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교통사고
그 전화 소리는 일상의 삶을 헝클어버렸다. 미국에 도착한 지 2년 반이 흘러가던 때였고 미국 교회 담임 목회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2008년 12월 어느 주일 밤이었다.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여동생이었다. 앞뒤가 없었다. 다짜고짜 울면서
“언니, 엄마 교통사고가 났어. 우리 셋 다 지금 삼천포로 가는 중이야. 엄마가, 엄마가….”
주인공이 되면 안 되는 한 줄 기사의 뉴스의 주인공이 엄마가 되어버렸다.
순간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내 생애 이리 놀란 소식이 있었나 싶었다. 아버지께 황급히 전화를 드렸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엄마가 왜요?”
“새벽에 수영을 나간 사람이 오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길을 나서 엄마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불안해서 결국 경찰에 연락해 보니 새벽에 교통사고가 나서 진주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란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엄마를 새벽 신호등을 무시하고 돌진한 갤로퍼 승용차가 들이받아 몸이 공중으로 날았다 떨어졌단다. 아마도 애들이 오면 산소 호흡기를 떼야할 것 같다. “
아버지와 통화를 한 후에 난 내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남편은 지금 짐을 싸서 밤 비행기라도 타라고 했다. 몸이 얼어붙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저 지금 한국 갈 거예요. 저 도착할 때까지 엄마 산소 호흡기를 떼면 안 돼요. 나도 엄마 만나야 해요. 아셨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날 남편이 등 떠민 밤 0시 비행기는 타지 못했다. 탈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작은방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최대한 몸을 말았다. 그리고 아침이 될 때까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아침이 되니 짐을 꾸릴 힘이 조금 생겼다. 짐을 쌌다. 낮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먹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엄마의 교통사고는 나쁜 나 때문이었다. 나는 나쁜 딸이었다. 매 순간 나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었다.
엄마의 사고가 나의 불효와 연결되었다. 내가 나쁜 사람이라 엄마에게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았다. 나는 나쁜 사람이라 엄마가 죽게 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슬픈 사연을 가슴에 품고 비행기를 타는 건 낯선 고통이었다. 14시간 내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물만 마셨다.
한국에 도착하고 엄마가 누워 계신 병원까지 가는 일도 까마득했다. 6시간이 걸렸다. 진주 터미널에서 걸어 도착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을 막 넘기고 있었다. 친척들은 내가 온다는 소식에 내 얼굴 본다며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중환자만 있다는 응급실 안쪽으로 갔다.
엄마는 머리가 밀리고 창백한 낯빛으로 온몸이 퉁퉁 부은 채로 누워계셨다. 사고 소식을 듣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엄마 곁으로 오는 데 3일이 꼬박 걸렸다. 나와 엄마를 남겨 두고 모든 가족이 나갔다. 엄마의 귀에 계속 말했다.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못된 나 때문에 힘들었지. 엄마”
난 슬프지 않았다. 난 무서웠다. 못된 내가 벌 받는 것 같았다. 내 잘못 때문에 엄마가 이런 사고를 당했다는 생각으로 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슬퍼할 수도 없는 공포감이 나를 감쌌다. 엄마의 손을 만지고 엄마의 발을 만지고 엄마의 몸을 만졌다. 엄마의 손, 발, 온몸이 따뜻했다. 온기가 남아 있어서 감사했다. 따뜻한 엄마의 몸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거듭 엄마의 귀에 속삭였다. 뒷날 응급실에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그간의 상황을 브리핑하러 온 의사의 멱살을 아버지가 잡았다.
“이놈들아, 수술한다고 머리까지 밀어 놓고 왜 수술 안 했냐? 이 나쁜 놈들아. 왜 포기했냐고?”
응급실이 떠나갈 듯 아버지는 의사를 향해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막내와 내가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아버지의 외침 안에는 엄마를 향한 사랑이 있었다. 평생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외도하며 엄마를 힘들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엄마를 사랑했구나. 그래서 저리 슬프고 원통하구나. 난 아버지의 난동이 부끄럽지 않았다. 가슴이 시원했다. 누군가에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왜 엄마를 살리지 못했냐고 의사를 다그치고 싶었다. 우리가 왜 아내를 엄마를 잃어야 하냐고 대신 소리치는 아버지가 있어 감사했다.
엄마의 생명은 오후가 되면서 확연하게 미약해졌다. 목요일 오후 4시경 계기판의 숫자가 60이 되고 호흡이 멈추자 의사가 엄마의 사망을 선고했다. 사망 선고 이후 간호사들이 커튼을 쳐 주었고 우린 오열했다. 오열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엄마의 육신과 우리는 떨어졌다. 엄마는 장의사 차에 태워졌고 우린 승용차를 탔다. 조금 전까지 함께 한 공간에서 온기를 나누었는데 삶과 죽음의 간 극은 우리를 그렇게 벌여 놓았다. 다시는 육신이 함께할 수 없는 공간의 이별이 찾아왔다.
장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장례 문화가 바뀌어 가족들은 문상 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극단의 두려움, 극단의 아무렇지도 않음이 내 속에 공존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정과 인격이 분리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난 분열을 경험했다. 엄마의 죽음은 내 현실이 아니었다.
엄마는 자신의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뜻밖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엄마랑 유난히 사이가 각별했던 고모는 교통사고가 난 자리에 무당을 데리고 가셨다. 굿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 엄마 영혼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모 굿을 했는데 아직도 못 떠났다고 말하면 굿을 또 할 거예요?”
고모는 대답을 못 했다. 고모의 슬픔과 두려움을 덜어내는 방법에 난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크리스천인 걸 아는 가족들은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장례 후 아버지와 한 달을 지내며 아버지의 독립적인 삶을 의논하고 집안 살림을 하는 방법을 알려 드렸다. 아버지와 이별의 시간이 왔다. 아버지와 헤어지는 공항에서 난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나의 하늘 아버지 난 육신의 아버지를 이곳에 두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미국 가서 당신의 아들들을 열심히 마음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이곳 육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돌보아 주세요.”
난 영혼의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육신의 아버지를 부탁드리는 기도를 올렸다.
엄마를 그렇게 하늘나라로 보낸 후 나와 막냇동생은 책을 공유하며 슬픔과 죄책감을 덜어냈다.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박경철의 <시골 의사> 등 죽음을 소재로 한 책을 각자의 공간에서 읽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다.
‘태야 이 책 읽어줘’
‘누나 이 책 읽어줘’
막내가 부탁한 <엄마를 부탁해> 책을 읽고 나서야 나의 죄책감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부모를 보낸 모든 자녀에게 남는 감정이란 걸 알았다. 내 몫의 죄책감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책을 권해준 동생이 고마웠다. 동생도 나에게 고마워했을 것이다. 많은 말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지만 생략된 글자들 뒤에 우린 그렇게 슬픔을 나누는 동지가 되었다.