리이다.
1876년 그레이엄 벨의 전화, 1877년 에디슨의 축음기 등이 발명된 이래 소리 문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고 그에 맞춰 무수한 소리가 양산되어왔다. 혼탁한 세상 탓하며 불편한 소리를 줄이겠다고 문명을 제어할 수는 없다. 인간의 지친 심신과 영혼을 일으켜 세워줄 ASMR 소리가 일상에 편재되도록 하는 것에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2021.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