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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철 Jong Choi Apr 19. 2022

해학과 풍자, 그리고 라블레의 웃음

세상을 여는 잡학

웃음에 의식이 작용하면 사회적 웃음이 된다. 그런 웃음을 즐기는 존재는 지구상 생명체 중 인간만이 유일하다. 인간의 사회적 웃음은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다수가 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으로 다수가 웃는 웃음이 있다. 조롱의 대상이 된 사람은 감정에 받칠 수 있고 그것이 분노로 이어져 자칫 법적 다툼으로까지 내달을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웃음은 불편한 웃음이요 소모적 웃음이다. 이에 반해 한 사람이 사회 공통 현상을 해학적으로 풍자하여 다수를 웃게 하는 웃음이 있다. 누구도 법적 다툼의 원고와 피고가 되지 않는 공적 웃음이다. 생산적 웃음이요, 이것의 문학적 표현이 ‘라블레의 웃음’이다.      

라블레의 웃음은 20세기 러시아의 문학 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이 이름 지었다. 16세기 중엽, 작가로 활약했던 프랑스와 라블레는 민중 간에 전해지던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 귀중한 연대기’라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2서> 『팡타그뤼엘(Pantagruel)』을 발표했다. 책에서 팡타그뤼엘은 짓궂은 장난을 즐기며 사회를 풍자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책은 세인의 격한 찬반을 유발하면서 큰 관심을 받았고 이에 힘입은 라블레는 『제2서 팡타그뤼엘』의 전편 격이 되는 <제1서> 『가르강튀아(Gargantua)』를 발표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거대한 블랙홀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 가르강튀아는 팡타그뤼엘의 아버지다. 몸집 크고 멍청하기만 한 거인 가르강튀아는 당시 부패한 가톨릭교를 신랄하게 조롱하여 민중이 배를 잡고 웃게 했다. 사회 공통 현상을 해학과 풍자로 버무려 공적 웃음을 유발한 것이기에 이때의 민중은 생산적 웃음을 즐긴 것이다. 이 웃음을 바흐친이 라블레의 웃음이라 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위고와 발자크는 ‘피타고라스,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파네스, 단테를 합친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라고까지 라블레를 높게 평가하기도 한 바 있다. 라블레가 세상에 내놓은 웃음을 ‘인간 정신의 심연’으로 존중한 까닭이다. 그런 것을 볼 때 라블레의 웃음은 인류 문명에 있어서 영양제 기능을 발휘하는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폴 구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é. 1932~1983)이 그린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몇 년 전부터 공중파 TV 방송사에서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사라지고 어느 케이블 TV 방송사 한 곳에서만 유일하게 코미디 프로그램을 유지하더니, 최근에야 공중파 TV 방송사 한 곳에서 어렵사리 코미디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다. 그래봤자 가뭄에 콩 내는 격이다. 이 현상은 세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첫째, 방송사에서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퇴출당한 현상부터 짚어봐야 한다. 당연한 것이, 그동안 뻔한 얘기나 싫증 나는 내용으로 시청자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틀 하나 잘 잡았다 싶은 코너가 생겨나 어쩌다 인기를 얻게 되면 연기하는 코미디언이나 보는 시청자나 영혼이 탈탈 털릴 때까지 질리도록 우려먹는다. 그렇게 지쳐가는 와중에 작가나 코미디언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하는 숙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하면 코너는 끝내 도태되고 만다. 둘째, 코미디 프로그램 증발로 방송사에서 퇴출당한 코미디언들의 새로운 활동을 봐야 한다.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 바로 SNS 시대에 발맞춰 유튜버로 활동하는 것이다. 즉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웃음을 유발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포스팅하는 것이다. 일부는 구독자 수를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을 넘기며 보란 듯이 성공 가도를 달리기에 많은 코미디언으로부터 선망을 얻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유튜브로 옮겨간 코미디는 그 내용이나 수준이 여전히 대부분 B급에 머무르면서 방송사에서 겪었던 소재 고갈, 새로운 틀 개발 미흡이라는 현상에 또다시 시달리고 있다. 셋째, 공중파 방송사와 케이블 방송사, 그리고 유튜브로 접하는 오늘날의 코미디 프로그램은 생명력을 상실당했다. 몸짓이나 어투, 상황 전개가 그저 유행만 좇는다. 유행은 돌아서면 잊히는 것일 뿐 그 어떤 정신적 사회적 의미가 될 수 없다. 어쩌다 한두 장면, 코미디언이 사회의 어떤 부조리한 현상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 코너의 전개에 필요한 일부로 활용할 뿐이다. 어느 프로그램은 대놓고 현재의 정치인들을 웃음 소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들의 흉내를 내는 정도로 그저 얄팍한 웃음을 유발하는 것에 머문다. 그렇다고 현행 코미디 프로그램들의 격 낮음을 두고 그 존재 자체를 무시할 것은 아니다. B급 문화가 갖는 기능도 인정해 줄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생산적 웃음을 유발하는 최상의 코드가 바로 유머와 풍간(諷諫. Paradox)이다. 슬랩스틱 같은 어쭙잖은 몸짓과 남 흉내 잘 내는 것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방식은 돌아서면 잊히는 배설 행위에 불과하지만, 유머와 풍간은 해학 풍자와 함께 분명한 주제와 강한 비판 의식을 품기에 고급문화가 된다. 유머보다는 풍간이 한 수 위다. 풍간은 웃음 유발과 함께 또 다른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웃음을 짓게 한 그 이유를 엄중하게 돌아보고 때로는 실제로 교정하도록 하기도 하는 것이다. 고대 중원의 왕실에서는 광대들이 세상 물정의 잘못된 점을 놀이나 재담으로 왕에게 일러주어 교정에 나서도록 했다. 때로는 왕의 실정도 풍간 소재가 되었다. 그렇다고 자기의 실정을 놀리는 광대들에게 벌을 내리는 왕은 없었다. 풍간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광대가 풍간을 담당했다. 어느 영주에게 사랑스러운 말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 애마가 식음을 끊더니 점점 비실비실해져 갔다. 애가 탄 영주는 말 살려낼 방도를 널리 구했다. 이때 영주를 모시고 있던 광대가 나서서 이렇게 이른다. “그 말을 주교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며칠도 되지 않아 살찐 말이 될 것입니다.” 당시 유럽 땅에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탐욕에 빠져 횡포를 부리지 않는 가톨릭 주교가 없었기에 광대가 그런 식으로 주교를 꼬집은 것이다. 풍간의 묘가 지혜롭게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스탠딩 코미디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에 이 풍간이 당연히 들어있음이요 오늘날 각종 미디어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서양인들은 라블레의 웃음을 넘치도록 즐기고 있음이다. 


한국인에게도 엄연히 풍간 문화가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정3품에 해당하는 낭사(郎舍) 관원들이, 조선 시대에는 정5품에 해당하는 사간원 사간(司諫)들이 목숨 걸고 왕에게 간언(諫言)을 올렸다. 여기에는 해학, 풍자, 웃음이 개입하지 않고 직설적인 지적만 있을 뿐이라 풍간의 일부 기능인 교정 요구만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호란 이후 국고 거덜 난 궁궐에서 쫓겨난 광대들이 민간에 파고들어 재주를 팔 때 완벽한 풍간 코드를 활용했다. 얼빠진 지배층이나 종교적 신성성을 상실한 채 타락에 빠진 불교를 조롱하는 해학과 풍자의 즐거움을 힘없고 핍박받는 민중에게 아낌없이 선사하면서 부조리한 세상을 꾸짖었다.      

그런 풍간을 다룬 것이 탈놀이다. 탈놀이는 또 그 자체로 축제였다. 서양인도 풍자와 해학을 축제로 승화했으니 그것이 그들의 카니발이다. 사순절 전에 시행하는 것이기에 카니발에는 호식(好食) 성격이 강하나 그보다도 풍자와 해학, 상하층 간 역할 전환, 호색(好色)이 더 넘실거린다. 탈놀이도 그렇다. 계층 간의 우위 전환, 적나라한 호색이 들락날락하는 것은 한국의 탈놀이와 서양의 카니발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바다. 옛 조상들은 한국인 고유의 웃음 코드인 탈놀이를 통해 라블레의 웃음을 능가하는 수준 높은 웃음을 즐겼던 것인데, 이제는 그런 문화 자체가 박제된 지 오래요 어쩌다 잠깐씩 세상 구경 나온다 해도 이 사회에 당당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일부 후보의 한심한 언행이 국민에게 허탈한 웃음을 강요하고 있는 요즘이다. 21세기 들어 유행에 미친 미디어가 한국인의 웃음에서 영혼을 희석하는 것도 모자라는지 걸핏하면 한심한 정치꾼들이 나서 기운 빼는 헛웃음까지 짓게 하고 있다. 웃는데, 웃는 것이 아니다. 


202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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