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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한국인과 부동산

세상을 여는 잡학

옛 한국인들의 주거 공간은 협소했다. 한반도 땅 70%가 산악지대요 여기에 경작지를 빼고 나면 사람이 집 짓고 살 만한 터에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조선 초기 전체 인구 5백 5십만 명 중 한양 인구수는 세종 시대 기준으로 약 10만 명이었다. 이 시기의 런던과 파리 인구보다 더 많았고 베네치아 인구와는 비슷했다. 18세기 말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을 때는 베네치아와 피렌체 인구보다 두 배 세 배 더 많았다. 그런 식으로 인구 대비 생활 공간 부족이라는 것도 이유일 수 있겠으나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큰 집에 사는 것을 별스럽게 금기시했다. 즉 소가(小家) 철학을 추구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규모가 큰 집’의 뜻을 갖는 한자가 옥(屋)이다. 이 옥을 파자하면 ‘송장 시(尸)’와 ‘이를 지(至)’가 나오니 곧 큰 집에 살면 사람이 죽는다는 뜻이 된다. 그 반대로 작은 집은 사(舍)라고 불렀다. 이것을 파자하면 ‘사람 인(人)’ ‘길할 길(吉)’로 나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웬만하면 큰 집을 피하고 작은 집을 선호한 것이다.                                       

이 땅에 산업화 시대가 본격화될 무렵인 1970년대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유별나게 많았다. 도시로 몰려든 농촌 출신 사람들은 틈만 나면 두고 온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렸고, 그러한 심사를 달래준 것이 ‘고향 노래’였다. 그 노래들에서 고향의 대명사로 불린 것이 ‘초가삼간’이었다. 두 칸(6.6㎡) 크기의 방 하나에 한 칸 크기의 부엌 하나. 집 구조가 딱 그렇게 되기에 ‘삼간’인 것이요, 이것이 바로 옛 조상들의 가옥 기준이었다. 또 예부터 집을 가지고 사치 부리는 것을 나라에서 엄금하기도 했다. 성종 때 승지 벼슬하던 외척이 있었다. 그자가 자단 향나무로 집을 크게 지어 산다는 말을 들은 성종은 가차 없이 붙잡아다가 손수 칼로 베어 죽였다. 시범 삼아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려고 한 것이다. 그런 전통은 조선 말 개화기 때까지 이어졌다. 지나치게 크게 지은 집을 찾아내어 그 집 기둥을 잘라 집을 납작하게 주저앉히던 ‘납작 별감’이라는 중인 출신 관리가 있었음이 그 증거다. 일상에서도 집 크기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분명한 기준이 되었다. 선비들은 서로 교유를 맺기 전 상대가 옥인(屋人)인가 사인(舍人)인가, 즉 큰 집에 사는 사람인가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인가를 놓고 교유 여부를 결정하였을 정도다.     


초가삼간. 사진 한국민속촌


우리 조상들은 가옥을 구조, 크기, 쓰임새에 따라 나누어 불렀다. 매우 호화로운 가옥을 장(莊), 각(閣), 대(臺)라 했다. 중국 정부가 국빈을 접대하는 곳인 베이징의 조어대라는 호텔에 대(臺)가 들어가 있다. 한국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 명동 근처 회현동 사거리에 대연각이라는 호텔이 있었고 여기에 각(閣)이 쓰이고 있다. 대연각은 1971년 대형 화재사고를 당해 많은 사람이 아까운 생명을 잃은 것으로 유명해진 호텔이었다. 그 당시 TV가 생중계로 현장을 중계하였고 화마에 쫓긴 사람들이 고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는 황망한 장면이 고스란히 전파를 타기도 했다. 큰집인 옥에 들어가 끔찍한 봉변당하는 모습을 전 국민이 목격한 것이다.


대연각호텔 화재 장면(1971년). 사진 위키백과

                                            

장(莊)자는 오늘날 깨끗하고 편의시설까지 잘 갖춘 격 높은 여관들 이름에 전용으로 쓰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이, 웬만하면 차려서 망한 사람 없을 정도로 장급 여관은 이제 서민들의 일상(?) 애용 공간이 되어 있음이다. 관(館)은 사람이 상주하지 않고 잠시 머물다 가는 집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외박용 가옥을 일반적으로 여관이라 부른 것이다. 객사(客舍)는 옛날에 관리들이 지방 출장 갈 때 머물던 가옥이었다. 전주에 가면 조선 시대 때의 객사 원형을 잘 보존한 객사 건물이 전라감영 터와 경기전 근처에 소재하고 있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고향, 즉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 하여 객사 규모도 대단히 크게 지었다. 헌(軒)은 담이 없고 기둥 위로 지붕을 얹은 집이다. 문 달린 방을 좌우로 두고 그 중간에 대청마루를 깔았다. 옛날 지방의 관아마다 수령이 직무를 수행하던 가옥을 동헌이라 불렀다. 변학도가 의자에 앉아 춘향과 밀당하던 공간이 바로 그 동헌의 대청마루였고. 

루(樓)는 바닥이 땅 위에 뜨고 그 밑은 휑하니 터져 있는 가옥이다. 헌과 같이 기둥에 지붕을 얹는 식으로 형태는 유사하지만, 문이 달린 방은 두지 않고 지붕 아래 개방된 공간만 취한다.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는 어김없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올라가 휴식 취하는 공간으로 애용했다. 루는 서원 건축물에 필수로 포함되기도 했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을 위한 단순 휴식 공간으로만 쓰이지 않았던 것이, 휴식 중에도 배운 바를 되새기는 공간이었고, 루 앞에 탁 트인 자연을 바라보며 선비로서의 호기(豪氣)를 다듬는 공간이었다. 지역 유림이 공론 다질 일 있으면 모여서 의견을 나누던 엄중한 공간이기도 했다. 경관용 루는 대체로 두어 칸 크기였으나 서원의 루는 서너 칸에서 예닐곱 칸 크기의 규모를 갖는다. 어쩌다 규모가 큰 경관용 루도 있긴 하다. 경복궁 경회루와 경주 안압지의 1호 2호 3호 루는 궁궐에 배치된 건축물인지라 규모가 클 수밖에 없고, 남원 광한루는 남원으로 유배당한 황희와 훗날 관찰사로 내려간 정철의 호방한 풍류로 인해 특별나게 지어진 것이다.

막(幕)은 초라한 가옥을 말한다. 오두막, 주막, 새막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당(堂)은 땅 위에 지붕만 덮어서 가린 아주 낮은 집을 이른다. 산골 오지 마을에서 이 당을 혹간 볼 수 있다. 납작한 지붕 안을 들여다보면 움집처럼 땅을 파내어 사람이 겨우 기거할 공간만 갖추고 있다. 옛 선비들은 서재나 사랑방을 만들어 놓고 방 이름에 당을 붙임으로써 보잘것없는 공간임을 내세우며 스스로 겸양을 취했다. 사당(祠堂)은 귀신을 모시기에 같은 당으로 볼 수 없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재(齋)가 있다. 재는 책을 읽고 도를 닦는 신성한 공간을 이른다. 내외 장식과 화려함은 일호도 용납되지 않는다. 넓이 역시 사람 두어 명 들어앉을 정도다. 이렇듯이 한국인은 집에 관하여서는 소박하고 청렴하며 겸양을 보이는 문화를 장구하게 누린 것이다.     


1970년대에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국제수지 악화라는 경제 삼중고를 만나면서 같은 시기에 고향 노래로 울려 퍼지던 초가삼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부동산 투기 유행이 일어났다. 천박한 천민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부동산 투기 풍토는 지금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져 왔고, 개발 명목으로 땅값 집값은 이미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그런 와중에 한국인에게 있어서 집은 생존 기본 요소로 보기에는 너무도 벅찬 대상이 되어 있다. 평생 월급을 쓰지 않고 모아도 집 한 채 마련하는 것은 요원하기만 하다. 남의 집 세내어 사는 것 역시 서민들의 생활고 요인 된 지 오래다. 공기관 근무자들은 기회만 생기면 몰래 빼낸 개발 정보로 떼돈 벌어들여 국민의 평균 혈압수치를 올린다. 그렇듯이 부동산 문제는 들어서는 정부마다 골머리를 앓게 한다. 20대 대선을 목전에 둔 지금, 후보들의 공약에는 부동산 정책이 경쟁적으로 들어가 있다. 그와 함께 부동산 투기 관련한 이런저런 사건을 놓고 진실 여부를 떠나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기도 하다.


옛말 틀린 것 없다. 옥(屋)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옛 조상들은 지혜를 발휘하며 ‘집’으로 인해 세상 시끄럽게 하거나 사람 죽어 나가는 것을 피하며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았건만, 오늘날 그 후손들은 현대판 옥(屋)인 부동산을 끌어안은 채 아수라 난장을 벌이고 있다. 이번 대선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이 땅의 메시아가 강림해 주길 물 떠놓고 앙망할 뿐이다.


202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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